1520화. 이건 내 잘못이 아니지 않나? (5)
이를 악문 탓에 힘줄이 꿈틀거리는 풍영신개의 얼굴을 보며 화산 제자들이 난감해하는 와중, 누군가가 헤헤 웃었다.
“에이, 뭐 당연한 걸.”
“…….”
“그렇게 공치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당연한 일이죠, 당연한 일! 하하하하!”
풍영신개는 아예 넋을 놓고 말았다.
화산 제자들이 마음속으로나마 박수갈채를 보냈다.
‘우리 청명이 잘한다!’
‘사람이 눈치 없는 게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눈치 없는 건 맞습니까? 저 새끼 눈치 귀신인데 일부러 먹이는 거 아닙니까?’
‘아무렴 어때?’
짧은 순간에 낯빛이 수십 번이나 바뀌던 풍영신개가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감사드립니다.”
복잡하고도 미묘할 것이다.
화산이 그를 구해 준 건 사실이고, 개방의 썩은 부위를 도려내 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뭐랄까…….
사람이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쳐 의원에 실려 왔는데, 팔다리를 하나씩 잘라 내고 ‘이제 다 치료했으니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는 의원을 마주하면 선뜻 좋은 말 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아니, 팔다리만 잘려 나갔으면 다행이지. 사실은 재산도 반쯤은 날아간 판인데……. 생각할수록 골이 지끈거렸다.
“그래서 이제 어쩌실 셈이에요?”
“일단은…… 무너진 총단부터 수습해야겠지요. 그리고…….”
풍영신개가 제 턱을 어루만졌다.
“장로들의 거취가 정리되는 대로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입니다.”
“거취라면?”
“장로들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는 말은 지킬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둘 수만은 없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권력이 너무 컸다는 걸 이번 일로 실감했으니까요.”
“흐음.”
청명이 묘한 눈길로 풍영신개를 보았다. 과연 그게 진짜 의도냐는 듯이. 다 까발리는 듯한 눈빛 앞에, 풍영신개도 별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들이 지금 같은 위치에 있으면 새 방주가 제 뜻을 펼치는 데도 방해가 될 겁니다. 사람은 그리 쉬이 바뀌지 않는 법이니, 제가 망친 이들은 제가 품고 물러나야겠지요.”
“새 술은 새 부대에?”
“그렇습니다.”
청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일순 멈칫했다.
“그럼 다음 방주는 설마…….”
“생각하시는 그 설마입니다.”
화산 제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옆으로 돌아갔다. 거기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정쩡하게 선 홍대광이 있었다.
“왜? 뭐?”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 다양한 감정이 스쳤다.
“아니, 그래. 사실…… 대안이 없긴 한데…….”
“그 난리를 쳐 놓고 이제 와 다른 사람이 방주를 한다고 해도 뭔가 이상하기도 하고.”
“그렇지. 확실히 그건 맞는데, 그…….”
서로를 마주 보는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 딱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괜찮을까?’
아무래도 불안하다. 저 양반이 개방의 방주라니.
“결정한 거예요?”
“예, 검협.”
“……진짜로?”
“…….”
“정말? 진짜로? 후회 한 점 없이? 대책은 있고? 아니, 무슨 생각…….”
“야, 인마! 너 나한테 이러기냐!”
“아니, 내가 아저씨를 아는데! 아저씨가 누굴 부릴 위인은 못 되잖아요!”
“네가 나 방주 시켜 준다며!”
“아니, 상황이 급한데 뭔 말을 못 해!”
“뭐, 인마? 그러고도 네가 도사냐!”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이게 뭔 죽 쒀서 개……. 아니, 죽 쒀서 거지 주는 것도 아니고. 개방 살리려다가 더 망치게 생겼네!”
“내가 널 얼마나 도와줬는데, 인마!”
“그게 돕는 거야? 그게?”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보며 웃어 버린 풍영신개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능력이 어떤지는 중요한 게 아니라 판단했습니다.”
“흐음?”
“모자란 부분이 있다면, 다른 이들이 도우면 됩니다. 이를 위해 직위라는 게 있지요. 중요한 것은 능력이 뛰어난가가 아니라 옳은 길을 걷는 이인가입니다.”
이미 결심을 굳힌 모양으로, 풍영신개의 두 눈이 단호했다.
“그리고 이건 제 뜻만은 아닙니다. 일호신개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습니다. 그럼 장로들의 반발도 웬만큼은 누를 수 있겠지요.”
청명은 떨떠름한 눈으로 홍대광을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면전에 대고 한숨 쉬지 마!”
“거지잖아, 사람 아니고…….”
“이 새끼…….”
발끈했던 홍대광이 콧김을 내뿜었다.
“지금 제일 황당한 건 나란 말이다! 총단에 불려와 잔소리나 실컷 듣겠지 했는데 갑자기 전쟁이 벌어지질 않나, 그거로도 모자라 하루아침에 방주가 되게 생겼는데!”
“그래서 싫어요?”
“개좋지!”
“…….”
“아, 아니. 방금은 말실수고.”
화산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풍영신개까지 영혼 없는 눈으로 그런 홍대광을 바라보았다.
“……재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풍영신개의 얼굴에 순간 갈등의 빛이 스쳤으나, 이내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재고는 없네.”
“에이.”
“텄네.”
“우리라도 개방 손절하자. 여긴 끝났어.”
화산 제자들의 반응을 보며 풍영신개가 쓰게 웃었다.
“너무 걱정할 건 없네. 자오개를 불러 호법 자리에 앉힐 생각이니까.”
“아!”
“자오개 할아버지면 뭐…….”
“그럼 좀 낫겠네.”
자오개라는 말이 나오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은 홍대광 따위는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았다.
“그런데 사숙. 호법이랑 장로가 뭐가 다른 겁니까?”
“배분은 같다고 봐야지. 문파에 따라서는 명칭만 달리 쓰기도 하는데 차이를 굳이 얘기하자면…… 보통 장로는 명예직이다. 하지만 호법은 실질적인 권한이 있는 자리이고. 그렇게 보면 된다.”
“뭔 말입니까?”
“호법은 문파를 지키는 자리라 무력 쪽으로 좀 더 치중되어 있다고 보면 돼.”
“……이해했습니다.”
이해 못 했네.
백천은 나중에 조걸이 저놈을 잡아서 꼭 다시 설명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풍영신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늘 보니 추면개도 호법의 자리에 어울리는 이 같으니, 그에게도 도우라 해야겠지.”
“아, 그 못생긴 거지 할아버지요?”
“야, 이 새끼야! 사람한테 대놓고 못생겼다니!”
“아니, 못생겨서 별호도 추면개인데! 그렇게 따질 거면 사람한테 그딴 별호 붙여 놓은 개방 거지 놈들을 욕해야지!”
“……어?”
듣고 보니 그것도…….
“크흠!”
풍영신개가 헛기침하며 슬며시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백천이 고소를 머금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결과로군.’
능력이야 둘째치더라도, 홍대광의 열정과 협의만큼은 모르는 이가 없다. 게다가 홍대광은 누가 뭐라고 해도 개방 내에서 가장 화산에 우호적인 이다.
그런 이가 개방의 방주가 되는 게 화산에 해가 될 리 없다.
게다가 어쨌든 이번 일을 해결하는 와중에 종남과 소림에도 화산에 우호적인 세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이건 어쩌면 개방의 방주를 교체한 것 이상의 성과일지 모른다.
‘특히나 소림은…….’
그때 청명이 입을 열었다.
“위임은 언제 하실 생각이신데요?”
“일단 총단부터 정리를 해야겠지요.”
“그럼 정리만 끝나면 바로 빠지실 거다?”
“그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풍영신개는 꽤 후련해 보였다. 언제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검협 덕분에 깨달았습니다. 개방의 미래는 그 미래를 살아갈 이들에게 맡겨야겠지요. 물론 미덥지 못하기는 하지만…….”
홍대광을 일별한 풍영신개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 역시 물러날 때가 된 이의 욕심이겠지요.”
“…….”
“제가 개방에 지은 죄는 방주가 아니더라도 갚아 나갈 수 있습니다. 이젠 개방의 방주가 아니라, 개방 소속의 일반 거지로서 남은 평생 속죄할 생각입니다.”
풍영신개의 시선이 전각의 천장 쪽으로 향했다.
그가 바라보는 건 단순한 천장이 아니라, 그 위에 누워 있을 한 사람이다.
“사부님께서도 그걸 바라시겠지요.”
“쯧.”
청명이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막상 속죄해야 할 인간은 홀랑 뒈져 버리고.”
“청명아!”
“입조심! 인마, 입조심!”
남들이 듣기에야 무례하기 이를 데 없을 소리지만, 풍영신개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지금 앞에 있는 이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의 스승을 혼낼 수 있는 사람이므로.
그리고 그 거친 말들도, 안타까운 마음에 뱉은 거란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청명의 시선이 홍대광에게로 향했다.
“어찌 됐건, 이제 이 양반이랑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지?”
“…….”
“개방의 방주…….”
청명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개방을 정상으로 돌리려 시작한 일인데, 어째 결과가 영…….
“끄응. 여하튼 예비 방주.”
“하하하핫! 말씀하시오, 화산검협!”
홍대광이 우쭐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청명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그 턱주가리를 후려쳤다.
“꺄울!”
“야, 청명아!”
“방주다! 방주!”
“아직 아니잖아! 아직은 아니야!”
“그렇다고 이렇게 다짜고짜 패면 어떻게 하냐!”
“패고 싶게 굴잖아!”
“아니, 그건 맞는데……!”
천하의 백천조차 차마 청명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얻어맞은 당사자는 아프지도 않은 듯 흐흐 쪼개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어, 괜찮소.”
“예?”
“따지고 보면 화산이 나를 방주로 만들어 준 거나 마찬가진데, 턱주가리 정도야! 하하핫!”
“처, 청명아! 참으라고!”
“아니,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데!”
“솔직히 빡치긴 해요, 사형.”
“……사실 나도 그래.”
홍대광은 ‘사람을 긁는다’라는 말이 왜 있는지를 실감하게 해 주는 사람이다. 청명이 앓는 소리를 흘리며 물었다.
“끄응, 그래서 이제 어쩌실 생각인데?”
“뭘?”
“개방 말이에요, 개방! 방주가 되시잖아! 이제 개방을 어떻게 할 건데?”
홍대광이 벌겋게 부어오른 턱을 주물거리며 말했다.
“뭘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뻔한 거지.”
“응?”
“화산검협. 알다시피 나는 머리가 별로 좋지 않다.”
“어, 눈치도 없고.”
“능력도 없고.”
“얼굴도 못났어.”
“……적당히 해라, 이 새끼들아.”
홍대광이 얼굴을 이를 악물었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흐음?”
“그중에서 내가 특히 제일 잘하는 건, 내게 길을 알려 줄 사람을 찾는 거지.”
홍대광이 자세를 바르게 잡았다. 지금까지의 껄렁대는 모습이 아닌, 단호하고 의지견정한 표정이 깃들었다.
“화산검협. 아니, 천우맹의 총사 청명.”
“음?”
“내가 방주 자리에 오르는 즉시, 개방의 천우맹 가입을 요청하겠소. 부디 본 방의 뜻을 거절하지 말아 주시오.”
진중함과 협의로 가득한 홍대광의 얼굴을 마주하며 청명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홍대광이 말을 이었다.
“개방의 전력을 다해 천우맹을 돕겠소. 천하에 밀려온 위기에 맞서기 위해!”
“음.”
청명이 천천히 양손을 모아 정중하게 포권 했다.
“방주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희 천우맹 역시 온 진심으로 개방을 환영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말하는 청명의 두 눈이 빛났다.
“그리고 방주께서 천우맹에 바라시는 바를 반드시 이뤄 드릴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할 것입니다.”
“그저 믿을 뿐입니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과거 낙양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는 둘 다 명성도 직위도 없었다.
그랬던 두 사람이 지금 이곳에서 한 문파와 한 연맹을 대표하는 이들이 되어 손을 맞잡고 있다.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이 천천히 손을 뗐다.
어쩐지 감동한 얼굴로 그 광경을 보던 풍영신개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크흠.”
청명의 얼굴이 뭔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런데 어…….”
“응?”
“……이게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다.”
“…….”
화산의 제자들은 속마음을 콕 집어서 대신 꺼내 준 듯한 청명의 말에 십분 공감했다. 물론 마음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