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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19화 (1,520/1,567)

1519화. 이건 내 잘못이 아니지 않나? (4)

“그럼 이제 대충 다 끝난 거죠?”

“그런…… 것 같은데?”

“……뭔가 진 빠지네.”

소림까지 빠지고 나니 탈력감이 더 크게 밀려들었다. 상황이 아직 완전히 정리된 건 아니지만, 이젠 적어도 목숨 걸고 싸워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그때 윤종이 뭔가 찜찜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뭔가 빼먹은 듯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사숙?”

“빼먹다니 뭘 말이냐?”

“아니, 그러니까요……. 빼 먹은 게 없는데 이상하게 빼먹은 듯한 느낌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며 곰곰이 생각하던 윤종이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늘 가느다랗던 그의 두 눈이 일순 왕방울만 해졌다.

“어?”

획 뒤를 돌아보는 그를 향해 모두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소, 소협?”

“응?”

“이 소협 어디에 있습니까! 이송백 소협이요!”

“어?”

백천도 순간 눈을 크게 치떴다.

“가, 같이 싸우고 있던 것 아니었느냐?”

“그랬죠! 그…… 총단 무너지기 전까지는 열심히 같이 싸웠죠!”

“그럼 언제 없어진 건데?”

“그야 총단이 무너질…….”

당황한 낯으로 대화하던 화산 제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바닥으로 향했다.

무너진 총단의 잔해. 쑥대밭이란 말로도 모자라는 그 광경을 멍하니 보던 이들이 고개를 들어 서로를 돌아보았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의 얼굴에 훈훈한 미소가 피어났다.

“아이고오오오오! 이 소혀어어어업!”

“파! 파! 빨리 파! 사람 죽는다!”

“……솔직히 이미 죽었다고 보는 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파라고, 이 새끼야! 아이고, 이 소협!”

화산의 제자들이 미쳐 날뛰며 잔해들을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잠시 후.허연 먼지를 홀딱 뒤집어쓴 이송백은 무언가가 빠져나간 듯한 눈으로 멍하니 앞만 보고 있었다.

모두가 차마 그 눈빛을 떳떳하게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이송백의 입이 열렸다.

“……그래도.”

“…….”

“목숨 걸고 같이 싸웠는데.”

“…….”

“그렇게 까맣게 잊어버리나.”

“그, 그게…….”

백천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상하네요……. 분명 같이 있는 느낌이었는데…….”

“마음으로나마 함께했던 게 아닐까요?”

“그, 그렇지? 내적 일체감이 워낙 강했던 걸로…….”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주워섬기는 화산 놈들을 물끄러미 보던 이송백이 티 없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산 놈들 다 뒈졌으면…….’

종남의 뿌리 깊은 화산 혐오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왔는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크흠. 아무튼 그…… 괜찮으신지……?”

“윤종 도장.”

“예?”

“감사합니다.”

먼지를 뒤집어쓰다 못해 허연 귀신처럼 보이는 이송백이 그 와중에도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윤종은 조금 당황하여 물었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감사해야지요. 윤종 도장께서 용케도 저를 떠올려 주지 않으셨으면, 아마 저 밑에서 꼼짝없이 뒈졌을 텐데.”

“…….”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화산 제자들이 숙연하게 고개를 숙이며 서로 필사적으로 곁눈질했다.

‘사람이 처음이랑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까?’

‘사실 그게 보통이지.’

‘좀 많이 꼬였는데요?’

‘너 같으면 안 그러겠냐?’

하지만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이송백의 말대로, 하필 무거운 중앙기둥 아래에 깔려 파묻혔던 그를 그냥 잊고 돌아갔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아마 이송백은 여기에서 원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 아니, 귀생(?)이 끝나는 그 날까지 화산을 저주했겠지.

“애초에…….”

“아! 거, 말 많네! 살았으면 됐지!”

“…….”

“결과적으로 안 죽었으면 된 거 아냐! 하여튼 요즘 것들은 뭔 일만 벌어지면 징징대기 바쁘다니까? 어? 나 때는 싸우다가 팔다리 하나씩 날아가도 그러려니 툭툭 털고 밥 먹으러 갔는데. 쯧쯧.”

그 순간, 청명을 바라보는 이송백의 두 눈에서 무언가가 용솟음쳤다.

“……워워. 진정하십시오, 소협. 그 칼에서 손부터 좀 떼시고.”

“그러게, 저 인간한테 너무 큰 기대 말라고 했잖습니까?”

“아미타불. 솔직히 이건 업보요.”

이송백의 입에서 한숨이 푹 터져 나왔다.

그를 뒤덮은 잔해 위에 서서 감동의 사제 상봉의 현장까지 연출한 것들을 생각하면 당장 칼을 날려도 모자라다.

하지만 뭘 어쩌겠는가? 몰랐다는데.

한숨을 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백천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어쨌든, 소협. 정말 감사합니다.”

“예?”

포권 하는 자세가 예의에 한 치 어긋남 없었다.

“소협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누구도 죽거나 크게 다치지 않고 일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소협이 보여 주신 의기를 화산은 기억할 것입니다.”

이송백이 그런 백천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렇게 대충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마시고.”

“에이, 들켰다.”

“거봐요. 안 통한다니까.”

“이상하다. 보통은 먹히는데.”

이송백이 제 입술을 빠득빠득 깨물었다. 화산 놈들은 죄다 제정신이 아니다. 뼈저리게 실감하게 됐다.

그때 조걸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런데, 이 소협!”

“예?”

“그거 진짭니까?”

“뭐가 말입니까?”

“듣자 하니 우리 사숙의 형님이 종남의 장문인이 되실 거라던데?”

“……그냥 진금룡이라고 해라, 걸아.”

“에이. 그래도 존경하는 사숙의 형님인데요. 제가 예의는 좀 알잖습니까?”

“그냥 진금룡이라고 해라. 뒈지기 싫으면.”

“……넵.”

이송백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대사형이 말입니까? 그런 소문이 돈다고요?”

“네! 저 분명 들었는데.”

이송백이 순간 정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대사형은 이대제자일진대, 이대제자가 무슨 장문이 된다는 말입니까. 엄연히 배분과 법도가 있거늘!”

푸욱.

화산 제자들의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혔다.

“장문인께서 자리에서 물러나신다 한들, 일대제자 중에서 차기 장문이 나올 것입니다. 양식 있는 문파라면 당연한 것 아닙니까?”

푸욱.

다시 한번 비수가 꽂혔다.

“……우린 배분도 법도도 양식도 없을 뻔했구나.”

“사실 따져 보면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긴 하잖아요.”

“그러니까.”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우울로 물들었다. 저 말에 악의가 없다는 게 더 서글프다.

“아무튼, 뭐.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예?”

“우린 마저 정리해야 해서 내일 출발할 예정인데. 너는?”

청명의 말에 이송백이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방주와 일호신개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확실히 저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더 있을 것이다.다만 그는…….

“제가 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음?”

“읏차.”

이송백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복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고는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

“사형제들이 걱정하고 있을 테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 가신다고요?”

“예. 아니면 제가 더 해야 할 일이라도?”

“그런 건 아닙니다만…….”

이송백이 거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데, 청명이 불쑥 말했다.

“애초에 종남이 여기에 온 건 개방과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했던 거 아닌가?”

이송백이 청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그 목적은 개방이 제공해 주는 정보겠지. 너도 바보는 아닐 테니, 네가 여기에 엉덩이 붙이고 있으면 방주가 어쩔 수 없이 네가 한 일에 대해 대가를 지불해 주리라는 것쯤은 알 텐데?”

그 말에 이송백은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응?”

“제가 장문인께 받은 명령은, 개방의 총단에 종남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리며 인사를 드리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

“장문인께서 그 이상 무엇을 원하셨는지는 감히 제가 짐작할 바가 아니지요. 저는 그저 장문인의 명에 충실히 따를 뿐입니다.”

“……우릴 도와 놓고?”

이송백이 작게 미소 지었다.

“여러분들을 도운 건 검수로서의 저입니다. 하지만 종남의 제자로서의 제게 중요한 건 그저 장문인의 뜻에 따르고 그를 정확히 이행하는 것입니다.”

“하…….”

“그러니 저야 적당히 돌아가 있다가 개방이 정리되면 새로운 방주께 인사를 드리면 될 일이지요. 방주를 아예 못 만나고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

“다만 그렇기에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뭘?”

“제가 여러분을 도왔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쳐 주십시오.”

“…….”

“그게, 꼭 드러나서 좋을 게 없는 일이라…….”

말을 하는 내내 이송백은 백천을 힐끔거렸다. 아마도 백천의 얼굴에서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이리라.

모두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이송백이 안심했다는 듯 몸을 돌렸다.

“아차.”

하지만 곧 뭔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려 모두에게 말했다.

“저희 일행은 진영 객잔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혹여나 제가 또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그곳에서 절 찾으시면 됩니다. 대신!”

이송백이 검지를 제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금 익살스럽게 웃었다.

“사형제들에게는 들키지 않게 부탁드립니다.”

“…….”

“그럼, 화산검협.”

“응?”

“함께 싸워서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뵙지요.”

이송백이 환하게 웃고는 몸을 돌렸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이 탄식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자기가 여기서 한 일을 비밀로 해 달라는 거네.”

“……이거 밖으로 퍼지면 진짜 명성이 어마어마해질 만한 일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도 비밀로 한다는 건…….”

“명성을 얻어서 생길 좋은 일에 대한 기대보다 귀신에게 잡혀가는 거에 대한 공포가 더 큰 게 아닐까?”

“……그럴지도.”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사실 화산의 제자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행한 일을 스스로 내세우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렵고도 대단한 일인지.

그런데 이송백은 정말이지 찰나의 미련조차 보이지 않고, 깔끔하게 떠나 버린 것이다.

“참…….”

늘 생각해 왔던 협의지사의 모습이다. 그걸 다른 이도 아닌 종남의 검수에게서 발견했으니 화산 제자들의 마음은 어째 복잡하고 묘했다.

“뭔가 간질간질하네요, 사형.”

“너도 그러냐?”

“종남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뭐 안 될 건 없지.”

“예?”

“사숙도 종남 출신이었지만 결국 화산으로 넘어왔는데, 저 양반도 어떻게 잘 꼬시면…….”

“득치르그…….”

“사숙, 그러다 이 상합니다. 어금니 부러지시겠네.”

묘한 감흥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오랜 침묵이 지나고, 백천이 길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협의가 세상에 넘쳐난다면 굳이 협의를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

“……예.”

“언제 어떻게든 협의가 이어지는 건…… 바라는 것 없이 스스로 그 길을 지키는 이가 세상 곳곳에 있기 때문일 거다.”

백천의 두 눈에 반성의 빛이 담겼다.

한순간이었지만, 중원의 협의를 그들만이 수호하고 있다는 거만함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하지만 오늘 소림의 무승들과 이송백이 보여 준 모습은 그런 백천을 더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런 세상이지만…… 여전히 협의를 실천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도 지지 말아야지.”

“네.”

“예! 사숙!”

화산의 제자들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르디푸르렀던 하늘의 한편이 서서히 따뜻한 노을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 * *

두 시진 후, 천상루.풍영신개가 피곤에 푹 절은 얼굴로 털썩 앉았다. 그의 앞에는 화산의 제자들이 서 있었다. 어느새 말끔히 씻은 모습이었다.풍영신개가 반쯤 쉰 목소리로 입을 뗐다.

“총단은…… 무너졌고.”

“…….”

“개방 장로 중에는 부상자가 넘쳐나고…….”

“…….”

“개방제일고수인 일호신개는 무공을 제압당한 채 투옥되었고. 아마 복권이 될 일은 없을 테니 영구적인 전력의 손실로 봐야 할 것이고.”

“…….”

“일대제자들은 여전히 해명을 요구하고 있고. 총단이 무너지며 수많은 서류와 기물이 유실됐고. 전서구들이 죄 몰살당해서 체계 자체가 마비되는 바람에 개판이 났고!”

말을 할수록 분통이 터지는지 풍영신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엇보다 전표! 전표! 총단에 쌓여 있던 막대한 전표들이 아주 갈기갈기 찢겨 날아가서 개방의 온 거지들이 잠도 못 자고 개봉의 종이 쪼가리란 종이 쪼가리는 다 줍고 다니고 있지만!”

특히 책임자인 백천은 등까지 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개방 총단에 잔뜩 쌓여 있던 전표라면 그 액수가 대체 얼마쯤…….

“여하튼…….”

움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린 화산 제자들을 향해 풍영신개가 영혼 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화.산.분.들.”

……그 양반 거, 뒤끝이 좀…… 심하시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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