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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18화 (1,519/1,567)

1518화. 이건 내 잘못이 아니지 않나? (3)

“왜 저렇게 웃으시는 겁니까?”

“……글쎄. 난들 알겠느냐?”

화산의 제자들은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있는 일호신개를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모든 걸 잃게 된 상황인데 저리 껄껄 웃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아무래도 살짝 맛이 간 게 아닐까요?”

“맛이 간 건 네 조동아리 같다만?”

“…….”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일순 탈력감이 훅 밀려들었다. 정말 이 모든 상황이 끝났다는 걸 선언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조걸이 제일 먼저 기지개를 켰다.

“아우, 죽는 줄 알았네.”

“그러니까.”

“사실 따져 보면 그렇게까지 위험했던 것도 아닌데.”

화산의 제자들이 하나둘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위험하긴 했지.”

“에이, 그래도 북해나, 항주, 저 망할 해남행에 비할 바는 아니었잖아요? 안 그래요, 사고?”

“생각하기 싫어.”

백천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확실히…….’

분명 이번 일은 그리 험하지 않았다. 상황 자체야 위험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백천 말고는 눈에 띄게 부상 입은 이도 딱히 없지 않은가? 다들 너덜너덜해졌던 과거의 위기와는 비할 바 아니다.

그럼에도 몸이 천근처럼 무겁고 힘겹게 느껴졌던 건, 아마 같은 정파와 싸운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백천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윤종이 돌연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사숙.”

“응?”

“……개방에서 저희한테 책임을 물어오는 건 아니겠죠?”

……백천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래로 향했다. 그들은 무너진 총단의 잔해 위에 있었다. 백천은 어색하게 미소 짓더니 말했다.

“토낄까?”

“……정신 좀 차리십쇼, 사숙.”

“이 양반 한 번씩 보면 걸이보다 더해.”

“그건 욕이 너무 심하잖으냐.”

온몸에 차 있던 긴장감을 흐트러뜨리듯 한마디씩 너스레를 떠는데, 한 사람이 조용히 다가왔다.

“아미타불.”

불호 외는 소리에 모두가 벌떡 일어났다. 혜방이었다.

다들 급히 포권을 하니 혜방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만류했다.

“너무 그리 딱딱할 필요까지야 없겠지요. 서로간에 상황이 묘하다고는 하나, 어쨌든 지금은 뜻을 같이하는 사이가 아닙니까?”

백천은 잠시 우물쭈물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소림 사람들을 어찌 대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상황을 당연하게 무시하는 인간도 있다.

“거, 빨리빨리 좀 오지!”

“야, 이 새끼야!”

“입 좀 다물어!”

사방에서 입을 틀어막는 일갈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청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혜방을 향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숭산에서 여기까지 뭐 몇 발짝이나 된다고! 그쪽만 일찍 왔으면 총단이 무너질 일도 없었을 것 아니에요!”

혜방이 조금 당황한 낯으로 진땀을 흘렸다. 그 덕에 반질반질한 머리가 한층 반짝였다.

“아, 아미타불. 늦어서 죄송하외다, 화산검협.”

“알면 다음부터는 좀 빨리 다니세요. 으휴, 신법은 뒀다가 국 끓여 먹나.”

“……제발 좀 닥쳐.”

화산의 제자들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제 얼굴을 감쌌다. 기사멸조의 표본을 눈앞에서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배은망덕의 표본을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청명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땀까지 뻘뻘 흘리며 사과하는 혜방을 보고 있자니…….

“우리가 나쁜 놈이네.”

“누가 봐도 그렇죠?”

“이쯤 되면 소림에 사과해야 한다.”

어쩐지 숙연해지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혜연아.”

그때 혜방이 주위를 훑어보며 혜연을 찾았다. 혜연은 화들짝 놀라며 움찔했다.

“이리 오거라.”

혜방의 부름에, 혜연은 큰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쭈뼛쭈뼛 다가왔다. 아까 혜방을 봤을 때는 기쁨과 반가움이 앞섰지만, 막상 상황이 끝나고 마주하려니 두려움이 머리를 드는 모양이었다.뒤에서 지켜보던 화산의 제자들이 수군거렸다.

“스님 엄청 낯 가리시네. 어울리지 않게.”

“생각해 보면 원래 그랬어. 비무대에서도 얼굴 빨개지고 그런 분이셨잖아.”

“……아. 너무 오래돼서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었죠.”

혜연이 많이도 변했다는 사실 역시 어쩐지 화산의 제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주춤대며 다가온 혜연을 보며 혜방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고생 많았구나.”

“사, 사형…….”

“애썼다.”

혜방이 혜연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이내 혜연의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화산의 제자들도 몰래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우느냐?”

“우, 울긴요, 사형. 전 이제 애가 아닙니다.”

“안 그런 것 같은데.”

“놀리지 마십시오…….”

혜연의 얼굴이 삽시간에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사파나 마교들에게는 두렵기 짝이 없는 소림의 신승도 제 사형 앞에서는 아직 어린 청년에 불과하다는 게 새삼 실감 나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정말 오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네가 부르지 않았더냐?”

“그렇기는 한데…….”

뜬금없는 대화에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갸우뚱했다.

혜연이 불렀다고?

때마침 혜방이 말을 이으며 그들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아무리 개방의 방주와 화음분타주의 요청이 있었다 해도, 설령 화산과 화산검협의 요청이 있었다 해도…….”

홍대광과 청명이 입맛을 다시며 혜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설령 법도에 어긋나는 부분이 없다고 해도, 방장의 명 없이 타문의 일에 개입하기가 쉽진 않다. 그건 알겠지?”

“……예.”

너무 당연한 말이다. 결정을 내린다는 건 책임을 진다는 말과 같으니까. 누가 감히 이렇게 큰일을 책임질 수 있겠는가?

“망설이던 우리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건, 화음분타주가 내어놓은 네 서찰이었단다.”

“사형…….”

화산 제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획 돌려 청명을 보았다. 이게 뭔 소린지 해명하라는 듯이. 청명은 아무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당당하게 배를 쭉 내밀었다.

“왜? 가족 친지의 정을 이용해 마음을 돌리게끔 하는건 당연한 전략 아냐? 소림에 요청하는 데 같은 대머리를 안 써먹는 놈이 이상한 거지.”

“저…… 사갈 같은 새끼…….”

“쟤는 아무리 봐도 사파로 갔어야 해.”

청명이 직접 혜연에게 소림의 구원을 요청하는 서찰을 쓰게 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청명이 혜연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는…….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야! 봐 봐! 감동의 사형제 해후상봉이 이뤄졌잖아? 다 내 덕이라 할 수 있지! 에헴.”

“…….”

더는 할 말도 없어져 버린 화산의 제자들이 고래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도 정말 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와야지.”

혜방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혜연과 혜방을 향해 다른 소림승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모두 오랜만에 만난 혜연을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귀여운 사제가 부르는데, 사형 된 입장으로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느냐?”

“사, 사형!”

“농담이다.”

혜방이 나직이 웃었다. 어려서부터 혜연은 놀리는 맛이 있는 아이였다. 그 재능이 너무 뛰어나 함부로 어울리기가 힘들었을 뿐.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네가 우리의 아끼는 사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

“모두가 바르지 못한 길을 걷고 있을 때, 너만이 홀로 옳은 길을 걷는 이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여기에 있는 이들은 그리 생각한단다.”

혜연이 울컥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혜방이 조금 안쓰러운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힘겨웠겠지.”

“……사형.”

“방장과 대립하고서야 비로소 네가 얼마나 힘겨웠을지 이해했단다. 어버이처럼 믿고 따르던 이의 뜻에 반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혜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화산의 제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그만의 고충을, 지금 그의 사형이 이해하며 어루만져 주고 있다.

“그런 네가 우리를 믿고 청했기에 망설임 없이 올 수 있었던 거란다.”

“하지만 방장께서는…….”

혜방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물론 방장께서는 이 일을 용납하지 않으시겠지. 월권이라 하실 것이고, 내게 죄를 물으려 드실 것이다.”

혜연은 어깨를 푹 숙이며 다시 한번 떨었다. 그 순간 혜방의 얼굴에 익살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그래도 뭐…… 죽이기야 하시겠느냐?”

“예?”

혜연이 얼빠진 듯 되묻자 혜방이 어깨를 으쓱했다.

“기껏해야 참회동에 몇 년 가둬 두는 정도 아니겠느냐? 혹시 모르지. 내 생에 달마동에서 면벽을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지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쩌면 조사처럼 큰 깨달음에 드는 기적도 벌어질지 모르고.”

“아미타불. 그건 너무 과한 바람입니다, 사형.”

“그만한 그릇부터 되셔야…….”

“이 땡중 놈들이!”

등 뒤에서 점잖게 들려오는 딴죽에 혜방이 역정을 냈다. 근엄해 보이기만 하던 소림승들이 조용히 웃었다.

“……사형들.”

혜연의 두 눈이 금세 눈물로 그렁그렁해졌다.

시킨 대로 서찰을 쓰긴 했다. 그 안에 하고자 했던 말도 충분히 담았다. 하지만 보내면서도 정말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형들은 그의 서찰을 받고 숭산에서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준 것이다.

그때 혜방이 미소를 거두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스님.”

“……예?”

사뭇 엄숙해진 목소리였다.

“우리가 따라야 할 건 사바세계의 권위가 아닙니다. 불자에게 중요한 일이란 스스로 불도를 제대로 걷고 있는지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 고해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불도라는 가시밭길을 나아갈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

“우리의 선택을 단순히 사형제지간의 의리로만 바라본다면, 그건 스님께서 우리를 너무 쉬이 보시는 것이외다. 우리는 혜연이라는 사제를 위해서가 아닌, 옳은 길을 걷는 한 사람의 승려를 돕고자 온 것입니다.”

혜연이 말없이 혜방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해한 모양으로 경건하게 반장을 취했다.

“아미타불.”

흘러나온 불호를 들은 혜방이 슬쩍 미소 지었다. 그러다 다시 얼굴을 굳히며 진지하게 마주 반장을 취했다.

“아미타불.”

혜연과 소림의 승려들이 서로 예를 표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제 한쪽 팔을 잘라 내었다는 이조 혜가를 기리는 반장. 그 반장이 지금 그 의도에 실로 걸맞게 서로에게 전해지고 있다.

화산의 제자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네.”

“그러게요, 사형.”

진지하게 바라보던 윤종도, 소림을 헐뜯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조걸도 지금 이 모습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저 모습이 천하가 그토록 경외하던 소림의 본모습일지 모른다. 절로 경건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럼 이제…….”

“그래, 돌아가야지.”

혜방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곳의 소식이 곧 장강으로 전해질 테니, 방장께서 당연히 대로하실 게 아니냐. 이제는 그 뒷감당을 해야 할 때란다.”

혜연의 얼굴이 다시 울먹울먹 일그러지자 혜방이 돌연 그의 머리를 찰싹 때렸다.

“악!”

당황한 혜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또 그런 얼굴을 하는구나, 이 건방진 놈.”

“…….”

“싸우고 있는 건 너뿐만이 아니다. 너는 소림을 벗어나 불도를 추구하는 방법을 찾았지만, 우리는 소림 안에서 소림과 싸울 것이다.”

혜방이 혜연과 그 뒤에 선 청명을 보았다. 단호한 의지가 어린 눈빛이었다.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소림을 소림이 있어야 할 제자리로 돌릴 것이다. 그게 우리의 사명일지니.”

청명과 혜방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이윽고, 청명의 입가에 보기 드문 미소가 씨익 피어났다. 더없이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가.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예? 버, 벌써?”

혜연은 물론이고, 백천마저 당황했다.

아직 무너진 잔해의 먼지구름도 덜 가라앉았는데 벌써 어딜 간다는 말인가? 그러나 혜방은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이곳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끝냈으니 돌아가는 것이 순리겠지요. 남은 건 장문대리께 맡기겠습니다.”

“아, 아니, 그래도…… 적어도 방주께서 감사의 인사 할 시간은 주셔야…….”

“감사를 받고자 한 일이 아니니 그럴 일도 없습니다.”

“예? 그, 그런…….”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아미타불.”

“워, 원시천존. 강녕하십시오.”

고개를 숙여 반장 한 혜방과 소림승들은 미련 한 점 남기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정말 뒤 한 번 돌아보는 일도 없이 멀어져 갔다.

흩날리며 멀어지는 황포 자락을 멍하니 보던 화산의 제자들이 탄성을 흘렸다.

“……정말 깔끔하네.”

“청명이 놈이었으면 나를 대접하라고 날뛰면서, 자기가 얼마나 큰마음 먹고 도와줬는지 사흘 밤낮 노래를 불렀을 텐데.”

“멋있다.”

“나도 소림에 입문할걸.”

“진짜?”

“……사실 대머리는 좀.”

모두 감탄 반, 동경 반으로 술렁이는 사이, 백천이 혜연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스님.”

“……괜찮습니다, 도장. 아쉽지 않습니다.”

멀어지는 사형제들을 응시하는 혜연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언제고 다시 뵐 테니까요.”

어쩐지 이번 일로 혜연이 한층 더 커진 듯했다. 백천이 가만히 웃으며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럴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혜연 역시 지금보다 더 훌륭한 승려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백천은 반드시 그러리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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