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화. 이건 내 잘못이 아니지 않나? (2)
“보이느냐?”
“네?”
“저곳이 바로 개방의 총단이다.”
“아!”
작은 소동(小童)이 눈을 빛냈다. 드높은 전각이 보인다. 세월의 때가 고스란히 묻은 건물에선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개방의 역사가 저 총단에 고스란히 담겨 있지. 개방의 역사나 다름없는 곳이란다.”
“저기가…….”
“그래. 이제부터 네가 빛내야 할 곳이란다. 그럴 수 있겠느냐?”
“예, 사부님!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허허허허허.”
웃음소리가 메아리치고, 총단을 바라보는 소동의 두 눈이 투명하도록 맑게 반짝였다…….
* * *
“…….”
누더기를 걸친 노인은 황망한 얼굴로 깔끔(?)해지다 못해 탁 트여 버린 공간을 응시했다. 이렇게 다 늙어 머리가 희게 세기 전, 어렸던 그 시절 스승의 손을 꼭 잡고 보았던 낡은 전각이 이젠 온데간데없다.
“초, 총단이…….”
스승과 그의 소중한 추억이 어린……. 아니,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개방도로서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총단은 이제 풀풀 날리는 먼지구름으로만 자신이 그곳에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끄륵…….”
“자, 장로님!”
“끄르르르륵!”
“히익! 장로님! 괜찮으십니까? 의원! 의원을 불러라! 여기 숨넘어가신다!”
“사, 사부…….”
“아이고, 장로님! 정신 좀 차려 보십쇼!”
장로뿐만이 아니라 모든 거지가 망연자실했다. 실로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이게 뭔…….”
“그러게.”
총단이 사라지고 드러난 게 구름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이라 더 황당하고 어처구니없었다.
휘이이잉.
잠시 후, 폭삭 내려앉은 잔해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모든 분쟁이 끝난 곳에는 평화와 고요가 찾아온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무너진 총단은 더없이 깊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퍼억!
그런데 그 순간, 엉망진창으로 이리저리 쌓인 잔해 사이로 하나의 손이 불쑥 솟아올랐다.
턱! 턱!달달 떨리는 손이 좌우를 격하게 더듬더니 이내 잔해 무더기를 콱 움켜쥐었다.
“끄으으으…….”
가까스로 머리를 밀어 올린 조걸이 다 죽어가는 얼굴로 엉금엉금 기어 잔해더미에서 빠져나왔다.
“와, 씨! 지, 진짜 뒈지는…….”
“빨리 나가, 이 새끼야!”
“찌, 찌르지 마십쇼! 그거 좀 늦다고 칼을 찌르나!”
“아, 닥치고 빨리 비키라고!”
“……소소야. 내가 사형이야.”
이제는 화산의 얼을 잇는 게 아니라 선도하고 있구나……. 무서운 아이 같으니.
이내 약속이라도 한 듯, 잔해 사이로 화산의 제자들이 끙끙거리며 기어 나왔다. 먼지투성이가 된 소림승들과 개방의 장로들도 앓는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끄으으…….”
“이번에는 진짜 죽는 줄…….”
“아미타불……. 저, 정토를 잠시 보았습니다.”
“히익, 총단이…….”
생매장의 위기에서 어렵사리 벗어난 이들은 아연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일부러 무너뜨려도 이렇게 깔끔하게 무너지지는 못할 것이다.
“어, 어찌 이런 일이…….”
“서, 선조들을 어찌 뵈어야 한단 말인가.”
개방 장로들은 꿀 따러 나갔다 돌아왔더니 집이 없어져 버린 벌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화산의 제자들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눈빛을 교환했다.
“뭔가 공감 가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쪽은 우리보단 낫잖느냐. 우리는 불탔는데, 여긴 기둥 조각이라도 남았으니까.”
“아니, 그래도 저희는 전각 몇 채야 건졌잖습니까? 여긴 진짜 남은 게 없는 모양인데요.”
“……그런데 청명이는 어디 갔냐?”
“예? 그러고 보니……. 아아악!”
돌연 조걸이 엉덩이를 부여잡고 옆으로 펄쩍 튀어 올랐다. 조걸이 조금 전에 있던 자리에 검이 한 자루 삐쭉 솟아 있었다.
검이 좌우로 마구 허공을 휘저었다. 잠시 후, 넓혀진 공간으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청명이 기어 올라왔다. 짜증이 한껏 난 모양으로,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오, 씨! 왜 위를 처막고 있어! 콱 뒈지려고!”
“……그렇다고 칼질을 하냐.”
“냅둬라. 그래도 살살 찔렀잖아. 청명이가 저 정도면 생각 많이 해 준 거지.”
“그거 길들여진 겁니다, 사숙.”
“……적응했다고 하자.”
오만상을 쓰며 올라온 청명이 먼지를 퍽퍽 털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흐음.”
일그러졌던 표정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짜증 대신 어색한 표정이 어렸다.
“흐으으으음. 근데, 어…… 있잖아?”
“응?”
흡사 죄를 짓고 눈치를 보는 강아지 같은 얼굴이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지 않나?”
정적이 흘렀다. 화산 제자들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방주님.”
“…….”
“……방주님, 이제 정신을 좀 차리셔야…….”
“…….”
희게 질려 있던 풍영신개가 마침내 끼긱끼긱 고개를 돌려 백천을 보았다. 백천은 다소 머쓱하게 헛기침했다.
“충격이야 크시겠지만, 이제 마음을 다잡으셔야 합니다. 고작해야 전각 아닙니까?”
“서류…….”
“예?”
“……수백 년 동안 쌓인 개방의 서류와 각 문의 정보들을 모아 둔 장서각……. 개방의 모든 정보가…….”
“아…….”
저기 있겠네. 저어어 밑에. 갈기갈기 찢기거나 뭉개져서.
풍영신개의 영혼이 몸에서 이탈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는 듯했다.
“주, 죽어야 한다. 죽어서 이 죄를…….”
“그, 그러지 마십시오, 방주님!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장문대리…….”
“사람 하나 죽는다고 해결될 만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
순간 백천을 보는 풍영신개의 얼굴에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하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 딴에야 위로한답시고 건넨 말이겠지만, 풍영신개의 귀에는 ‘네까짓 놈의 목숨 하나로 갚을 수 있는 죄가 아니다.’로 들릴 만하지 않은가?
“……고맙네.”
이번 일만 어떻게든 마무리되면, 방주직을 내려놓든 아니든 화산에 관련된 모든 정보와 평가를 모조리 다 수정할 것이다.
풍영신개가 굳게 결심하며 고개를 돌렸다.
“거참.”
우스운 일이다.
타협이 얼추 끝났다고는 하지만, 조금 전까지 서로 치열하게 치고받던 이들끼리 상황을 갈무리하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 골치 아픈 일이 전각이 무너지며 한 번에 해결되어 버린 것이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상황이 참으로 공교롭지 않은가?
풍영신개가 입맛을 다셨다.
과거의 그였다면 총단이 무너진 순간 한 달가량 식음을 전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을 겪고 나니 깔끔하게 무너져 버린 게 차라리 속 시원하기도 했다.
“방주.”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일호신개의 모습이 보였다.
“사형.”
“장로들은 일단 제압해 구금했소이다. 구금처가 마땅치 않아 고생하긴 했지만.”
“그러실 필요까지는…….”
“아니.”
일호신개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할 거면 확실히 하는 게 좋을 것이외다. 방주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지만, 저들 역시 완전히 뜻을 굽힌 건 아닐 터. 적어도 새로운 방주를 선출하고 권한을 위임하기 전까지는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해야겠지요.”
그 말을 하는 일호신개의 입가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들의 불만에 불을 지피고, 준동하게끔 선동한 사람이 바로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일이 끝나면 적어도 나는 장로의 위에서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사형, 그건 아닙니다.”
“아니요.”
일호신개는 이번에도 고개를 내저었다.
“죄를 청하기 위함이 아닌, 제가 다시 허튼 마음을 먹지 않게 하기 위해서외다.”
“……사형.”
“처음부터 이렇게 서로 뜻을 나누었다면, 이리되지는 않았을 텐데.”
밀려드는 씁쓸함에 풍영신개도 고개를 숙였다.스승의 뜻을 따른 것이지만, 결국 개방 내의 거지들과 거리를 둔 건 다름 아닌 풍영신개의 그 자신이었다.그는 ‘개방’
을 이끈다고 여겼지만, 결국 개방 내에서 살아가는 거지들을 그저 개방에 복속된 존재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토록 그들을 위한 길이라 속으로 되뇌고 다짐했으면서도 말이다.
“참 못났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거지 아니겠습니까.”
일호신개와 풍영신개가 동시에 옅은 웃음을 흘렸다. 손에 쥔 것을 내려놓으니 모든 긴장이 탁 풀리며 세상이 푸르러 보인다. 손에 든 것이 있다면 거지가 아니고, 손에 무언가를 쥔 이는 결코 개방을 이끌 수 없다.
그 당연하고도 뻔한 사실을 이 나이가 되고야 새삼 깨달았다.
“한데…….”
“예, 사형.”
“어쩔 생각이십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차기 말입니다. 후개……. 아니, 후개를 거칠 시간도 없겠군요. 다음 방주를 누구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게…….”
풍영신개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그는 입을 몇 차례 벙긋거리다 이내 한쪽을 흘끗 보았다.
“야, 화산신룡! 이거 총단 어쩔 거냐고!”
“이 아저씨가 아까부터 진짜 정신이 나갔나? 그걸 왜 나한테 그래요!”
“네놈이 천방지축 날뛰어서 이리된 거 아니냐!”
“어이가 없네? 부숴도 소림 새끼들이 부쉈지. 내가 칼질 몇 번 했다고 그거 뭐 자국이나 남나? 아니, 그리고…… 갑자기 왜 기가 살았어요? 팔다리 잘리기 전에 즐기기로 했어요?”
“하핫!”
그 말을 들은 홍대광이 위풍당당하게 옆구리에 손을 떡 올렸다.
“상황 파악이 늦구나, 화산검협. 방주께서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을 불문에 부친다고 하지 않으셨느냐!”
“엥?”
“당연히 내가 한 말도 없던 말이 되는 거지! 이게 면책이다, 이 말이야! 면책! 모르냐?”
“……진짜 정신이 나갔나, 이 아저씨? 나오다가 머리 깔렸어요?”
왁자지껄 떠드는 그쪽을 물끄러미 보던 풍영신개가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푸욱 쉬었다.
“사형…….”
“……말하시지요.”
“솔직히 사형이 왜 그랬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그렇지요?”
저런 인간에게 방주 자리를 물려주느니 차라리 일호신개가 하는 게…….
‘못 미덥다’
를 빚어 만든 것 같은 홍대광의 모습에 두 늙은 거지의 한숨이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풍영신개가 쓴웃음을 흘렸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믿어야 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더군요.”
“그렇지요.”
두 사람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홍대광은 청명에게 연신 걷어차이고 있었다.
“어쩌면 저놈 역시 우리가 몰랐던 것뿐일지 모릅니다. 믿을 마음이 없었으니 믿지 못했던 것이겠지요.”
일호신개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대광의 당당한 외침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았다. 일호신개와도, 풍영신개와도 다른 홍대광만의 개방이 그 외침 안에 녹아 있었다.
“……즉위식을 준비해야겠군. 총단도 무너졌는데. 끄응.”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일호신개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풍영을 돌아본다.
“아, 그런데 방주.”
“예. 사형.”
“신물은 대체 어디 두었습니까? 그렇게나 오래도록 찾아도 찾을 수가 없던데. 내가 그것만 있었어도……. 아니, 아니지. 여하튼.”
“신물 말입니까?”
풍영신개가 고소를 머금더니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어디 보자……. 그게…….”
그러더니 이윽고 뭔가 찾아낸 모양으로 어느 한쪽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일호신개를 데리고 잔해 위를 한참 걸어간 풍영신개가 어느 순간 우뚝 멈춰 섰다.
“……방주?”
“흡!”
그가 손을 뻗어 파묻힌 무언가를 단번에 끄집어 올렸다.
쿠웅!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물건을 본 일호신개가 눈을 부릅떴다.
“이건……?”
그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물건이다. 이건 바로 방주의 집무실에 놓여 있던 책상이니까.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흔적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걸 왜 갑자기 꺼낸단 말입니까?”
“흐음……. 망가졌군요.”
풍영신개는 대답 대신 살짝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한 손에 장력을 돋워 책상을 내리쳤다.
퍼석!
오래된 나무 책상이 일격에 박살 났다. 그러자 놀랍게도 옥빛 광채가 갑자기 퍼져 나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일호신개가 황급히 두 눈을 떴다.
쩍 갈라진 책상의 한쪽 다리 안, 옥빛을 내뿜는 기다란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허……. 허허.”
잠깐 넋을 놓고 있던 일호신개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후두둑.
으스러진 나무 잔해가 떨어져 내리며 이내 완전한 모습이 드러났다. 성인의 팔뚝만 한 길이로, 울퉁불퉁 제멋대로 깎여 있는 몽둥이. 딱 동네 놈팡이가 훔친 개를 때려잡을 때 쓸 것처럼 생긴, 하찮아 보이는 그것.
“타구……봉(打狗棒).”
개를 때리는 몽둥이.
정식 명칭은 녹옥장(綠玉杖)이지만 세상 모두가 타구봉이라 부른다. 거지 주제에 인장 따위가 가당키나 하냐는 선대의 뜻으로, 그 끝에 자연히 생긴 문양으로 방주의 인장을 대신하는 개방의 신물.
“허, 허허…….”
그 타구봉이 바로 일호신개가 항상 앉아 있던 그 책상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등하불명. 그래……. 등하불명이로구나. 물건도, 사람도, 모두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거지. 나는 밝은 곳만 보려 했으니까. 하하하, 그래. 그랬구나! 하하하하하핫!”
일호신개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무너진 총단 잔해 위로 맑게 울려 퍼졌다.
“아미타불.”
그리고 그 위로 한 점 티 없는 불호가 어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