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5화.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네. (4)
콰아아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일호신개가 처참히 나뒹굴었다.
“우웨에에엑!”
전신에 검상을 새긴 그가 입을 열기 무섭게 죽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힘겹게 부여잡은 일호신개가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마주한 광경에, 그는 일순 제 상태마저 잊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푸른 하늘.
웅장하던 대전의 천장과 바깥으로부터 내부를 가려 주던 벽이 이젠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한없이 푸른 하늘만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다.
“초, 총단이…….”
말 그대로 반파되어 버렸다. 아연실색한 일호신개는 말도 채 잇지 못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이 낡아빠진 전각 안에서 이만한 이들이 싸웠으니 그 충격을 버텨 낼 리 없었다. 오히려 진즉에 무너졌어야 할 게 지금까지 용케 버텼다고 말해야 옳다.
그래, 마치…….
저벅.
그때 청명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장내의 전투는 어느새 끝나 있었다. 청명의 일검이 전각의 상층을 무너뜨리는 순간, 모두의 시선은 그에게 달라붙기라도 한 듯 떨어질 줄을 몰랐다.
“화, 화산검협……. 쿨럭!”
일호신개의 입에서 피 섞인 기침이 터져 나왔다.
도리가 없다.
그가 전력을 다해 익힌 옥현귀진신공도, 개방의 방주만이 익힐 수 있었던 비전인 추의십팔장도 저 괴물 같은 놈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개방제일고수인 그가 아직 이립에도 이르지 못한 어린놈에게 변명의 여지 없이 패해 버린 것이다.
저벅.
일호신개를 압박하듯 한 발짝 더 다가온 청명이 느릿하게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턱을 들어 뚫린 천장, 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응시했다.
“흠.”
뭔가 감흥이 이는 듯이 잠시간 하늘을 보던 청명이 담담하게 말했다.
“시원하네.”
“…….”
“바람도 불고 말이야. 안 그래?”
뜬금없는 말이었다. 멍하니 청명을 보던 일호신개가 제 가슴을 움켜잡으며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이미 승부는 났다. 그로서는 도저히 저 검귀를 상대할 수 없었다.
아니, 설령 그가 청명을 상대할 수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저 소림이 그의 예상을 뚫고 이곳에 나타나 저들의 편을 든 순간, 승부는 이미 결정 나 있었다.
안다. 이 이상 발악하는 건 의미도 없는 희생을 늘릴 뿐이다.
그럼에도 일호신개는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쿨럭쿨럭 피 섞인 기침을 토한 일호신개가 청명을 흉흉하게 노려보았다.
“나는 인정할 수 없다. 나는 무흔 놈의 치세를 절대 인정할 수 없다!”
“…….”
“개방은 썩어들어 가고 있다! 이대로는 개방이 개방이 아니게 될 것이다! 나는! 나는 개방을 바꿀…….”
“어, 거기야.”
청명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뜬금없는 말에 일호신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청명이 콕 집어 말했다.
“그 ‘나는’
이 문제지. ‘나는’.”
“…….”
“네가 아니어도 돼. 개방은 누구든 바꿀 수 있지.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게 아니라고.”
그 말에 일호신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넌 개방이 어떤 곳인지 모…….”
“하나같이 머저리들밖에 없지?”
“……뭐?”
일호신개가 할 말을 이미 짐작했다는 듯……. 아니, 어쩌면 일호신개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나같이 너에 비하면 모자라 보이고, 자라는 것들은 아무리 봐도 영 미덥지 못하고, 네가 어떻게든 바꾸고 뒤집어 강제로 이끌지 않으면 쫄딱 망할 것 같겠지.”
청명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향했다.
“생각 없고, 멍청하고, 재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그나마 실력이라도 좀 괜찮은 놈들은 어릴 적에 대가리에 칼이라도 한번 꽂혔나 싶게 제정신 아닌 놈들 뿐이고, 그 와중에 또 쓸데없이 자신감은 넘쳐나는 데다가……”
“저 새끼 지금 누구한테 말하는 겁니까?”
“……청명아. 시선 처리 똑바로 해라.”
“이쪽 보지 마! 이쪽 아니라고!”
청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일호신개를 응시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한다. 절차든 명분이든 그건 부차적인 문제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부작용들은 좋은 결과가 다 보상해 줄 거다.”
청명이 히죽 웃으며 일호신개에게 물었다.
“맞지?”
“…….”
“그러니 네가 안 되는 거야.”
청명의 시선이 흘끗 하늘로 향했다.
“혼자 잘났고, 혼자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놈은 결국 모두를 힘들게 할 뿐이야. 나보다 못해 보이는 이도 내가 하지 못하는 걸 해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만이 장문이 될 자격이 있는 거지.”
일호신개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내가 모자라단 것이냐?”
“아니. 걸맞지 않다는 거지.”
“……어째서냐?”
“너는 지금을 바꿀 뿐이니까.”
일호신개는 영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청명이 부연했다.
“네 말이 그리 틀리지 않았을지도 몰라. 네가 방주가 되면 개방이 한동안은 지금보다 나아질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바뀐 것들은 결과적으로 개방을 더 어렵게 만들 거다.”
“어째서냐?”
“네가 죽고 나면 아무도 너를 대신할 수 없을 테니까.”
일호신개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청명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나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거꾸로 말하면 내가 아니면 아무도 못하는 일이라는 말과 같아. 문파는 그런 게 아냐. 내가 아니어도 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아니어도 지킬 수 있어야 해. 하지만 너는 그럴 수가 없어. 네 눈에, 네가 아닌 다른 거지들은 모두 멍청하고 모자라기만 하니까.”
담담하게, 하지만 어쩐지 선언하는 듯이.
“그렇기에 스스로 바꿔야 해. 앞으로의 개방을 살아갈 이들이 스스로.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망령 놈들이 아니라!”
순간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시선을 받은 장로들이 움찔하더니 이내 이를 악물었다. 한 장로가 주춤주춤 반발했다.
“어디 개방도도 아닌 놈이 훈계하듯…….”
“그만들 좀 합시다, 이제!”
그때 벼락 같은 목소리가 울컥 터져 나왔다. 청명도, 장로도 아닌 이였다.
홍대광. 그는 이를 악물고 장로들을 노려보았다.
“창피한 줄도 모릅니까?”
“이, 이놈이!”
“그렇게 당당하면 왜 숨깁니까? 소림 사람들이 온 김에 온 천하에 당당히 말하고 방주 자리에 오르면 그만이지 않았습니까?”
“무슨…….”
“장로님들도 창피하니까 제자들도 부르지 않고 여기서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입 다물어라! 후개도 아닌 놈이!”
그 말에 홍대광이 눈을 부라렸다.
“대체 언제부터 개방이 직위가 있어야 말을 할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까?”
“…….”
“방주부터 새끼 거지까지 모두 다 거지다. 우리는 가장 낮은 곳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고하가 없고, 그렇기에 누구라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다! 그게 개방 아니었습니까?”
홍대광의 턱에 힘줄이 불거졌다.
“그렇게 손에 쥐고 싶은 게 많으시면! 그렇게 지위고하를 나눠 가며 찍어 누르고 싶으시면! 그 누더기 벗어 던지고 다른 문파로 가십시오. 개방 장로쯤 되면 알아서 우대해 줄 곳 많을 겁니다. 뭐 하러 굳이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있습니까!”
장로들이 발끈하여 호통을 치려는 때였다.
“대답해 봐라.”
그들의 등 뒤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 방주?”
“아니…….”
장로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아직 채 다 무너지지 않은 문 쪽에, 개방의 방주 풍영신개와 다른 장로들이 서 있었다. 추면개를 위시하여 진즉에 대전을 나가 버렸던 이들이다.
그 광경에, 대전 내의 몇몇 장로들이 체념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글렀구나.’
방주가 저기 서 있다는 건, 평거지들을 규합하러 갔던 방주들이 실패했다는 걸 의미한다.
이쪽의 패배가 거의 확실시되었단 뜻이기도 하다.
풍영신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은 장로들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개방의 대사를 결정하는 곳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풍영신개의 질문은 홍대광에게로 향했고, 심지어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감히 자격 없는 네가 이렇게 입을 여는 연유가 무엇이냐?”
듣기에 따라서는 감히 나서지 말고 물러나라는 질책 같기도 했다. 그러나 홍대광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외쳤다.
“뭘 뻔한 걸 물으십니까! 쪽팔려서 그럽니다, 쪽팔려서!”
“……으음?”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던 모양으로 풍영신개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창피해서라고? 그게 전부냐?”
“다른 이유가 뭐가 필요합니까?”
풍영신개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살짝 초조함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홍대광은 그런 그와 보조를 맞춰 줄 생각 따윈 없다는 듯 얼굴을 실룩이며 다시 말했다.
“우리는 빌어먹고 사는 놈들입니다. 일도 안 하고 굴러먹고, 어디서 얼어 뒈져도 누구 하나 관심 가져 주는 이도 없습니다.”
“……당연하지. 그게 거지 아니더냐.”
“예. 당연하지요! 그러니 다른 건 몰라도 쪽팔린 짓은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가진 것 없는 거지가 제 발 저릴 짓까지 하면 정말 무가치한 종자가 되어 버릴 테니까! 더러운 거지새끼라고 멸시받아도, 그래도 우리는 사람입니다. 최소한 사람 노릇을 하고 사람 취급 받겠다는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합니까!”
풍영신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입이 몇 번 벙긋거리기를 반복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 동안 모두가 풍영신개와 홍대광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후.”
짧은 숨을 토해 낸 풍영신개가 머릿속에 맴돌던 제 생각을 모두 내려놓았다. 그리고 개방의 방주가 아닌, 바로 그가 묻고 싶은 것을 내어놓았다.
“……지금의……. 네 눈에 지금의 개방은 어떠하더냐?”
“뭘 물으십니까? 개판이지. 이게 무슨 거지 소굴입니까? 하오문 마귀 소굴이지.”
“……하면, 너는 어째서 개방이 이리되었다 보느냐?”
“왜 자꾸 뻔한 걸 물으십니까?”
홍대광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문했다. 풍영신개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한 것을 물었구나. 이건 모두 나의…….”
“그게 아니라!”
“음?”
또 풍영신개의 허를 찌르다 못해 의도를 무시해 버린 홍대광은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반파된 총단 내부를 휘 둘러보았다. 그리고 외쳤다.
“여기에! 개방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중요한 자리에!”
모두를 스친 시선은 마지막으로 일호신개에게 꽂혔다.
“거지가 어디 있습니까?”
일호신개의 눈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누더기 걸치고 거지 행세만 한다고 그게 거지입니까? 총단에 돈을 펑펑 쌓아 놓고, 제 손으로는 동냥 한 번을 안 하며 호의호식하는 양반들이 누더기만 걸쳤다고 거지요? 여기 장로들이 정말 거지요?”
몇몇 장로들의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심지어 내심 찔린 건 장로들뿐만이 아니었다. 풍영신개 역시 얼굴을 붉혔다.
그가 고난의 시간을 보냈던 건 사실이나, 화려한 주루에서 기름지고 값비싼 음식을 먹으며 살아온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의 신분을 모르고 사는 방식만을 본다면, 세상 누가 그를 두고 거지라 하겠는가?
“화산에 망조가 드는 이유는 도사 같지 않은 놈이 설치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뭐? 저 인간이 잘 나가다가……!”
“청명아. 가만있어라!”
“입 다물어!”
청명이 발작하기도 전에 홍대광이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화산이 다시 영광을 찾는 이유도 그들이 세상 누구보다 도사답기 때문입니다.”
일호신개를 노려보는 홍대광의 눈에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의지와 확신이 서려 있었다.
“발전? 개혁?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십쇼. 여기 있는 인간들이 모여서 개방을 강하게 만든다고 그게 거지들에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 이 총단에는 거지가 없는데. 결국에는 댁들 배나 불리겠지.”
“네, 네 이놈…….”
“제 의견이 뭔지 물으셨습니까?”
홍대광이 다시 풍영신개를 보며 말했다.
“예.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방주고, 장로고, 내 알 바 아닙니다. 도사가 아닌 이가 화산의 미래를 논할 수 없듯이, 거지가 아닌 양반들이 개방의 미래를 논할 수 없는 겁니다. 개방을 옳게 만들고 싶으면, 양쪽 다 빠지십쇼! 개방은!”
잠시 말을 멈춘 홍대광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숫제 악을 쓰듯 일갈했다.
“개방은 거지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이 배때기에 기름만 낀 양반들아!”
거의 사방이 트여 버린 총단 한가운데, 그 과격하고 정신 나간 듯한 발언이 쩌렁쩌렁 울렸다.
멍하니 입을 쩌억 벌렸던 백천이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리고 획 시선을 돌렸다.
‘처, 청명…….’
그리고 백천은 보았다. 그보다 더 심하게 충격받고 입을 쩍 벌린 청명의 모습을 말이다. 식은땀이 흘렀다.어……. 이거 아무래도 조진 거 아닌가?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