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1화. 말로 해서 될 놈이 있지. (6)
“신개!”
“사형!”
경악한 장로들이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일호신개에게 날아들었다. 그러더니 청명과 일호신개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이를 드러냈다.
“이 간악한 놈!”
“어찌 이런 무도한 살수를!”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건, 득의에 찬 표정 대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청명의 얼굴이었다.
“쿨럭…….”
“자, 장로!”
“괜찮으십니까?”
나가떨어졌던 일호신개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움켜잡고 있는 목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얼핏 보기에 치명상을 입은 것 같았지만, 장로들은 보는 즉시 알 수 있었다.
검이 일호신개의 목에 닿은 것은 분명하나, 치명적인 급소는 아니다. 목이 한 치쯤 뚫리고도 일호신개는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아……쉽겠군, 화산검협.”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일호신개가 장로들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꽤 많은 양의 피가 목에서 흐르고 있지만 표정만큼은 득의양양했다.
제 목을 살짝 쓰다듬으며 일호신개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반 치.”
“…….”
“딱 반 치만 깊게 찔렸다면 이미 내 목숨이 끊겼을 것을. 그대에게는 퍽 불운한 일이군. 하지만 세상 모두에게 찾아오는 불운이 그대만 피해 갈 리도 없지 않은가.”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언가 입을 떼려는데, 등 뒤에서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숙!”
“빌어먹을! 사숙!”
청명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일호신개는 들뜬 사람처럼 웃었다.
‘잡았다.’
세상 누구도 굴복시키지 못했던 화산검협. 화산제일검이자 천우맹의 총사인 그를, 다른 누구도 아닌 일호신개가 무너뜨린 것이다.
사패련의 패군, 소림의 법정조차 하지 못한 일을 말이다!
만족 어린 얼굴을 보며 청명이 으르렁거렸다.
“이겼다고 생각하나 본데…….”
“아, 검협께서 아직 상황을 모르는 모양이군. 그럼 깨닫게 해 줘야지. 섣부른 무모함이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지.”
일호신개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뒤이어, 그의 입이 열렸다. 청명이 본능적으로 검을 움찔 움직였지만 무턱대고 달려들 순 없었다. 어느새 다시 몰려든 저 장로들을 한 번에 뚫고 일호신개를 죽이는 건 청명으로서도 불가능하니까.
“제압 따윈 없다!”
일호신개가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모조리 죽여라! 단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이 안에서 벌어진 일이 새어 나가게 두지 마라!”
“예!”
두 눈에 각오를 새긴 장로들이 이를 악물고 화산의 제자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냥 다 죽입시다!”
“안 된다니까!”
“빌어먹을! 그럼 그냥 죽어 주라는 거야, 뭐야!”
조걸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부상당한 백천을 호위하듯 버티고 선 모두의 눈이 흔들렸다.
그런데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뜬금없이 대전의 한쪽 벽이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그 어떤 징조도 기미도 없이 말이다.
“뭐, 뭐야?”
“습격인가!”
당황한 장로들이 주춤하며 고개를 돌렸다. 심지어 몰려 있던 화산의 제자들마저 놀라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 상황에 당황하지 않은 이는 오직 한 명, 일호신개뿐이었다.
“온 모양이로군.”
그의 비릿한 목소리가 청명의 귀를 파고들었다.
“내가 개라고 했던가? 그럼 죽기 전에 꼭 말해 주게. 개에게 물려 죽는 기분이 어떠한지 말일세.”
벽이 부서지며 일었던 부연 먼지가 이윽고 바람에 휩쓸려 갔다. 푸른 창공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맑고 아름다운 하늘. 하지만 이곳의 누구도 그 하늘에 시선을 두지 못했다.
그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앗!
한 무리가 거침없이 들어섰다.
“저…….”
당황한 개방 장로들이 웅성거렸다.
개개인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저들이 몸에 두른 의복만 보아도 정체를 알 수 있다.
짙은 누런빛 승복. 천하에 저 옷을 입을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곳뿐이니까.
“소, 소림?”
“소림이 여기에 왜……?”
탁!
파르라니 깎은 머리, 그리고 이마에 계인을 찍은 소림의 무승들이 대전 안으로 들어서자 장로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정적이 흘렀다.
승려들은 침착하게 그 자리에 도열했다.
“아미타불.”
선두에 선 이름 모를 승려가 나직이 불호를 외었다. 그 자세가 곧고 차분하나, 두 눈에선 서슬 퍼런 기세가 흘렀다.
일호신개와 대치하고 있는 청명에게 시선을 주었던 승려는 이내 개방의 장로들에게 에워싸인 화산의 제자들을 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조걸이 움찔하더니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여기 진짜 호굴이었네.”
개새끼나 잡으러 들어온 굴에서 진짜 호랑이가 나와 버린 격이다.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개방만으로도 벅찬데.”
웬만해서는 우는소리를 하지 않는 윤종도 앓는 소리를 흘렸다.
이제는 살수를 쓴다고 해도, 이기기는커녕 빠져나갈 수조차 없다. 상대가 다른 곳도 아닌 그 소림이니까.
“어떻게 합니까, 사숙?”
상처 입은 어깨를 움켜잡고 있던 백천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소, 소림?”
일호신개를 호위하던 장로들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일호신개가 한 수를 준비했다고 하더니, 설마 그게 소림이었을 줄이야! 소림이 돕는다면 천군만마가 온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겨우 천군만마에 비할 게 아니다. 소림이 돕는다면 이 모든 일의 수습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저 천우맹의 핵심들을 지우기 위해 안아야 할 마지막 부담마저 떨쳐 낼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신기묘산(神機妙算)이라 할 만한 한 수였다.
“과연…….”
과연 군구일호. 화산검협 청명에게 무위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여 준 건 작은 흠이나, 일호신개는 가공할 귀계로 그 흠을 흠으로도 여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개방의 방주는 당연히 이런 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단하십니다. 장로…….”
장로들이 경탄과 존경을 담아 일호신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은 이내 의혹으로 물들었다.
일호신개의 얼굴에 괴이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을 직면한 이처럼.
“대……장로님?”
장로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런 일호신개를 바라보았다. 일호신개는 듣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그저 넋 놓고 중얼거렸다.
“소……림?”
“예?”
“소림이…….”
뭔가 이상하다. 뭔가 잘못되었다. 장로들이 그렇게 직감한 순간이었다.
콰앙!
난데없이 대전 안쪽에 있는 문이 터져 나가는 듯 열리고 낯선 무리가 난입했다.
그들의 기세는 실로 대단했으며, 직전에 모습을 드러낸 소림과 달리 그 의복이 제각각이었다. 기운조차도 통일성 없이 거칠고 들쑥날쑥한 사내들은 대전에 들어서자마자 살기를 뿜었다.
“일호신개! 약조대로…….”
선두에서 사자후를 내뿜으려던 이가 순간 움찔 멈춰 섰다. 반대편에 선 소림승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낯선 괴한들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이건……. 소림이라니! 말이 다르지 않은가? 나는 이런 말은 들은 적 없소, 일호신개!”
장로들은 역정을 내는 그들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저들은 또 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금 상황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연달아 벌어지니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아미타불.”
그때 나직하고도 웅혼한 불호가 대전 안에 우렁우렁 울렸다. 내력 실은 불호를 뱉은 선두의 소림승이 고개를 들었다.
“방주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가 재차 물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방주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당황한 장로들은 저도 모르게 풍영신개 쪽을 보고 말았다.
그들이 진정으로 소림을 맞이할 대표로 일호신개를 내세우고자 했다면 결코 그리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사람이 당황하면 본능에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러니 이 행동이야말로 지금 개방의 대표가 여전히 풍영신개임을 여실히 증명한 거나 다름없었다.
“여기 있소.”
여기저기 부상을 입고 산발을 한 풍영신개가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훔치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내가 개방의 방주 풍영신개요.”
소림승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다른 이들의 시선만 보아도, 이자의 신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아미타불. 소림의 일대제자 혜방을 비롯한 소림의 무승들.”
혜방의 뒤에 선 이들의 눈에서 맑은 정광이 흘러나왔다.
“개방 용두방주의 요청을 받아…… 방주를 도우러 왔소이다.”
장로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사이로 당황과 의혹이 뒤범벅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그게 무슨…….”
“소림이잖아? 그런데 지금 소림이 누굴 돕는다고?”
그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혜방의 웅혼한 목소리가 내력을 가득 싣고 대전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개방의 방주가 명백히 살아 있음에도 방주의 죽음을 거짓으로 퍼뜨려 그 자리를 찬탈하려 한 것은 명백히 도의에 맞지 않는 일!”
이제 장로들의 시선은 모두 일호신개에게로 쏟아졌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달라는 눈빛이었으나, 일호신개는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소림을 부른 건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장로들께서는 부끄러움을 알고 물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저를 비롯한 소림은 개방 방주의 요청을 들어 이 사태에 개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그게 무슨…….”
“아미타불.”
더는 변명을 듣지 않겠단 의지로 가득한 불호가 단호히 울렸다.
모든 말을 끝낸 혜방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사, 사형.”
그곳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커다란 눈 가득 눈물을 글썽이는 혜연이 서 있었다.
혜방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상황을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개방의 장로들은 연신 주위의 눈치만 살피고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어쩌면 상황을 모두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 침묵을 깬 건, 작은 신음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줄 이의 등장이었다.
“끄응……. 같이 좀 가자니까.”
도열한 소림승들 뒤로 형편없이 무너져 버린 대전의 외벽. 그 잔해 속에서 하나의 손이 불쑥 솟아올랐다.
턱 바닥을 짚은 그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기어 나왔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개방 장로들이 너무도 잘 아는 이였다.
“호, 홍대광?”
“네, 네 녀석이 여길 어떻게?”
장로들의 시선을 한눈에 끌어모은 홍대광이 일순 겸연쩍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휘휘 돌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마침내 찾던 이를 발견한 그는 짜증과 환호가 반쯤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안 늦었다, 화산검협! 이제 다시는 구박하지 마라! 숭산까지 다녀오느라 다리 부러지는 줄 알았으니까!”
장로들뿐만 아니라 일호신개 역시 한 대 얻어맞은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청명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심성 고약해 보이는 미소가.
“그…… 뭐라 했더라?”
“…….”
“내 대가리가 소문만 못하다고 했었나?”
일호신개가 한 말은 영민함이 과장됐다 정도였지만…… 아무래도 청명의 귀에는 그리 들린 모양이었다.
“뭐 그럴 수 있지. 어, 그럴 수 있어. 그런데…… 그 멍청한 새끼보다 더 멍청한 새끼는 뭐라 불러야 할까?”
“이, 이놈……!”
“상황이 바뀌었으니, 적당히 협상을 진행해도 되겠지만 말이야.”
청명이 검을 까딱이며 일호신개를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일호신개와 그를 지키던 장로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이나 연거푸 물러나고 말았다.
“말로 해서 될 놈이 있지.”
“…….”
“나는 멍청해서 말로는 잘 못 하니까 그냥 칼로 대화하자, 이 거지새끼야.”
청명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