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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09화 (1,510/1,567)

1509화. 말로 해서 될 놈이 있지. (4)

콰아앙!

조걸이 본능적으로 바닥을 박차며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멀다. 늦다.

일검분광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그의 쾌검으로도 이 거리를 단숨에 좁히기란 불가능했다.

느려진 시간 속에, 강맹한 내력을 품은 단봉이 백천의 뒷머리로 떨어지는 광경이 똑똑히 보였다.

‘아, 안…….’

조걸이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려는 순간.

카앙!

어디선가 섬전처럼 날아든 검이 백천의 머리에 거의 닿은 단봉을 단숨에 밀쳤다.

“헉, 사고!”

조걸이 떨림과 안도가 뒤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어느새 백천의 옆에 나타난 유이설이 무심한 얼굴로 백천을 공격해 오는 이의 가슴을 베어 내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휘청이는 백천의 어깨를 붙들며 일으켰다.

잠깐 의식이 흐려졌던 백천이 고개를 들어 유이설을 보더니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고맙다.”

“새삼.”

백천은 좌수로 제 가슴께를 움켜잡으며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자세를 잡았다.

“잠시 방심한 모양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유이설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떨어져서 지켜보는 조걸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사숙이 고작 저런 공격에 당한다고?’

물론 사람은 그날그날 몸 상태가 다른 법이고, 어떤 고수라고 해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를 감안해도 그가 아는 백천은 저리 쉽게 자신의 가슴을 내줄 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더 이상한 건 백천이 아닌 유이설이다.

조걸은 윤종 덕분에 잠시 숨돌릴 틈을 얻었기에 백천의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유이설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한데 어떻게 백천이 위기에 처한 걸 알고 조걸보다 빠르게 날아와 도왔단 말인가?

백천이 위기에 처할 거란 걸 미리 알지 않은 이상…….

“멍하니 뭐 해, 인마!”

“아, 알았다고요!”

조걸이 급히 대답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은 한가로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다. 어쨌든 이곳은 전장이지 않은가?

우려 섞인 눈빛으로 백천 쪽을 돌아본 조걸은 이내 윤종의 앞으로 달렸다. 지금은 백천의 곁에 있는 유이설을 믿을 수밖에 없다.

“으아아아아아압!”

조걸의 검에서 여느 때보다 강맹한 검기가 벼락처럼 뿜어졌다. 흡사 주변의 모든 장로를 제게로 끌어들이려는 듯이.

그 폭발적으로 뻗어 나가는 검기를 곁눈질로 살핀 백천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때 유이설의 짧은 한마디가 들려왔다.

“뒤로.”

“아니다.”

백천은 고개를 내저으며 거부했다.

“잠시 방심했을 뿐이야.”

“고집쟁이.”

“새삼.”

백천이 검을 움켜잡고 당당히 한 발을 내디뎠다.

유이설도 그런 그를 더 이상 말리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의 반보 옆에 자리 잡았을 뿐이다.

백천이 쓴웃음을 흘렸다.

‘폐를 끼치는군.’

유이설이 싸우는 방식이야 익히 안다. 애초에 그녀는 자리를 잡고 버티며 싸우지 않는다. 상대가 눈치채기도 전에 빠르게 날아들어 혼란에 빠뜨리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날카롭게 베는 게 유이설의 방식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평소답지 않게 바닥에 발을 붙인 채 적을 막아 내고 있다. 가타부타 말하지 않아도 확연히 느껴졌다. 백천을 돕겠다는 의지가 말이다.

우우웅.

백천은 몸 안에 휘도는 내력을 검에 힘껏 밀어 넣었다.

“그러니까! 그냥 방심한 거라니까!”

화아아아아아!

검 끝에서 붉은 꽃잎이 줄기줄기 뿜어졌다.

오늘따라 유독 더 화려하고 붉은 매화가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처럼 피어올랐다.

“우오오오!”

그리고 그에 맞추어 백천의 등 뒤에서 황금빛 경기가 햇살처럼 터져 나왔다.

“위, 위험하다!”

“피해!”

콰아아아앙!

금빛 권력이 대전 벽을 산산이 터뜨렸다. 이 정도 충격이면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숨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놈이!”

그 사실을 눈치챈 장로들이 살기를 흘리며 백천을 노려보았다. 백천이 짧게 웃었다.

“거지들은 가진 게 없어서 가장 떳떳하다더니, 장로님들을 보고 있으니 그게 꼭 맞는 말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뭐라?”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왔다.

상황은 여전히 최악이다.

그저 청명이 놈이 빨리 일호신개를 처리해 주기만을 기다리며 다들 근근이 버티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백천은 마음이 차분하고도 가벼웠다.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저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모르겠군.’

이 마음이 과연 자신이 걷는 길에 대한 확신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시선을 슬쩍 틀었더니 귀신처럼 날뛰는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전자인 걸로 하자.”

조용히 중얼거린 백천이 웃으며 다시 한번 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더 몰아붙여라!”

“예!”

입술을 질끈 깨문 백천이 각오를 다지며 검을 쭉 뻗었다.

카앙!

날아드는 봉을 단번에 튕겨 낸 검은 뱀처럼 허공을 가르고 뻗어나가 봉을 잡은 쪽 팔을 난자했다. 순식간에 손목과 팔꿈치를 물어뜯은 붉은빛 적사(赤蛇)는 만족을 모르고 움직여 기어이 어깻죽지까지 물어뜯었다.

“큭!”

삽시간에 팔을 난자당한 개방 장로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고통을 느낄 여유조차도 없었다. 이번엔 독니를 드러낸 적사가 얼굴로 날아들고 있었다.

“헉!”

헛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장로는 황급히 몸을 낮추며 바닥을 굴렀다.

나려타곤. 무인들이 가장 수치를 느낀다는 신법이건만, 부끄럽지도 않았다.

쾅!

그러나 애석하게도 상황을 따지지 않는 건 청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닥을 구르는 이에게 빛살처럼 따라붙은 청명은 장로의 가슴팍을 대번에 걷어차 버렸다.

장로는 입에서 피를 뿜으며 대전 벽에 처박혔다. 뚫린 벽에서 먼지가 뭉게뭉게 솟았다.

한 사람의 장로를 깔끔하게 처리한 청명은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졌다.

콰앙! 쾅!

그러기 무섭게 그가 서 있던 자리로 세 자루의 단봉이 떨어졌다. 대전 바닥이 으스러질 정도로 강맹한 공격이었다. 제때 피하지 못했다면 몸뚱이가 으깨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런!”

애먼 바닥만 공격한 이들은 당황하여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눈앞에 보인 건, 몸을 물린 청명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을 정확히 노리며 날아드는 수십 줄기의 검기였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며 피해 냈다. 길쭉하게 뻗어 나온 붉은 검기는 뒤튼 얼굴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위험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꿰뚫렸을 거란 사실에 목덜미가 섬찟했다. 위기감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그 순간 장로가 눈을 부릅떴다.

‘뭣……!’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간 검기가 갑자기 불어나는 듯싶더니, 검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무수한 꽃잎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마치 코앞에서 터진 폭탄이 사방으로 파편을 날리는 것처럼.

그 기겁할 사태에 대응할 만한 실력이 있었다면, 이들이 아직도 고작 개방 장로 직위에 머물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비산하는 꽃잎이 장로들의 몸을 난자했다. 삽시간에 전신이 상처로 뒤덮인 장로들은 짧게 경기하다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카각.

내려진 청명의 검 끝이 바닥을 긁었다. 달아오른 숨을 갈무리한 청명은 시퍼렇게 날이 선 눈으로 일호신개를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끝이 없군.’

세상에 거지들은 남아돌고, 그만큼 개방도들의 수는 많다. 하지만 장로들조차 이렇게 남아돌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장로들 하나하나의 무위는 명문의 일대제자보다 한 급 더 높은 수준에 불과하나, 그런 장로들이 고작 반수만으로도 이 넓은 대전을 다 채울 만큼 많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청명의 부담감은 일호신개가 느끼는 충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호신개는 아예 넋을 놓은 사람처럼 의식을 잃고 이리저리 널브러진 개방의 장로들과 청명을 번갈아 보았다.

청명은 아직도 멀쩡한데, 개방의 장로들은 과장 보태어 거의 대전 바닥에 쌓여 있지 않은가.

“대체…….”

손이 어느새 저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청명의 무위를 ‘아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에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했다.

청명은 강하다. 하지만 일호신개 역시 강하다.

그러니 화산검협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상대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어쩌면 일호신개 자신이 승리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오늘 눈앞에서 본 청명의 존재는 지금껏 그가 ‘알았다’ 여겨 온 모든 것을 허상으로 만들었다.

청명의 말대로다.

그는 개들 속에서 왕인 줄 알고 우쭐대며 살아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 너른 들판에서 목숨을 걸고 영토를 다투던 범들 앞에는 한낱 유희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계속 그렇게 숨어 있을 건가?”

청명의 서늘한 질문에 일호신개가 움찔했다.

청명의 눈빛에는 그 어떤 우월감도 어려 있지 않았다. 일호신개를 경계하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저자는 그를 적으로도 보지 않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일호신개는 입술을 콱 짓깨물었다.

그는 싸울 수 없다. 저자를 상대로 싸울 용기 같은 건 없다. 아니, 애초에 그건 용기도 아닌 만용이다.

‘그래. 나는 개다.’

홀로 싸울 용기가 없는 개. 하지만 그게 그가 패배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초조한 모양이군?”

개에게는 개의 싸움 방식이 있는 법. 그 대단한 범조차도 무리 지은 사냥개에게 몰리다 물려 죽는 법이다.

일호신개가 가만히 전황을 살폈다.

화산 놈들이 최대한 분전하고 있지만, 그게 전부다. 저들은 결코 이길 수 없다.

“네 목적은 저들이 쓰러지기 전에 나를 죽이는 거겠지.”

“…….”

“하찮은 자존심 따위로 그 속셈에 말려들어 줄 생각은 없다. 다른 장로들을 모조리 죽이기 전에 내가 너와 손을 섞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청명이 피식 웃었다.

“장로들이 다 죽어도 너만 방주가 되면 그만이라는 건가? 생각보다 더 역겨운 인간이네.”

“아니, 그럴 일도 없지.”

“……뭐?”

“나는 분명 화산이 이곳에 나타날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방주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이끌고 저항할 수는 있단 건 염두에 두었지.”

청명이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쓸 수 있는 패가 이거로 전부일 거라 생각했는가? 화산검협?”

일호신개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너는 나를 너무 무시했다. 그게 네 패인이다.”

* * *

콰아아앙!

개방의 총단 벽면이 터지며 어마어마한 폭음이 개봉을 뒤흔들었다.

“……이대로 지켜만 보실 겁니까?”

누군가가 물음을 던졌다. 총단에서 빠져나와 망연히 지켜만 보던 장로들이 일제히 한 사람을 돌아보았다.

추면개. 저 일호신개와 잠시나마 맞섰던 그를.

“……그럼 어찌하자는 건가?”

“뭐라도 해야…….”

“외인을 도와 방의 장로를 죽여야 하는가? 아니면 장로를 도와 외인들을 죽이고 개방이 죄를 짓게 해야 하는가?”

“그건…….”

추면개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선택할 수가 없네. 나는…….”

“하지만 장로님. 이대로라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아무리 저들이 그 화산오검이라지만, 저 많은 장로를 상대해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화산검협 청명이라는, 패군을 상대할 유일한 이를 잃게 됩니다.”

“…….”

“그게 더 큰 죄가 아닙니까, 그게!”

추면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알고 있다. 화산검협 청명은 결코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된다. 그를 죽인다면 개방은 강호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셈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같은 방의 장로들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막다른 곳에 몰리니 다른 인물을 떠올리게 되었다.

‘자오개라면…….’

아니, 의미 없는 생각이다. 자오개는 여기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지켜보세.”

“예?”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면 결과로 그 답을 줄 것일세. 화산검협 청명과 화산의 오검은 지금껏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을 몇 번이고 해내지 않았는가?”

“그건 그렇지만…….”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면 제 몸 빼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걸세. 아니, 그러기를 바라야겠지.”

추면개가 무력하게 한숨을 내쉬려던 바로 그때였다.

“자, 장로님! 장로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추면개가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사색이 된 거지 하나가 그와 총단의 입구를 번갈아 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총단에! 총단에 보고해야 합니다!”

“……지금 총단에는 들어갈 수 없다. 무슨 일이냐?”

“성문, 지금 성문에……!”

“성문? 성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말이냐? 침착하게 말해라!”

추면개가 호통치자 마른침을 한번 삼키며 호흡을 가다듬은 거지가 외쳤다.

“소림! 소림이 왔습니다!”

그 순간 추면개의 두 눈에 경악의 빛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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