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8화. 말로 해서 될 놈이 있지. (3)
일호신개의 굳은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그는 자신이 개방제일인이라는 사실에 조금의 의심도 품은 적 없다. 오죽하면 별호가 군구일호이겠는가?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지금 쇄도해 오는 새파란 애송이를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애송이가 다름 아닌 화산검협 청명이므로.
쿠웅!
강하게 진각을 밟은 군구일호의 장심에서 푸른빛 강기가 찬란하게 뿜어졌다.
“타압!”
짧은 기합과 함께 터져 나온 장력이 달려드는 청명의 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앙!
가공할 기파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일호신개가 날린 장력은 마치 솟아오른 절벽을 만난 급류처럼 급격히 좌우로 갈라졌다.
그 갈라진 공간으로 청명이 달렸다. 눈빛이 서늘했다.
파앗!
섬뜩한 빛이 일순 번쩍이는 동시에, 흰빛 검이 단번에 일호신개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큭!”
일호신개는 목을 황급히 옆으로 꺾으며 손바닥으로 날아드는 검면을 후려쳤다. 회피와 방어가 동시에 이뤄진 일 수였다. 하지만 정순한 내력을 실은 청명의 검은 그 와중에도 일호신개의 목에 붉은 상흔을 남겼다.
서걱!
뜨거운 고통이 목에 번졌다. 하지만 이를 채 다 느낄 틈도 없이 청명의 암매검은 뱀처럼 뒤틀리며 심장을 노려 왔다.
일호신개는 경호성을 내지를 여유도 없이 몸을 비틀었다.
서걱! 서걱!
청명의 검이 그의 가슴과 등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앞뒤로 선명하도록 붉은 핏물이 튀어 올랐다. 이대로는 속절없이 밀릴 게 분명하다.
“하아압!”
일호신개는 있는 대로 공력을 밀어 넣어 청명을 향해 일장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본 것은, 뿜은 장력 사이로 얼핏 드러난 청명의 섬뜩한 입꼬리였다.
파아아아앗!
장력이 채 뻗치지 못한 순간적인 틈으로 청명의 검이 섬전처럼 파고들었다. 일호신개가 두 눈을 부릅떴다.
‘뭐?’
정면으로 이만한 장력이 날아드는데도 물러서지 않는다고?
콰득!
청명의 검이 일호신개의 어깨에 단숨에 박혀 들었다.
참기 힘든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일호신개는 오히려 이를 악물며 더 큰 공력을 일으켰다. 어깨를 내준 대가를 저놈의 목숨으로 받아 내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때.
우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어깨에 박혀 든 검이 뒤틀렸다. 뻗었던 팔도 강제적으로 함께 뒤틀리고 말았다.
콰아아아아!
그 덕에 미미하게 장력의 방향이 뒤틀렸다. 청명은 좌수로 이를 맞이하여 흘리고 저항 없이 몸을 실었다. 마치 급류를 타고 떠내려가는 낙엽처럼 쾌속하게 물러나 버린 것이다.
탓.
허공에서 몸을 한차례 돌려 바닥에 내려선 청명은 여유롭게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우수에 잡힌 암향매화검에선 붉은 핏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일호신개의 피가 말이다.
일호신개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그런 청명을 멍하니 응시했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는가?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몸으로 겪었다. 그럼에도 조금 전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닿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몸뚱이를 육편으로 만들고 남을 장력을 향해 어떻게 되레 달려들 수가 있는가? 어떻게 그러고도 상처 없이 피해 내기까지 할 수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되고 나니 일호신개는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차원이 달라…….’
이건 내력의 고하(高下)나, 초식의 정교함을 논할 문제가 아니다. 저자의 검은 그가 상상해 온 차원을 벗어나 있었다.
‘이토록 강하다고?’
화산검협 청명이 강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천하에 누가 있겠는가? 게다가 그는 개방의 장로다. 모를 수가 없고, 몰라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 ‘강함’의 수준이 문제다. 청명이 조금 전 보여 준 움직임은 천하에 알려진 화산검협의 무공 수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때, 귓가에 심드렁한 청명의 목소리가 스쳤다.
“그 장법, 추의십팔장(追義十八掌)인가?”
“그, 그걸 어떻게?”
본능적으로 흘러나온 일호신개의 대답에, 청명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짧게 찼다.
“쯧. 방주만 익힐 수 있는 장법을 장로가 익히고 있다니, 개방도 다됐군.”
- 화산은?
“카악! 들어가쇼!”
이 양반은 시도 때도 모르고 나온다니까! 그거랑 그거랑 같아? 이거랑 화산의 자하신공은 다르지! 어디 거지새끼들이랑 비교를 해!
한숨을 쉰 청명은 검 끝을 불쾌하다는 듯 까딱였다.
“뭐, 됐어. 익힌 놈이 없어지면 똑같은 거니까.”
그극.
청명이 검으로 바닥을 긁으며 일호신개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일호신개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왜? 도망이라도 가시려고?”
뒤늦게 제 추태를 깨달은 일호신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청명은 그런 그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째 말씀하시는 거랑 행동하시는 게 영 다른데.”
“이놈…….”
“말은 누가 못 해?”
청명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개방을 올바르게 돌려놓겠다느니, 나라면 할 수 있다느니, 나는 다르다느니…….”
“…….”
“평생 사선에 서서 압박받아 본 적 없는 놈이야 그런 말이 쉽게 나오겠지. 뒤에서 지적질이나 하면 되는 거니까.”
“이놈!”
“군구일호, 그거 뭐 대단한 별호처럼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그건 다른 의미로 보면 평생 비교할 만한 대상이 개밖에 없었다는 뜻이거든?”
청명이 검 끝으로 일호신개를 겨누었다.
“개들 속에서 왕 노릇이나 하던 범이 산중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범을 만나면 물려 죽는 거야. 그건 더 이상 범도 아니고 범의 탈을 쓴 개일 뿐이지. 그냥 좀 우렁차게 짖는 개.”
“닥쳐라, 이놈!”
이 모든 언동이 놈의 격장지계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지만, 일호신개는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살면서 언제 다른 이에게 이런 모욕을 당해 보았겠는가? 그것도 같은 정파 사람에게.
“지금도 봐. 범은 짖지 않고 무는 법이거든? 이러니까 네가 개인 거야.”
청명이 비릿하게 웃으며 일호신개에게 다가갔다.
일호신개는 그런 그를 한껏 경계하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저 방자한 주둥아리를 당장 짓뭉개 버리고 싶은 마음이야 왜 없겠는가? 하지만 일호신개는 바보가 아니다. 일 합을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고하는 이미 가려졌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저자의 상대가 못 된다. 자타공인 개방제일인인 그가 화산의 새파란 애송이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이젠 어찌해야 하는가?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장로들이 단숨에 날아와 일호신개를 호위하듯 섰다.
“장로!”
“저희가 돕겠습니다!”
일호신개는 그 순간 아랫입술을 더 콱 깨물었다. 다른 장로들도 깨달은 것이다. 일호신개 혼자서는 저 화산검협을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말이지 이런 치욕은 처음이었다.
“오?”
청명은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랄하게 비웃었다.
“대단하신 개방의 장로님들께서 한참 어린 후배를 높이 사 주셔서 이렇게 합공까지 해 주시니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닥쳐라, 이놈!”
장로들의 얼굴도 화르륵 달아올랐다. 다급한 상황이라고는 하나, 이 행동이 차마 어디에서도 당당히 말할 수 없을 부끄러운 일이란 인식은 있는 것이다.
“뭐 장로님들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청명의 시선이 장로들의 사이에 있는 일호신개에게 꽂혔다.
“개 중의 범이라고 잘난 체하시더니, 개들 뒤에 숨는 건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에요? 이래서야 당최 누가 개고, 누가 범인지.”
“이익……!”
“장로! 진정하셔야 합니다!”
“저자의 성정과 요망한 언변은 장로께서도 익히 아시지 않습니까? 부디 침착하십시오!”
청명이 큭큭대며 웃었다. 그러고는 제 손에 들린 암향매화검을 한 바퀴 빙글 돌려 다시 잡았다.
“알면? 알면 뭐 다를 것 있나? 너희가 지금껏 몰라서 못 한 게 뭐가 있는데? 뻔히 알고도 못 한 거 아냐?”
“이…….”
“개방의 협의를 되찾고 싶지만, 그 와중에 후배를 합공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더는 개방을 비겁하게 만들고 싶지 않지만, 진실을 덮고 방주를 암살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놈! 네가 뭘 안…….”
“지랄들을 한다.”
청명이 웃음처럼 욕설을 흘렸다. 이제 딱히 화도 나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사람은 여유가 있을 때는 온갖 것을 다 챙긴다. 하지만 위기에 몰리면, 그때부터는 숨겨 둔 본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 악취가 꼭 여기가 거지 소굴이라 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안 그래?”
핏발 선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던 일호신개가 외쳤다.
“어떤 방식이든 결과를 내는 것, 그게 진리다! 나는 이 굴욕을 참아 내겠다.”
“아, 그래?”
청명이 조소하며 역수로 검을 잡았다. 동시에 입가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어차피 말해 봐야 못 알아듣겠지만, 충고 하나 해 드리지.”
청명의 시선이 흘끗 옆으로 돌아갔다.
수십의 개방 장로를 상대로 악전고투를 벌이는 그의 일행이 보였다. 중과부적임을 뻔히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그들이 말이다.
“협의라는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
“이걸 너희가 알 리가 없지.”
파앗!
청명이 바닥을 박차며 장로들을 향해 대번에 날아들었다.
“놈을 죽여라!”
장로들 역시 있는 대로 공력을 끌어 올려 응전했다.
카가아앙!
“큭!”
조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날렸던 검이 아래에서 솟구친 짧은 봉에 막히며 튕겨 나간 참이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성과를 거뒀던 검격이 이제는 번번이 막히고 있었다.
‘이런.’
순간적으로 허를 찌르며 기선을 제압했었건만, 안타깝게도 그 우위는 오래가지 않았다.
본디 개방은 구파 중 평균 무위가 가장 떨어지는 곳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무려 장로들이다. 심지어는 그 장로들이 몇 배의 수로 뭉쳐 응전해 오니 계속 승기를 이어 간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생각할수록 억울하네! 왜 우리는 항상 이런 싸움만 하냐고!”
“닥치고 싸워라, 이 새끼야!”
“안다고요!”
조걸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해!’
포위당하지는 않은 데다가, 장로들이 그들과의 전투에 온전히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이쪽은 청명이 놈의 실력을 완전히 믿을 수 있지만, 장로들은 일호신개를 완벽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크!”
조걸이 잽싸게 고개를 숙이며 날아드는 단봉을 피했다. 단봉에 실린 푸른 기운에 휩쓸린 곱슬머리 몇 가닥이 가닥가닥 끊겨 허공에 휘날렸다.
“하압!”
그때 윤종이 조걸을 대신하여 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조걸이 순간 호흡이 달리는 것을 눈치 좋게 알아채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덕분에 한숨 돌리게 된 조걸은 밭은 숨을 정돈하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오래는 못 버텨!’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그들의 목적은 이기는 게 아니니까. 어떻게든 지금처럼 장로들의 발목을 잡고 있으면 청명이 반드시 일호신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이렇게 각오를 다시 다지고 앞으로 달려들려던 조걸이 순간 멈칫했다.
“음?”
눈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였다. 얼굴에 의혹이 스쳤다.
‘뭐지?’
다른 쪽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 뭔가 기이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카앙!
날아드는 단봉과 매화검이 허공에서 강한 충돌을 일으켰다. 힘에 부친 매화검이 뒤로 훅 밀려났다.
‘밀려?’
왜?
장로들이 휘두르는 봉에 실린 힘과 무게는 조걸도 이미 경험했다. 분명 강하긴 하지만, 저리 쉬이 밀릴 정도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저 매화검은 지금 봉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움직임에서 날카로움도 강한 기세도 보이지 않는다.
“사숙……?”
게다가 그 매가리 없는 검의 주인이 백천이기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 사숙!”
저건 백천의 검이 아니다. 조걸이 알던 백천의 검은 기복이 없고 더없이 정교하며, 더할 나위 없이 웅대했었다.
그러나 당황한 조걸이 그를 향해 달려가기도 전에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카앙!
단봉에 부딪힌 검이 반발력을 이겨 내지 못해 한순간 위쪽으로 튕겼고.
“이놈!”
그렇게 생겨난 빈틈으로 푸른 기운을 머금은 단봉이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퍼어억!
조걸은 보았다.
날아든 단봉에 가슴을 가격당한 백천의 몸이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는 모습을.
“사…….”
앞으로 고꾸라지는 백천의 뒷머리를 향해 단봉이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말이다.
“아, 안 돼에에에에에에에에!”
이미 늦어 버린 조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