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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07화 (1,508/1,567)

1507화. 말로 해서 될 놈이 있지. (2)

대전 안에 거친 기운이 위협적으로 몰아쳤다.

긴장감이 흐르기는 해도 애써 ‘평화’를 가장하던 대전 내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전장이라 일컬어도 될 만큼 험악해졌다.

“자, 잠시! 멈추시오, 장로!”

추면개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함쳤다.

“그게 무슨 말이오이까? 목을 베다니! 저자는……!”

“그 입 닥치시오!”

추면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일호신개의 우렁우렁한 노성이 그의 고막을 후려쳤다.

“답답한 인사 같으니!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가 물러난다면 개방이 천하의 웃음거리로 전락한다는 걸 정녕 모르겠소?”

“그…….”

일호신개의 기세가 순간적으로 추면개의 입을 콱 틀어막았다.

“그대들에게 도우란 말은 하지 않겠소! 하지만 적어도 방해는 하지 마시오! 보지 않을 자는 고개를 돌리고, 돕지 않을 자는 이곳에서 나가시오! 당장!”

흡사 노한 범 같은 기세에, 추면개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사실 이를 악물고 저항하자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호신개가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으…….”

입술을 짓깨물며 고민에 잠겨 있던 추면개가 결국 한탄 섞인 신음을 흘렸다.

“장로. 화산은…….”

“알고 있소. 그대야말로 내가 일호신개임을 잊지 마시오.”

일호신개와의 기세 싸움에서 완전히 짓눌린 추면개는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슬쩍 풍영신개를 곁눈질했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 추면개는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몸을 돌려 대전을 나가 버렸다.

“으음.”

“……후우.”

둘의 대립을 숨죽이고 지켜보던 장로들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이로써, 그들이 어찌해야 하는지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다.

진짜 방주를 적대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저 기세 높은 이들을 상대로 저항할 엄두는 내지 못하는 장로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중 몇몇이 미련 때문인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인지 슬그머니 풍영신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수가 결코 많지는 않았다.

“쯧.”

일호신개는 엉거주춤 밖으로 나가는 장로들을 쏘아보며 짧게 혀를 찼다.

오욕을 뒤집어쓸 용기도, 철저하게 비겁해질 각오도 없는 이들. 지금의 개방을 좀먹는 것들은 바로 저들이다.

하지만 일호신개는 저들을 증오하지는 않았다. 그가 증오해야 할 이는 따로 있으니까. 그는 풍영신개를 잠시 보다 백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기회를 주지.”

“…….”

“이곳에서 물러나 모든 것을 함구하겠다 약조한다면, 개방은 그대들의 친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이곳에서 죽는다.”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이곳이 다름 아닌 개방의 총단이며, 저자가 개방의 장로들을 이끄는 자임을 고려하면 실로 오금이 저려야 할 협박이었다.

“어찌하겠느냐?”

하지만 정작 협박을 들은 백천은 담담하기만 했다.

“죽는다라…….”

잠시 되뇌던 백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뒷감당은 자신이 있으십니까?”

“화산을 믿는 모양이다만, 안타깝게도 화산은 나설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대신 개방에 침입한 마교의 악적을 처단하다 불행히 유명을 달리한 제자들을 추모하게 되겠지.”

백천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곳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고 마교에 그 죄를 뒤집어씌우겠다는 말이다.

“말씀하시는 것을 보아, 이런 식의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닌 듯하군요. 지금까지 몇이나 되는 이들을 그런 식으로 처리해 왔습니까?”

“…….”

“확실히 정보를 다루는 이들은 무섭습니다. 진실이 아닌 것도 진실로 만들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영 모르는 게 많으시군요.”

“무슨 뜻이지?”

스르르릉.

백천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이 행위의 의도야 명백하다. 일호신개의 얼굴이 굳어졌다. 검을 뽑아 든 백천은 고요히 가라앉은 눈으로 일호신개를 노려보았다.

“안타깝게도, 겁박은 화산을 대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건 화산을 대하는 가장 잘못된 방식이지요. 소림도, 사패련도 아는 것을 개방은 모르시는군요.”

“……놈.”

“저는 그저 장로께서 하신 말씀을 지키려 함입니다. 그 주장이 거짓이라면 장로께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했던 그 말씀.”

백천이 빙긋 웃으며 자세를 취했다.

“화산은 책임이라는 말에 민감하거든요. 그러니…… 더는 긴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일호신개가 피식 웃고 말았다.

“……화산은 화산이다, 이 말인가.”

그도 알고 있었다.

화산은 배알이 뒤틀린다는 이유만으로 사패련이 지배하는 해남까지 목숨을 건 여정을 강행했다. 그런 이들이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뜻을 꺾고 굴복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 순간 이들을 새삼스레 볼 수밖에 없는 건, 그 위험한 길을 선택한 이들의 한없이 당당한 태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일호신개 역시 물러날 수 없었다.

저 풍영신개가 아니었다면…… 개방도 저런 젊은 무인들을 키워 낼 수 있었을지 모를 일 아닌가?

“……그렇다면.”

쿠웅!

일호신개가 대전 바닥을 강하게 짓밟았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 이건 너희가 선택한 일이다!”

이제 더는 대화의 여지가 없음을 직감한 조걸과 윤종이 검을 뽑으며 앞으로 박차고 나왔다. 백천의 좌측에 선 조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결국 이리될 줄 알았지!”

“아니, 이럴 거면 시간 아깝게 대화는 뭐 하러 하십니까? 그냥 칼부터 휘두르시지.”

“……둘 다 시끄럽다.”

“아미타불.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장문대리가 나서면 항상 이런 식이지요.”

“사숙이 그렇죠, 뭐.”

“무능해.”

혜연과 당소소, 그리고 유이설도 시큰둥한 얼굴로 걸어 나와 백천을 호위하듯 섰다. 순간 서로를 마주 본 그들은 뭔가 빠졌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정적 속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이의 얼굴이 여러 차례 변했다.

하지만…….

“후!”

사내, 이송백은 이내 짧게 호흡을 가다듬더니 앞으로 나와 검을 뽑아 들었다. 검 끝에서 푸르고 정갈한 검기가 흘러나왔다.

조걸이 이죽거렸다.

“아까는 그리 당당하시더니 막상 싸우려니 겁이 나셨던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요.”

이송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슬쩍 뒤쪽의 청명을 향해 곁눈질했다.

“이게 옳은 일이라면…… 나아가다 부러질지언정 그 길을 가는 데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그런 것치고는 망설이시는 것 같던데?”

“그건 그런 게 아니라…….”

“예?”

각오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이송백이 돌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혹시 살아서 나가기라도 하면, 이 모든 상황을 대사형께 어찌 설명드려야 할지…….”

“와…….”

“소름.”

“나 같으면 탈문한다.”

“사숙은 벌써 했잖아요.”

“시끄러워!”

오검은 경계의 자세를 취한 채로 이송백에게 깔끔한 애도를 전했다.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진금룡을 상상하니 당장 이곳에 있는 그들조차 오금이 저릴 판이었다.

“아미타불. 다 업보려니 생각하시지요.”

“……그쪽 스님은 정말 불자 맞습니까?”

이송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검을 다잡았다.

“그래도 설마 정파랑 싸우게 될 줄은…….”

바로 그 순간.

“오오오오!”

콰아아아아아아아!

일호신개에게서 가공할 기세의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풍영신개에게로 날아들었다. 풍영신개의 낯빛이 일변했다.

“거, 성격도 급하지.”

파아아아아앗!

대전을 쪼갤 듯한 섬광이 날아들던 장력을 두 쪽으로 갈랐다.

탁.

순식간에 돌진하여 풍영신개를 노리던 권력을 갈라 버린 청명이 피식 웃으며 일호신개를 보았다.

“성격만 보면 사파 놈들이 형님 하겠네.”

“화산검협!”

“방주를 죽이고 싶으면 나부터 죽여 봐.”

청명이 손에 든 암매검을 까딱이며 일호신개를 가리켰다.

“네 실력으로 그게 가능하다면.”

“건방진…….”

일호신개가 이를 갈아붙였다.

“오냐! 내 오늘 네게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알려 주마.”

“아아. 내가 너보다는 잘 알걸.”

“놈!”

“사실을 말해 줘도 화를 내네. 여하튼 거지새끼들은.”

청명이 혀를 차자, 풍영신개가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심하십시오, 검협. 사형은 강합니다.”

“설마 그거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야?”

“……죄송합니다. 제가 건방졌습니다.”

“농담을 못 하겠네.”

청명이 피식 웃어 버렸다. 이놈이랑 친해지기는 그른 것 같다.

예전에는 이게 너무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지금은 이런 반응이 어색했다. 하도 타박하는 놈들이 주변에 많아서 그런가.

“청명아! 온다!”

“알아!”

개방의 장로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개방은 수의 묘리를 가장 잘 살리는 문파다. 다수라는 이점을 지닌 개방의 장로들은 절대 수월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 봐야 거지새끼들!”

청명의 입에서 벼락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쓸어 버려!”

“으라차아아아아!”

청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걸이 가장 먼저 한 줄기의 빛살이 되어 장로들에게로 파고들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일행들이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장로들에게로 뛰어들었다.

“어엇?”

“이, 이놈들!”

개방 장로들의 얼굴에 순간 당황이 어렸다. 설마 소수인 그들이 뭉쳐서 방어하는 대신 이렇게 먼저 파고들며 공격해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크아아앗!”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조걸의 쾌검이 개방 장로의 어깻죽지를 단번에 뚫었다. 장로가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이 대전의 분위기를 단번에 뒤바꾸었다.

“이놈이!”

순식간에 조걸의 좌우를 점한 장로들이 그의 양 옆구리에 쌍장을 날렸다. 하지만 그 장력은 뒤이어 날아든 두 자루의 검이 여지없이 막아 냈다.

한 자루는 윤종의 검, 그리고 또 한 자루는 다름 아닌 이송백의 검이었다.

이송백은 날아드는 개방 장로의 장력을 단번에 쳐 내고는 안색을 굳혔다. 장력에 실린 내력이 무척 강했다.

“조심…….”

하지만 이송백이 이를 조심하라는 의도를 전하기도 전에 조걸이 다시 앞으로 쇄도하며 십여 개의 검영을 뿜었다.

“아아아악!”

“조심해라! 애송이의 검이 아니다!”

실로 빠르고 날카로운 검기에 장로들이 주춤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화산의 제자들은 이리처럼 상대를 몰아붙였다.

“단번에 몰아쳐라!”

붉은 검기가 당황한 장로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 살기 등등한 검기에, 장로들은 한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핼쑥해졌다.

“피해라아아아아!”

콰아아아앙!

귀를 먹먹하게 하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오검의 검이 만들어 낸 궤적을 따라 개방 장로들의 피가 흩뿌려졌다.

“……이러니 사파 소리를 듣지.”

청명이 고래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핏 보면 정말 개방 총단을 습격한 사파 놈들 같지 않은가. 그리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살기 등등한 검이다.

“하긴…… 그래야 화산이지.”

히죽 웃은 청명은 아직 이 전투에 완전히 참여하지 않고 있는 한 사람을 응시했다.

“어차피 방주만 잡으면 끝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

“그런데 이거 어쩌나? 그건 우리도 마찬가진데. 너만 뒈지면 끝날 일 아닌가? 그 성격에 그다음 방주를 정해 둔 것도 아닐 텐데?”

일호신개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놈이…….”

“대가리만 잡으면 된다, 이거지?”

청명이 검을 돌려 역수로 잡았다.

“걱정하지 마. 거지라도 정파는 정파니까 깔끔하게 베어 줄게. 내가 이래 봬도 차별대우가 확실한 사람이거든?”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니까 얼른 끝내자고.”

파아아앗!

청명이 단번에 거리를 좁히며 쇄도했다. 그의 손에 들린 암향매화검에 노을빛 강기가 휘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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