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3화. 내가 누구죠? (3)
일호신개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미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으며, 이 이상의 변수 같은 건 없을 터. 여기서 그가 어떻게 굴든 방주 자리는 결국 그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일호신개는 근육이 뻣뻣해질 만큼 잔뜩 긴장해 있었다.
개방의 방주 자리가 그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하여 본개(本丐)는 차기 개방의 방주 자리에…….”
잠시 말을 멈추고 이 자리에 배석한 모두를 돌아보았다. 확신이 서린 강렬한 눈빛이었다.
“본개가 올라야 한다고 여기는 바요.”
몇몇 장로들이 움찔했다.
일호신개가 스스로 방주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그에 대한 호오는 접어 두고라도 그가 원하는 바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몇몇 장로가 이토록 당황한 이유는, 이 모든 과정이 지나치게 노골적이기 때문이었다.
추면개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추대받는 시늉이라도 할 것이지.’
이미 개방은 일호신개가 장악한 상태다. 다른 장로 몇을 적당히 움직여 방주로 추대하게끔 하고, 일호신개는 어쩔 수 없이 그 의견을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호신개는 그 간단한 과정조차 불필요하다는 듯 제 입으로 방주 자리를 운운하고 있다. 더는 눈치를 볼 이가 개방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일호신개가 다시 한번 날카로운 시선으로 모두를 훑어보았다.
“이견 있으신 분은 앞으로 나와 말씀하시오.”
묵직한 침묵이 대전 내에 고였다. 노상 시끄러운 거지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정적이었다.
일호신개의 두 눈에 득의의 빛이 스쳤다.
거지들이란 기본적으로 말이 많고 그만큼 불만도 많은 이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의견을 이야기할 틈을 준다면, 일이 지지부진해지기 마련이다.
이럴 때는 다소 위압적이라며 불만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이 옳다. 방주 자리에만 오를 수 있다면, 불만쯤이야 언제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으니까.
“이견 없으시오?”
“저는 없습니다.”
“일호개 장로 외에 달리 방주가 될 이는 없어 보입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당연히 그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장로님이 아니시라면 누가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서 개방을 이끌겠습니까?”
일호신개에게 포섭된 지 오래인 자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을 모았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는 이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젠 분위기를 돌이킬 수도 없어진 뒤였다. 숱한 거지들이 일호신개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는 이가 큰 힘을 틀어쥐었을 때, 자기 자신이 가장 옳다고 확신하는 이가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직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일호신개는 올라가려는 제 입꼬리를 살짝 주무르고는 다시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이는 없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일호신개가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퉁명한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방주를 이리 선출해도 되는 것이오?”
참다못한 추면개가 입을 열고 만 것이다. 일호신개가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몰골이 추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호신개가 거지꼴임에도 범을 연상케 하는 것에 비하면 괴이할 정도로 초라해 보였다.
일호신개가 곁눈질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어찌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오?”
“개방의 율법에, 방주가 후계를 정하지 못하고 급사했을 땐 차기 방주를 정하는 방법이…….”
“당연히 있소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적어도 반년의 시간이 소요되오.”
추면개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장로께서는 이런 상황에 방주 자리를 반년이나 비워 두는 것이 진정 옳다고 여기시오? 혹 방주가 없는 상황에서 개방이 공격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소?”
추면개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패련의 발호와 사천의 패퇴는 너무도 강력한 이유다. 그간 정해 둔 모든 법칙을 뭉개 버릴 만큼.
“나 역시 이런 방법을 취하고 싶지 않소. 정당하게 방주를 선출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소. 하지만 그 정당성에 목을 매다가 개방이 입어야 할 피해는 대체 누가 책임을 질 것이오!”
추면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누가 들으면 이런 상황 때문에 외려 일호신개가 피해를 감수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방식은 어쩔 수 없소. 중요한 건 방식이 아니라 사람이겠지. 하면, 장로께서는 개방의 방주로 따로 추천할 이가 있으시오?”
이 질문 역시 날카로웠다. 지금껏 추면개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니까.
일호신개가 방주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이는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추면개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말에 힘이 실리지 않는 것이다.
“……아니외다.”
결국 힘에 부침을 느낀 추면개가 물러났다. 일호신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아쉬움이 많소이다. 하지만 해야 할 일들을 고려했을 때,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소. 장로들께서도 본개의 고충을 이해해 주실 것이라 믿소.”
서늘한 시선이 모두를 다시 훑었다. 이제 그와 눈을 마주치는 이는 없었다. 사소한 다툼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이 대전이 그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진 것이다.
‘마침내.’
일호신개는 소매에 감춰진 손을 꽉 틀어쥐었다. 이제 마침내 그가 개방의 방주가 되는 것이다.
“더 이견이 없다면, 장로회의 의견이 일치된 것이니…….”
일호신개의 입에서 마침내 그 말이 흘러나온다. 얼마나 오랜 시간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개방의 장로 일호신개를 개방의…….”
하지만 또 하나의 변수가 그를 가로막았다. 무언가를 참는 듯 말을 이어 가던 일호신개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무슨 소란이냐!”
개방의 방주가 결정되는 순간이다. 아무리 약식으로 처리되는 일이라지만, 이 순간만큼은 경건해야 한다. 그런데 대전 밖에서 자꾸 웅성웅성 들려오는 소음이 그의 날카로운 신경을 한껏 건드리고 말았다.
“밖에 무슨 일……!”
그 순간, 쿵 소리와 함께 대전으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렸다. 한 무리가 내부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일호신개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외인?”
이곳에 외인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가? 밖에 있던 방도들은 대체 뭘 했기에 개방의 방주가 결정되는 이런 중요한 자리에 외인을 들인다는 말인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으며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지만, 일호신개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쌓아 온 연륜으로 터득한 인내였다.
하지만 외인들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에는 표정을 차마 가다듬지 못했다. 안에 들어온 외인 무리의 선두에 선 자. 정확히는 그자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이 눈에 익었다.
어째서 저 문양을 가슴에 새긴 이들이 이곳에 있는가?
저벅. 저벅.
부지불식간에 대전의 가운데까지 들어온 이가 일호신개를 한번 바라보더니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헌앙하고 단정한 기세가 순간적으로 이곳에 모인 개방도들을 압도하며 퍼져 나갔다.
“저자는…….”
장로들이 그를 알아보기도 전에 사내가 양손을 모아 사방으로 포권 했다.
“대 화산파의 장문대리 백천입니다. 귀 방의 중요한 행사에 본문을 초청해 주심에,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일호신개의 속이 크게 뒤틀렸다. 그의 말과 행동 모든 것이 거슬렸다.
개방이 화산을 초청했다는 말.
사실 딱히 틀린 건 아니었다. 천하 대문파 장문들에게 초청장을 보내기는 했다. 그들이 결코 제때 도착하지 못할 거라는 계산하에 말이다. 하지만 저자가 ‘장문대리’라는 직책으로 대뜸 참석해 버렸다.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백천이 취한 행동도 문제였다.
일호신개가 단상 위에 서 있는 것을 뻔히 보았음에도 백천은 좌우에 선 장로들에게 포권 했다.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단상 위에 선 일호신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일호신개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지금 저 백천이라는 작자가 정말 화산의 장문대리의 신분으로 이곳에 방문한 것이라면, 대외적으로는 개방의 행사를 축하해 주기 위한 사절이나 마찬가지다.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다.
일호신개는 노기를 억누르고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화산에서 이리 사람을 보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급한 일정이라 기대도 못 하였는데, 화산의 성의에 개방을 대표하여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마침 운 좋게 인근을 지나다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화산의 장문인을 대신하여 개방에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감사하외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말투와 몸짓이었다. 그것마저 속을 벅벅 긁어 댔지만, 일호신개는 애써 차분히 생각했다.
‘예상외의 일이지만, 그래 봤자다.’
물론 이곳에 외인을 들일 계획 따위는 없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만일 저들이 조금 더 일찍 도착했다면 적잖이 껄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모든 합의를 마친 상태이지 않은가.
생각하기에 따라선 오히려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장로들이 입을 모아 그를 방주로 인정하는 광경을 다름 아닌 ‘화산파’가 공증해 줄 터이니.
‘선자불래라. 좋은 의도로 온 것은 아니겠지만,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손님들께 자리를 내어 드려라, 어서.”
“예! 장로님!”
구석에 있던 일대제자들이 잽싸게 자리를 만들고 화산 사람들을 안내했다.
“이쪽은……. 어? 조, 종남?”
“……그게…….”
한 거지가 화들짝 놀라자 이송백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개방도들의 얼굴도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화산 놈들이 개방의 행사에 참석하는데, 그 와중에 종남 사람이 있다? 강호를 아예 모르는 놈이 아닌 이상 모두가 놀랄 것이다.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함께 온 일행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축하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아…….”
“저희 일행 중에는 소림 사람도 있는데 새삼스러울 것 있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백천의 뒤로 꽂혔다. 계인 찍힌 반들반들한 머리가 보였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광경이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화산 일행의 자리는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의 경계 쪽에 마련되었다. 개방의 행사다 보니 딱히 의자라고 할 것도 없고 준비된 다과도 없었지만, 그 위치만으로도 대접이 박하다 볼멘소리할 순 없었다.
화산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를 기다리던 일호신개가 짧게 심호흡했다.
아무것도 달라질 건 없다.
그는 이제 개방의 방주 자리에 오를 것이다. 저 화산의 장문대리를 공증인으로 삼아서.
“잠시 지체되었소. 그럼 아까 합의된 바대로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소.”
몇몇 장로들은 슬쩍 화산 쪽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그들이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이내 체념한 듯 눈을 감아 버렸다.
“하면 장로회의 결과로 신임 방주의 취임…….”
“잠시.”
그때, 백천이 나직이 입을 열며 끼어들었다.
일호신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장문대리께서는 하실 말이 있으시오? 다만 이건 본 방의 행사임을 기억하셔야 할 것이오.”
단순히 참석자인 너희에게 의결권은 없다는 뜻이었다.
백천은 알고 있다는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확인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서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화산의 뜻이 됩니다. 그러니 매사 확실한 것이 좋겠지요.”
“무엇을 확인한다는 말이오?”
“개방이 신임 방주를 선출하는 까닭이 이전 방주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입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이건 예의가 아니지요.”
“예의?”
백천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순간에 굳이 따지고 싶지 않으나, 저도 도인이다 보니 최소한의 절차는 지켜야 합니다. 선대 방주께서 비명에 승하하셨다면, 도인의 도리로 유명을 달리하신 분께 간단한 제를 올려야 할 터.”
백천이 일호신개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유명을 달리하신 선대 방주를 모신 곳이 어디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