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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02화 (1,503/1,567)

1502화. 내가 누구죠? (2)

뒷짐을 진 초로의 노인이 창밖으로 뜨는 해를 바라보았다.

밤을 꼬박 새우고 맞는 아침의 해. 누구에게든 기분 좋을 리 없는 해였지만, 새로운 아침을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은 그저 기껍기만 했다.

‘오늘이로군.’

드디어 오늘이다.

그의 자리를 되찾는 날. 그리고 흔들릴 대로 흔들린 개방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날.

그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날 말이다.

“……이제 개방도 새 시대를 맞게 되겠지.”

노인.

군구일호 일호신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준비는 끝마쳤는가?”

총단으로 모여드는 이들의 행렬을 바라보던 일호신개의 말에 앞에 시립한 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형. 완벽합니다. 아니…….”

장로 중 하나가 일호신개를 보며 고소를 머금는다.

“이제는 용두방주라 불러 드려야 합니까?”

“경거망동하지 마라.”

일호신개가 타박하듯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목소리와 다르게 그리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사소한 방심이 대사를 그르치는 법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일호신개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총단으로 들어오는 전서구들은 모두 관리하고 있느냐?”

“예. 염려 마십시오. 어떤 전서도 사형께서 방주의 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총단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일호신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궁지에 몰린 풍영신개가 쓸 수 있는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일호신개가 풍영신개의 입장이었다면, 신물로 인을 찍은 전서를 보내 그의 생존을 증명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게 진작 총단에도 신경을 썼어야지.’

그 전서는 결코 열리지 못한다. 이미 총단은 일호신개가 장악한 상태니까. 아니, 설령 그 전서가 열린다 해도 이곳의 누구도 그 전서를 진품이라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진작 이랬으면 됐을 일을 너무 멀리 돌아왔구나.”

“그게 어찌 사형의 잘못이겠습니까? 보통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이지요.”

일호신개가 짧게 혀를 찼다.

“그런데 사형, 혹시…… 방주가 직접 총단에 나타나면 어찌하실 셈입니까?”

“그럴 일은 없다.”

일호신개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무흔 그놈이 그럴 배짱이 있는 이였다면, 애초에 상황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 역시 손에 피를 묻힐 각오를 해야겠지.”

피라는 말에 장로의 얼굴이 살짝 굳어진다. 하나 그 ‘피’가 의미하는 바를 알면서도 장로는 딱히 일호신개를 말리려 들지 않았다. 이건 이미 정해진 일이고, 그저 다시 한번 확인한 것에 불과하니까.

“그래도 그럴 일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 역시 나의 사제니까.”

작게 중얼거린 일호신개가 표정을 정비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초청장들은 보냈느냐?”

“예. 도착할 시기를 잘 맞춰 보내 두었습니다. 초청장은 받겠지만, 참석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

일호신개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깔끔한 일 처리가 마음에 든다는 듯.

일반적으로 장문의 위(位)를 위양하는 일은 문파의 커다란 대사다. 그렇기에 천하에 이름 높은 대문파에서는 명망 높은 이를 참석시켜 자리를 빛내려 드는 법이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일호신개 역시 알고 있다. 그가 풍영신개의 뒤를 잇는다는 게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상황인지. 굳이 이런 자리에 타 문파의 사람을 초청해 문제를 초래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개봉에 들어와 있는 이들은?”

“여러 문파 사람들이 들어와 있으나, 각 문의 장문인이나 그에 맞는 격을 가진 이가 아니면 객으로 받지 않겠다고 전해 두었습니다. 지금 개봉 내에는 그에 걸맞은 이가 없으니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호신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잘한 중소문파의 장문인들은 개봉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이들은 감히 총단에 들겠다 할 수 없을 테니 문제가 없을 것이다.

“좋구나.”

“감사합니다. 사형.”

일호신개가 자꾸만 지어지려는 미소를 억눌렀다.

대외적으로 그는 사제의 비명횡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방주의 자리를 맡는 이가 되어야 한다. 이곳에 그와 그의 사제밖에 없다고 해도 내심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다.

‘완벽해야 한다.’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 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적어도 방주의 자리가 그에게 완벽하게 떨어지기 전에는 말이다.

“사형.”

“음?”

“준비가 되었다 합니다. 이제 가시지요.”

“그래.”

일호신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가 보무도 당당하게 총단의 대전을 향해 발을 옮겼다.

* * *

괴이한 광경이었다.

거대한 대전. 하지만 낡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대전.

커다란 건물의 한 층을 모조리 비워 둔, 크기만 클 뿐 실용성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황량한 대전에 누더기를 걸친 더러운 거지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일견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광경이나, 이 광경을 보는 누구도 감히 그 입가에 비웃음을 올리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이 대전을 채우고 있는 거지들의 정체가 다름 아닌 개방의 장로들과 일대제자임을 아는 한은.

“……반쯤은 모인 것 같군.”

“반이 넘었으니 절차는 맞췄다지만, 원래는 좀 더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방주가 급사한 상황이네. 느긋하게 천하에 퍼져 있는 거지 놈들을 모을 시간이 없어.”

“하기야…….”

개방의 장로들은 총단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곳에 없는 장로 중 태반은 개방조차 그 종적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굳이 찾으려면 못 찾을 것도 없겠지만, 지금은 그들을 찾아 모을 만큼 여유가 넘치는 상황이 아니었다.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거지들이 슬쩍 아직 비어 있는 상석 쪽을 바라본다. 상석이라 해 봐야 평평한 대전에 단 하나를 설치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단에 이들에게 주는 의미는 절대 작지 않았다.

“결국은 이리되는군요.”

“……그간 방주께서 과하긴 하셨지.”

개방 장로 중 하나인 추면개(醜面丐)가 쯧하고 혀를 찼다.

“방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으니.”

“몸이 아파 그런 것을 어쩌겠습니까?”

“그럼 얼른 후계라도 지정했어야지. 그리 아픈 사람이 후개(後丐)조차 만들지 않는 게 어디 옳은 일인가? 어차피 이리될 일이었네.”

추면개가 다시 한번 짧게 혀를 찼다.

그나마 그는 방주를 옹호하는 쪽이다. 다른 장로들이 방주에게 가진 불만은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방주의 사형을 차기 방주 자리에 앉히는 것에 동의하겠는가?

“그래도 자오개 사형이 없는 게 다행입니다. 그분이 계셨으면 난리가 났을 텐데…….”

“……이미 탈방(脫幇)한 양반이 뭘 어쩌겠어? 총단에 들어오지 못할 텐데.”

추면개가 짧게 혀를 찼다.

방주가 될 일호신개와 가장 극렬하게 대립하던 이가 바로 자오개다. 그가 저 장강에 머무르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이리 급히 흐르지는 않았을 텐데.

‘어쩌자고 제 손발을 자르셨소, 방주?’

자오개가 개방을 나가지 못하게 막고 그를 총단에만 묶어 뒀더라면, 적어도 그의 사후 일호신개가 모든 권력을 가져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배는 떠난 뒤였다. 그저 어리석은 방주를 원망할 뿐.

“새 방주께서 잘해 주시길 바라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어설픈 후개보다 일호신개 대사형이 훨씬 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 생각하느냐?”

“사형의 생각은 다르십니까? 그래도 군구일호 아닙니까?”

“……호랑이가 개의 생각을 어찌 알겠느냐?”

“예?”

“아니다.”

추면개가 손을 휙 내저었다.

군구일호, 좋은 별호다. 저 일호신개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하지만 그럴 거면 개방에 들지 말았어야지.’

개방은 뛰어난 이가 이끌어야 하는 곳이 아니다. 더 많은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이와 그 가슴에 뜨거운 피를 지닌 이가 이끌어야 하는 곳이다.

‘망조가 들겠구나.’

추면개가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이제 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때.

쿵.

대전 한쪽의 문이 강하게 열리더니 몇몇 거지가 위풍당당하게 대전으로 걸어 들어왔다.

일호신개와 그를 따르는 핵심 장로들.

대전의 벽을 따라 서 있던 개방의 거지들의 심각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환호를 담아, 그리고 누군가는 우려를 담아.

그러나 일호신개는 그 누구의 시선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당당히 그리 높지 않은 단 위에 섰다.

꿈틀.

추면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저 자리에 설 수 있는 건 오직 개방의 방주뿐. 그게 모두가 낮은 곳을 지향하는 개방의 방도들이 방주에게만 준 권위였다.

한데 지금 일호신개는 아직 방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음에도 제 발로 저 위에 선 것이다.

추면개가 잘근잘근 제 입술을 씹어 댈 때, 단상 위에 선 일호신개가 입을 열었다.

“모두 들으셨겠지만, 어젯밤 방주께서 승하하셨다는 첩보가 들어왔소.”

거지들이 숨을 죽였다.

“더욱 큰 문제는 방주의 시신에서 방의 신물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외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방주와 신물을 모두 잃었소.”

그 말을 들은 장로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시, 신물을 분실했단 말입니까?”

“그렇소.”

“아니. 어찌 그런…….”

모두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전에 일호신개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방주께서 신물을 숨기시고 승하하셨으니, 그 신물을 찾을 도리가 없소. 심지어 확인 결과 방주께서는 신물의 위치를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으셨다 하오.”

몇몇 장로들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신물이란 한 문파를 상징하는 것. 절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닐 터인데, 어찌 한 방의 방주라는 이가 그리 신물을 소홀히 다룰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 어찌해야…….”

“아시겠지만!”

일호신개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웅성거리는 이들을 짓눌렀다.

“지금 강호는 더없이 혼란한 상황이오. 방주의 자리는 단 하루도 비워 둘 수 없소. 신물을 분실한 지금은 더더욱!”

장로들이 숨을 죽였다.

모든 시선이 일호신개에게 집중되어 있다.

“하여 나는 승하한 방주 대신, 개방 장로의 신분으로 대회의를 열어 차기 방주를 정하려 하오. 바로 이 자리에서!”

일호신개가 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다음 방주가 될 이는 다가온 환란 속에서 개방을 이끌 수 있는 이가 되어야 하고, 누구보다 뛰어난 이가 되어야 하오. 또한! 전대 방주가 망가뜨린 개방을 원래의 개방으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 있는 이여야 함이 분명하오!”

“그렇습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짜여진 듯 터져 나오는 함성을 들은 추면개가 또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은 이리 흘러가는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탄식이 함성 속에 잦아드는 걸 느낀 추면개가 외면하듯 눈을 감아 버렸다.

* * *

“똑바로 지켜.”

“에이. 누가 온다고 그러십니까? 거지새끼들이 저리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치도곤을 면치 못할 것이다. 딱 한 시진만 정신 차리면 된다.”

“별일 없을 거라니까 그러시네. 다들 지금 겁을 먹어서 얼씬도 안 하는 게 안 보이십니까? 애초에 장문인 급이 아니면 안 받는다고 전달을 했는데, 감히 누가 얼씬거리겠습……. 응?”

총단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이가 심드렁하게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끔뻑였다. 저 앞쪽에서 일련의 무리가 이쪽으로 빠르게 접근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구지?”

“일단 막아라.”

거지들이 허리춤에서 타구봉을 뽑아 들어 문 앞을 막아서듯 교차시켰다.

“멈춰라!”

달려오던 이들이 그들의 목소리에 정문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돌아가시오. 지금 개방은 방의 대행사를 치르는 중이요. 한 문파의 장문인 위에 걸맞은 이가 아니면 들어가실 수 없소!”

그 말에 선두에 선 이가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그렇다면 문을 열어 주십시오.”

“알았으면 그만……. 응? 지금 뭐라 하셨소?”

선두에 선 이가 제 허리에 찬 검을 검집째 들어 앞으로 내민다. 그리고는 그 검을 잡은 손을 모아 단호히 포권했다.

“대화산파의 장문대리 백천. 개방의 행사를 축하드리기 위해 방문 드렸으니, 이 사실을 전하시고 문을 열어 주시길 요청합니다.”

“어……?”

그 말에 거지들의 눈이 휘둥그레 떠진다.

백천? 그 화산…….

“억!”

그제야 청년의 가슴에 새겨진 매화 문양을 발견한 거지들은 크게 경악했다.

“배, 백천?”

“화산정검? 백천?”

경악한 거지들을 보며 백천이 담담히 말했다.

“장문대리라면 장문인의 위에 걸맞은 이로 부족함 없을 것입니다.”

“그, 그게…….”

거지들이 당황하여 서로를 돌아본다. 이걸 대체 어떻게…….

“문제가 있습니까?”

“자. 잠시 기다리십시오. 기준이…….”

“기준?”

백천이 빤히 그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기준은 둘. 장문인에 준하는 이일 것. 그리고 그 속한 문파가 대문파에 걸맞을 것.”

“…….”

“장문대리의 자리가 장문인의 위에 준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니, 지금 여러분께서는 화산이 감히 대문파에 걸맞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 말에 개방도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대문파.

정확히 선을 그어 분류할 수 없는 단어였지만, 당금 천하의 누구도 이제는 감히 화산을 작은 문파라 칭할 수 없다. 그곳이 개방이라면 더더욱.

여기서 말 한마디만 잘못했다가는 심각하기 짝이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고작해야 문을 지키는 이들이 그만한 일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리 생각하시는 게 아니라면.”

그 입가에 근사한 미소를 머금은 백천이 햇살을 등진 채 부드럽게 말했다.

“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지, 지금 열겠습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린 거지들이 홀린 듯이 문을 열었다. 그 광경을 본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을 옮겼다.

“들어가자.”

“예!”

백천이 내딛는 걸음이 낡은 개방의 총단을 무겁게 울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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