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화. 내가 누구죠? (1)
상황이 이리된 이상,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한자리에 모두 모이자마자 오검이 한마디씩 했다.
“안 돌아가셨는데?”
“그러게요?”
“유령은 아니죠?”
“애초에 좀 귀신같이 생기시긴 했는데.”
천상루주, 그러니까 풍영신개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 일행에 대한 정보와 소문은 질리도록 들었지만, 글로만 보던 것과 실제로 겪는 건 어마어마하게 달랐다.
그리고…….
“와, 왕거지?”
“…….”
“진짜 당신이 왕거지입니까? 진짜?”
풍영신개가 한숨을 내쉬었다. 홍대광은 내내 입을 쩍 벌린 채 같은 말만 반복 중이었다.
“아, 아니, 그새 회춘을 한 것도 아닐 텐데, 뭔 새파랗게 젊은 놈이……. 나보고 지금 이걸 믿으라고?”
“대광.”
“옙! ……엑? 뭐야, 방금?”
“이제 믿겠느냐?”
홍대광의 얼굴이 정말 귀신이라도 본 듯 파랗게 질렸다. 조금 전 풍영신개가 낸 목소리는 정말로 그가 알고 있던 방주의 목소리와 같았다.
이리되니 더 이상 부인할 수가 없었다. 외양은 완전히 다르지만, 이 사람은 정말 개방의 방주 풍영신개다.
“허허…….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이해는 바라지 않는다. 다만 필요한 일이었음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홍대광이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말했다.
“왕거지.”
그의 눈빛을 보며 풍영신개도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
선의에 의한 행동이었다고는 하나,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악한 짓이었다고 비난한다면 그 또한 풍영신개가 감당할 일이었다. 보나 마나 모진 말이 쏟아질…….
“이놈들한테 제가 차기 방주감은 아니라고 한 게 사실입니까?”
“…….”
“믿었는데! 나는 그래도 믿었는데!”
순간 할 말을 잃은 풍영신개는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지르며 쓸었다. 어쩌다 저런 걸 방주 후보에 올려서는…….
“아니, 내가 동냥해 온 귀한 거 찔러 드릴 때는 좋다고 받으셔 놓고! 뒤로는 그렇게 딴소리를 하고 다녀요? 이거 아주 사기죄로 관아……. 꽥!”
청명이 짜증 난다는 듯 홍대광의 얼굴을 잡아 뒤로 획 밀쳤다.
“바빠 죽겠는데, 뭔 거지새끼들이 회포를 풀고 자빠졌어.”
“야, 인마! 이건 내 인생이 걸린 중요한 일이야!”
“거지 인생이 뭐가 중요한데? 잘 풀려 봐야 거진데!”
“어?”
듣고 보니 그도 맞는 말인데…….
그때 백천이 쓴웃음을 흘리며 풍영신개에게 말했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들었네.”
풍영신개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저들에게 실체가 없는 사람이라네. 어디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도 할 수 없는 사람이란 의미지. 내가 죽었다고 저들이 공공연히 발표해 버리면, 나는 정말 죽은 사람이 되는 걸세.”
당소소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데도요?”
“……그걸 누가 증명해 주겠는가? 실체가 없는데.”
“네?”
진실을 아는 모두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네들이 내가 방주임을 증명한다고 해서,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아니죠.”
“그치, 솔직히 화산 놈 중 몇몇은 나도 안 믿어.”
“……걸아. 그게 네가 할 말이냐?”
백천이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럼 저들이 이런 수를 썼는데도 방주께서는 대항할 방법이 없다는 겁니까?”
“대항할 방법이야 당연히 있네.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신물을 가진 채로 저들의 한중간에 나타나는 거지.”
“아, 그렇네요. 사람은 부정해도 신물은 부정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저들이 진짜 노리는 바겠지.”
“……예?”
“나를 죽이고 신물을 가져가면 되니까. 그리되면 신물의 권위를 통해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방주가 될 수 있을 걸세. 누구도 이견을 달지 못하도록 말이네.”
백천의 얼굴이 더없이 심각해졌다.
풍영신개는 자신을 철저하게 감춰 왔다. 그랬기에 지금과 같은 개방을 만들 수 있었다. 상대는 지금 그 사실을 외려 역으로 이용한 것이고.
“신물을 지닌 이를 공격하는 게 가능합니까? 신물은 문파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소불위의 물건 아닙니까?”
그 말을 들은 풍영신개가 피식 웃었다.
“그럼 자네는 마교도가 화산의 신물을 들고 나타나면 그 앞에 복종할 텐가?”
“그건……!”
당연히 그럴 리 없다. 어떻게든 죽여서 신물을 회수하려 할 것이다.
“신물이란 애초에 그런 걸세. 적당히 편히 써먹기 좋게 만들어 놓은 상징이지. 정말 위급할 때는 아무 효력도 없는.”
“으음.”
“내가 신물을 들고 나타나는 순간, 저들은 내가 방주를 죽이고 신물을 갈취한 자라고 몰아갈 걸세.”
“노, 노인 모습으로 다시 분장하면요?”
“역용을 했다. 맨얼굴을 보니 방주가 아니다. 뭐 이런 결론이 나겠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네.”
지금껏 풍영신개가 해 온 모든 일이 거꾸로 그의 퇴로를 막아 버린 상황이다.
“사실 나도 이런 수는 생각지 못했네. 사형의 수완이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씁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풍영신개의 중얼거림에 조걸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아니, 그런데 이런 수가 있으면 진즉에 썼으면 됐을 텐데, 왜 하필 지금에 와서……?”
“생각을 못 했던 것이겠지. 아니, 생각했더라도 지금에야 쓸 수 있는 걸세. 평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사람들은 내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를 상세히 알고 싶어 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데 일일이 신경 기울일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거로군요.”
“정확하네.”
하기야, 사패련이 당장 언제 밀고 올라올지 모르는 와중에 와병 중이라던 개방주가 어찌 죽었는지를 누가 굳이 꼬치꼬치 캐물으려 하겠는가?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신물과 방주가 모두 부재한 상황이니…… 대회의를 통해 차기 방주를 선출하려 하겠지. 아마 내일일 걸세.”
“그럼…….”
풍영신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네. 이미 장로들은 일호신개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니, 그가 차기 방주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네.”
“아니…….”
잠자코 있던 윤종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전대 방주의 사형이 차기 방주 자리에 오른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없던 일은 아니네. 정세가 위태위태하면 차기 방주가 자리에 익숙해지고 성장하기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으니, 문파 내 유력자가 임시로 방주를 맡고 상황이 해결된 뒤 후대에 자리를 물려주는 식의 일이 흔했다네.”
“…….”
“지금이 딱 그 위태로운 정세이고.”
백천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찌 이리 공교로울 수 있단 말인가.
풍영신개의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하늘이 그의 방주 자리를 빼앗아 가려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백천이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물었다.
“그럼, 앞으로 어쩌실 셈이십니까?”
그에게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으리란 걸 안다.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풍영신개는 슬쩍 천장 쪽으로 시선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솔직히 모르겠네. 사부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고견을 여쭈었을 테지만, 사부님이 돌아가셨으니 이젠 상의할 사람조차 없군. 외인인 그대들과 이 일을 논의하는 게 지금의 내 신세네.”
“…….”
“그리고 자네들에게는…….”
풍영신개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들, 정확히는 청명을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선대의 유지를 따르려 했지만, 상황이 이리 급박하게 흐를 줄은 저도 예상 못 했습니다. 차라리 저들이 단 하루만 먼저 움직였어도 어찌해 볼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에이. 그게 왜 방주님이 사과할 일이에요.”
의외로 부드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청명답지 않은 그 말에 모두가 놀라 멍하니 시선을 돌렸다.
청명의 눈은 조금도 웃지 않고 있었다. 역시 이내 발작이 시작되었다.
“다 저 노망난 할배가 문제지! 저거 당장 끌어 내려! 시체라도 매질해야……!”
“……하지 말라고, 좀.”
“그래, 그럼 그렇지……. 그만 좀 해…….”
이젠 아주 진력이 나 버린 오검은 놀라지도 않고 맥없이 청명을 붙들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혀를 찬 청명은 이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회의, 언제 열린다고요?”
“개방의 율법에 따르면 장로대회의는 절반 이상의 장로들이 배석한 다음 날 아침 열리게 됩니다. 이미 총단에는 절반 이상의 장로들이 있느니…….”
“내일 아침이군.”
말이 내일 아침이지, 이미 시간은 자정을 한참 넘겼다. 고작해야 몇 시진 내에 개방의 새 방주가 결정 난다는 의미다.
슬그머니 청명의 눈치를 살핀 풍영신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리된 이상 방주의 자리는 지킬 수 없겠지만, 제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제가 개방에 심어 둔 것들로 최대한 도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 말을 들은 청명이 피식 웃었다.
“도울 수 있다고요?”
비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풍영신개는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청명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그로서는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원하는 만큼은 아니겠지만, 정보를 공유하고 개방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조절하는 건 가능할 것입니다.”
“…….”
“애초에 검협께서 이곳에 오신 이유도 그 정도를 손에 넣으려 하신 것이잖습니까.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실망이 크시겠지만, 제가 당신께서 원하셨던 것 이상을 해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만족해 주십시오.”
청명의 입가가 실룩였다.
풍영신개의 말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그가 이곳까지 온 건, 개방의 움직임을 뒤틀고 있는 흑막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그 흑막은 사라졌고, 다른 이가 개방을 이끌게 된다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무슨 말씀이신지?”
뜬금없는 청명의 말에 풍영신개가 의문 어린 목소리로 조심스레 되물었다. 청명의 얼굴은 어느새 차게 굳어 있었다.
“이제는 저 영감도 죽어 버린 이 밀실에서 앞으로 남은 평생 개방의 상황을 살피다가 죽겠다고요?”
“…….”
“아무도 당신이 누군지 모르고, 제대로 된 말조차 나눌 사람이 없는 여기서?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이가 되어 공작이나 펼치겠다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풍영신개는 도통 이해가 안 가는 듯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청명의 말을 이해했다.
“감옥이구나.”
“그렇네요, 사형.”
“……이건 아니야.”
말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선, 풍영신개는 이곳에 영원히 묶여 있어야 한다. 이 호화스러운 전각의 적막한 꼭대기. 그 공간이 그에겐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갇혀 지내다 언젠간 쓸쓸히 죽어 갈 것이다. 이미 오래전 죽은 사람이라는 기이한 존재로, 누구 하나 돌보는 이도 없이.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가 왜 그런 여생을 살아야 하는가?
“저 노망난 영감이 죽기 전에 나한테 부탁 하나를 하더라고요.”
“부탁……을 하셨습니까?”
“네. 당신을 여기서 풀어 달라더군요.”
풍영신개가 순간 크게 움찔했다. 충격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 몇 차례 입을 벙긋거렸으나 결국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청명의 강한 눈빛이 그의 입을 막는 듯했다.
청명이 말했다.
“자신이 제자를 이곳에 가둬 버렸다고 했어요. 나한테 당신을 자유롭게 풀어 주라고 하더라고요. 방주님이 말하시는 걸 듣고 보니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확실히 알겠네요.”
“사부님께서…….”
풍영신개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숨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가 알던 사부라면 당연히 개방을 부탁하는 말을 남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지만 나는 그것도 마음에 안 들어요.”
“……예?”
“당신은 개방의 방주였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방주인 적 없었죠. 뜻은 타인을 따라야 했고, 모습은 숨겨야 했으니까.”
풍영신개는 말없이 경청했다. 이 자리의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만은 아니까. 청명이 지금 어떤 입장에서 이 말을 건네고 있는지.
“그러니까, 스스로 원하는 자유를 얻기 전에 한 번은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서게 해 줄게요. 당신이 원래 서야 했던 온당한 자리에.”
풍영신개의 손끝이 떨렸다.
바라마지 않았다. 아니, 감히 바라지도 못했다. 평생을 어둠 속에서만 살았기에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청명은 그 자유를 말하고 있다.
“그럴 각오가 되어 있으세요?”
풍영신개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감히 제가…….”
“그럴 수 있냐고?”
청명이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내가 누구죠?”
순간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풍영신개는 눈을 감았다.
그래. 이 사람은…….
그가 해야 할 대답은 정해졌다.
“……저는, 바랍니다. 바라고 원합니다. 검협이시여.”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계획이 좀 틀어지기는 했지만.”
그의 시선이 창 너머에 있는 개방의 총단 쪽으로 향했다.
“결과는 어차피 같을 텐데. 이왕 이리된 거 제대로 한번 엎어 보자고.”
청명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스쳤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고요한 개봉에 운명의 아침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