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화.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5)
“사형. 소림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낡고 색이 바랜 커다란 책상머리에 앉아 있던 노인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장년의 거지가 내민 서찰이 눈앞에 있다.
붉은색 첩지에 명확하게 써진, ‘용두방주 친전’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개방의 방주에게 보내는 첩지. 다시 말해, 오직 개방의 방주만이 열어 볼 수 있는 서찰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서찰을 내민 이도, 그걸 바라보는 노인도 껄끄러운 기색일랑 없었다. 노인이 결코 개방의 방주는 아닐진대 말이다.
“거기 두거라.”
“긴급이라고…….”
“어차피 뻔한 소리일 것이다. 이제 슬슬 줄을 명확히 서라는 소리겠지.”
장년의 거지는 말없이 책상 한쪽에 서찰을 내려놓았다. 너무 구석진 곳도, 너무 중앙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였다.
서찰을 힐끔 바라본 노인의 눈빛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법정…….’
그가 개방의 상황을 모를 리는 없다. 그럼에도 굳이 용두방주 친전이라는 글귀를 넣은 서찰을 보내는 이유야 뻔하다.
‘하찮은 짓을 하는군.’
노인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스쳤다. 진짜로 마음에 안 드는 건, 불자답지 않은 법정의 도발이 아니다. 그 하찮은 도발에 은근히 열을 내는 자신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신물에 대한 소식은 있느냐?”
“아직…….”
노인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슬며시 일그러졌다.
“늦구나. 개방이 이토록 무능해지다니.”
“사형.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저희가 찾고 있는 물건의 특성상…… 거지들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다.
개방의 거지들이 개방의 신물을 찾으려 동분서주한다는 말이 퍼지는 순간, 전 강호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게 분명하다.
신물이란 그런 것이다. 결코 잃어서도, 빼앗겨서도 안 되는.
“더구나, 그게…….”
“됐다. 알고 있다.”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말허리를 끊어 버리는 노인의 언성이 조금 높았다. 그 신물을 숨긴 이가 다름 아닌 개방의 방주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단순히 웃음거리가 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란 말이었겠지.
노인이 언짢은 얼굴로 침묵하자 장년의 거지가 책상에 놓인 서찰을 곁눈질했다.
“이번에도 답을 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
“소림이 재촉해 오는 주기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개방도 더는 발을 빼고 있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물론 소림과 법정 역시 늑대나 다름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힘이 있는 늑대 아닙니까?”
“…….”
“혹 이렇게 망설이는 와중에 방주가 어리석은 짓이라도 저지른다면, 자칫 개방 전체가…….”
“언제부터 이리 말이 많아졌느냐?”
“……죄송합니다, 사형.”
순간적으로 노인이 뿜어낸 기세에 장년의 거지가 움찔하며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노인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한가득 쌓여 있다.
방주만이 쓸 수 있는 집무실, 그리고 방주만이 결재 가능한 명령서들. 현재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건 방주가 아닌 노인, 바로 일호신개였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었음에도 일호신개의 표정은 밝아질 줄 몰랐다.
“후우.”
이미 개방은 거의 그의 손에 들어왔다. 사제들은 하나같이 그를 따르고 있고, 분타주들 역시 행적이 묘연한 방주보다는 그가 개방을 이끄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책상에 움푹 파인 흔적을 가만히 손끝으로 더듬었다. 개방의 방주를 상징하는 신물이 있어야 할 자리를.
“나라고 당장 방주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신물도, 방주의 종적도 찾아내지 못한 상황에서는 일을 저지를 수 없다.”
“이미 개방은 사형을 따르고 있습니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하지 않는 게 아니라, 반대하지 못하는 거겠지. 놈이 방주의 자리에 오를 때 내가 반대하지 못했던 것처럼.”
“…….”
“정당한 과정과 절차를 치르지 못한 권력은 반드시 문제를 낳는다. 같은 짓을 반복할 수는 없지.”
“그렇지만, 사형. 시간이 없습니다. 저 사패련이 다시 움직이기 전에 명령 체계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안다.”
일호신개는 제 눈가를 천천히 주물렀다.
그가 원하는 건 둘 중 하나다. 그에게 방주 자리를 물려줄 수 있는 지금의 방주. 혹은 그와 같은 권위를 지닌 개방의 신물.
일호신개가 그중 신물에 목매는 이유는 너무도 간단했다.
개방의 방주를 찾아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무흔개.”
개방의 방주 풍영신개는 항상 역용을 하고 다닌다.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풍영신개의 역용술이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니까. 무위가 높고 눈썰미가 좋은 이라면 그가 역용을 했다는 걸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풍영신개는 늘 역용을 하고 다녔다. 비웃음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꿋꿋하게.
그리고 어느 날, 일호신개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풍영신개의 진짜 얼굴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사실이다. 그가 풍영신개의 본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게 무려 사십 년 전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 그때 본 얼굴이 진짜 얼굴이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에 와서 무슨 수로 풍영신개의 얼굴을 알아보겠는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일호신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개방 내에 풍영신개의 본 얼굴을 아는 이가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놈은 수십 년간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겨 온 것이다. 자신이 방주 자리에 앉아 있는 개방에조차 말이다.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사람이 어떻게 십 년도 아니고 사십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타인들에게 자신을 숨길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그가 방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연륜도 능력도 부족할 때였는데.
“통탄할 노릇이지…….”
개방은 세상 누구라도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모르는 이를 찾아낼 방법 따위는 없다. 심지어 풍영신개……. 아니, 무흔개가 제 본 얼굴로 이 총단 안을 휘젓고 다닌다 해도 개방의 누구 하나 그가 방주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건 신물뿐이다. 무흔개는 말 그대로 흔적 없는 자니까.
“사람도 물건도 그 종적이 묘연한데…… 나는 그들을 찾아내야 한단 말이지.”
“…….”
“심지어 그 사람이 어떤 이인지도 모르고, 신물을 눈에 본 이들도 손에 꼽는 상황에.”
“……사형.”
일호신개가 쿡쿡대며 웃었다.
“놈이 마치 애초부터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걸 대비한 것 같구나. 그 어렸던 무흔개 놈이 방주 자리에 오를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길게 탄식하는 일호신개의 얼굴에 피로가 스쳤다.
수많은 인원을 이끌 수 있는 통솔력도, 날카롭게 적을 파악하는 분석력도, 심지어 개방 최고로 손꼽힐 만한 무력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체도 없는 귀신을 내 손으로 잡아야 끝나는 일이라. 잡힐 리가 없는 귀신……. 잠깐!”
그런데 그 순간, 일호신개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퍼뜩 고개를 들었다.
“사형?”
두 눈을 커다랗게 부릅뜬 일호신개가 뭐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실체가…… 없다? 실체가? 알아보지 못한다?”
“……사형?”
“허……. 허허. 허허허허허허허허.”
일호신개가 돌연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사, 사형.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실체가 없다. 하하하하핫. 그래, 실체가 없지!”
그는 의자에 힘이 빠진 듯 늘어지며 자꾸 쿡쿡 웃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스승께서 내게 방주 자리를 물려주지 않은 이유를 알 것도 같군. 내가 이리도 멍청했을 줄이야……!”
“대체…….”
“장로들을 모아라.”
단호하게 명령한 일호신개가 미소 지었다. 더없이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만 찾아 헤맸구나. 이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해결될 것이다.”
장년의 거지는 그저 의문 어린 눈으로 일호신개를 멍하니 보았다.
* * *
“……진짜 제정신이냐?”
홍대광은 더 이상 놀랄 수도 없다는 듯 황당한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다른 이들도 둘러보았다. 정확히는 백천을.
“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저 인간이 제정신 아닌 건 세상천지가 다 아는 일인데, 도장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짓을 벌인다고 하면 말렸어야 할 것 아닙니까?”
“……제가 말린다고 듣겠습니까?”
“그럼 적어도 동조는 하지 말아야지! 그 꼴이 뭡니까, 대체!”
순간 할 말이 없어진 백천은 시선을 피하며 먼 산만 바라보았다. 작은 밀실 안이라 산이 보이지도 않았지만.
“미쳐도 정도껏 미쳐야……. 거, 스님. 가발 비뚤어졌소. 참나.”
“아, 아미타불.”
혜연은 목덜미까지 벌게진 채 내내 말썽인 가발을 이리저리 만졌다. 청명이 더 듣기도 귀찮은 듯 칼같이 끼어들었다.
“아! 잔소리는 됐고.”
그러더니 홍대광을 향해 턱짓했다.
“어쩔 건데요. 대답을 해요.”
홍대광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내가 들은 게 다 사실이냐?”
“내가 대뜸 거지 붙들고 헛소리 늘어놓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홍대광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때 낀 손으로 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던 왕거지가 사실 방주이긴 방주인데, 진짜 방주라기보다는 흑막의 꼭두각시 같은 거였고, 그 흑막은 흑막이기는 흑막인데, 나쁜 흑막이 아니라 전설적인 선대 방주셨고, 그 방주님이 그렇게 일을 저지른 이유가 나쁜 일인데 오히려 좋은 일이었고, 내가 본 방주가 대역일지도 모르는데, 그 대역도 나쁜…….”
“그만하십쇼, 분타주님.”
“……하긴 나 같아도 저럴 것 같긴 해.”
“아미타불. 운명이려니 하시지요.”
홍대광은 넋 나간 얼굴로 망연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뭔 개 같은 소리들이야.”
그가 알던 세상이 일시에 붕괴해 버린 기분이었다.
이 와중에 더 속이 터지는 건, 그가 아는 청명이 놈이 헛소리는 해도 거짓말은 안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니, 뭐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고요.”
“……이걸 어떻게 나중에 생각해, 미친놈아.”
“지난 일은 지난 일이에요. 중요한 건 앞으로지. 그래서 일단 아저씨가 방주가 되어야 하는데…….”
“그걸 또 왜 네가 정해, 미친놈아…….”
“아니, 몇 번을 말해요? 딱히 다른 사람이 없다니까?”
“그건 또 왜 네가 판단하는데…….”
홍대광의 눈에 눈물이 어룽어룽 맺혔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무튼 그, 시간 없으니까 일단은 따라와요. 방주 되고 나서 마저 생각해.”
“……어, 어쩔 생각인데?”
“뭐 어쩌긴 어째요? 어차피 쟤들은 힘만 있을 뿐 권위가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해요. 이럴 때 우리가 따악! 하고…….”
그 순간이었다.
“도장!”
그들이 숨어 있던 밀실 문이 쾅! 소리와 함께 열렸다.
“뭐야!”
“적이냐!”
화산의 검수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문을 겨누었다.
하지만 문을 열어젖힌 건 다름 아닌 이송백이었다.
“뭐, 뭡니까, 소협! 놀랐잖아요!”
“아니, 문 좀 살살……!”
“크, 큰일 났습니다!”
“응?”
모두가 그제야 이송백을 살폈다. 놀란 심장 부여잡느라 겨를이 없어 몰랐는데, 대체로 차분한 이송백의 얼굴이 정말 눈에 띌 만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백천이 빠르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소협?”
“백천 도……. 아니, 장문대리! 큰일입니다. 지금 밖에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무슨 소문이요?”
“바, 방주! 개방의 방주가!”
“예, 방주님이?”
“승하하셨다 합니다!”
화산의 제자들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엑? 죽었다고요?”
“아니, 뭔 소리야. 조금 전까지 멀쩡히 살아 계시던 사람인데? 그새 당하셨다고?”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이게 뭔 상황인데요?”
모두가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웅성거렸다. 백천이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정말입니까?”
“예! 조금 전에 총단에서 나온 소식이라고 합니다. 지금 바깥에선 온통 그 이야기뿐입니다.”
“……이게 대체…….”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있던 모두가 자연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이해가 안 갈 땐 자연히 시선이 그리로 갔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청명은, 어디서 뒤통수라도 냅다 얻어맞은 듯 멍청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청명아?”
“어…….”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청명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야……. 그 장로인지 뭔지 하는 양반 보통이 아니네. 이걸 이렇게 간다고?”
“이게 뭔 상황이냐?”
“그, 상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 내로 이거 해결 못 하면 우리 망해.”
“응? 하하. 이 새끼, 또 겁주려고 엄살을……. 청명아?”
백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청명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걸 본 것이다.
“처, 청명…….”
“……아닌가. 어쩌면 이미 망했을지도.”
아니, 이건 진짜 위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