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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99화 (1,500/1,567)

1499화.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4)

파바바박.

겨우 진정한 청명이 거칠게 마른세수하는 소리가 고요해진 내실 안에 울려 퍼졌다.

“끄응……. 앓느니 죽어야지.”

“오, 그 말 오랜만에 듣는다?”

“걸아. 주둥이 좀 닫아라.”

청명이 이를 갈며 위층을 흘겼다.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뭘 다 해 주는 것처럼…….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프니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청명이 말했다.

“개방 세력의 육 할은 이미 장로들 쪽으로 넘어갔고, 우리가 개방의 정보력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 장로들을 찍어 누른 뒤에 우리가 원하는 양반을 방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그렇소.”

“저 망할 거지 놈이!”

“아, 아미타불! 진정하시오, 시주!”

“그만하라고, 이 새끼야! 그래도 네가 도복 입은 도산데 죽은 사람한테!”

좌우에 버티고 서서 대기하던 혜연과 윤종이 냉큼 그를 붙잡고 늘어졌다. 청명은 붙들린 채로 천장을 철천지원수 노려보듯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조걸이 작은 목소리로 백천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숙.”

“응?”

“지금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겁니까? 방주만 도와주신다면 후계 구도에 개입해서 개방을 우리 편으로 돌릴 좋은 기회 같은데.”

“그렇지. 잘 풀린다면 그렇게 되겠지. 일이 정말 잘 풀린다면 개방이…….”

백천이 거기서부터는 말을 아꼈다.

그가 원래 하려던 말은 ‘개방이 구파일방을 탈퇴해 천우맹에 가입하는 상황도 생길지 모르겠구나.’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개방의 방주 앞에서 하기엔 적절치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잘 풀렸을 때의 이야기고, 일이 잘못되면 파장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타문의 후계에 개입하는 건 강호의 도의에 완벽하게 어긋난다. 아니, 단순히 어긋나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개방이랑 원수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거나 다름없어.”

“그, 그 정도입니까?”

“내가 원래 화산의 장문인이 될 예정이었는데, 종남에서 조직적으로 개입해서 백상이 놈을 장문인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해 봐라.”

“……좋은데?”

“…….”

“아, 아니죠. 그럼 안 되지! 좋은 일도 우리가 해야 좋은 일이지! 어디 감히 종남 놈들이 설칩니까? 종남산에 불질러 버릴라!”

“그래. 그런 거다.”

뒤에서 마른세수하는 이송백이 조금 신경 쓰인 백천이 헛기침하고 말을 이었다.

“여하튼…… 까딱하면 개방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래도 방주께서 한 편이시면 상황이 다른 것 아닙니까?”

그 말에 저마다 풍영신개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 끝에 놓인 풍영신개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지금 당장 나부터 축출될 판이라 말일세…….”

“자랑이다, 이 새끼야!”

“아이고, 청명아!”

“손 떼요, 손! 그래도 방주시라고요, 사형! 검 뽑으면 안 돼요!”

“버르장머리.”

화산의 제자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청명을 짓누르는 광경을 보며, 풍영신개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저놈들은 지금 자기들이 누르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유이설이 늘 그랬던 것처럼 검집으로 청명의 머리를 콕콕 찌르며 때리기 시작했을 때, 풍영신개는 차마 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강호사에 다시없을 패륜은 이미 벌어졌다. 저들만 모를 뿐이지…….

청명의 팔을 누르고 있던 윤종이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흘리다 말했다.

“사숙. 일이 이리된 거, 천우맹 본단에 지원을 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장문인께, 그리고 태상장문인께 우리가 개방 후계 문제에 개입할 테니 칼 쓸 사람 좀 보내 달라고 요청하란 소리냐?”

그 순간 윤종의 뇌리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매화검을 뽑아 들고 전력으로 개봉에 달려오는 현종의 모습이 말이다. 정말이지 생각만으로도…….

“……심장마비 걸리겠네.”

“천마가 따로 있나, 그게 천마지…….”

“지릴 것 같다.”

그랬다가는 정말 매화동에 굴러다니는 모래알이 몇 개인지 그들의 이마와 정수리로 확인해야 할지도 모른다.

“놔 봐!”

“사고 안 친다고 약속해.”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놔 봐!”

“……신뢰가 안 가는데.”

믿음은 안 가지만 어쨌든 다들 마지못해 물러섰다. 청명이 한숨을 푹 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한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은 청명이 풍영신개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풍영신개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래서 거지새끼들은.”

“……죄송합니다.”

“쯧.”

“그래서, 건너편의 대가리는 누구예요?”

“일호개 조남천(趙南天)입니다.”

“일호개?”

풍영신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군구일호(群狗一虎) 조남천. 그가 지금 장로들을 규합하여 스스로 방주가 되려는 자입니다.”

“군계일학도 아니고 군구일호. 개 무리 속에 범 한 마리라…….”

청명이 눈을 가늘게 뜨자 풍영신개가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짐작하시겠지만…… 그가 원래 개방의 방주 자리에 올라야 했을 사람입니다. 그저…….”

“저 영감탱이가 제 뜻에 따를 사람을 구하다 보니 그쪽이 방주가 되셨다?”

“예, 그렇습니다.”

“……억울할 만하네.”

조남천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을 것이다.

군구일호라는 별호만 보아도 그가 개방 내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이가 하루아침에 이유도 모른 채 방주 자리를 강탈당했으니.

“사제예요?”

“사형입니다.”

청명이 다시 뚱한 얼굴로 바라보자, 풍영신개의 고개가 점점 수그러들었다.

조걸이 또다시 백천에게 속삭였다.

“사숙, 무슨 상황입니까?”

“당연히 장문인이 될 줄 알았던 윤종이가 어느 날 난데없이 너한테 장문인 자리를 빼앗긴 거다.”

“엑? 그럼 화산 망하잖아요?”

“…….”

안 듣는 척 다 듣고 있던 모두가 순간 조걸을 멍하니 보았다. 조걸이 움찔했다.

“왜요?”

“아니. 아무것도.”

“그냥, 나름 주제 파악은 잘하고 있다 싶어서.”

“똑똑해.”

“아아. 뭐, 당연한 말씀을. 아무튼 그러니까, 제가 윤종 사형 자리를 빼앗고 화산 장문인이 되었는데 심지어 일부러 화산을 개판 만들고 있으니, 그걸 본 사형이 이 악물고 다른 사제들을 규합해서 장문인 자리를 되찾으려 한다는 겁니까?”

“굳이 비견해 보자면 그렇겠지.”

“그…… 사숙? 제가 생각이 짧아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이거 아무리 들어도…….”

“좀 그렇지?”

풍영신개를 보는 화산 제자들의 시선이 점점 뚱해졌다.

“저쪽이 정의 같은데.”

“……이쪽이 악당이지.”

“솔직히 나 같으면 진작 엎었다.”

연신 헛기침만 할 뿐, 풍영신개도 딱히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그저 선대의 뜻에 따랐을 뿐이지만, 다른 이들은 그리 생각지 않을 테니까.

“어쨌든, 그래서 그 일호개인지 뭔지 하는 양반이 장로들을 규합해서 방주가 되려고 한다는 거잖아요. 어디까지 진행됐죠? 오 할? 육 할?”

“그게…….”

“설마 칠 할은 아니겠죠?”

“사실…… 이미 저들끼리의 협의는 끝난 상황입니다. 그저 저들의 손에 그 결정을 확정 지을 방도인 개방의 신물이 없어서 지체되고 있을 뿐.”

청명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끝났다고?”

“……예.”

“아, 아니, 댁도 그렇게 무능해 보이지는 않는데, 지금까지 뭘 하신 건데요?”

풍영신개의 눈이 본능적으로 슬쩍 위로 향한다.

“그게…… 사부님께서 당신이 직접 처리할 테니 조금 기다리라고 하시다가…….”

“……해결 안 하고 저리됐다?”

“예.”

“그 와중에 귀식대법을 써서 숨만 붙어 있다가 눈 뜨자마자 저렇게 갔다?”

“말하자면……. 예.”

“끄륵…….”

청명이 제 목덜미를 잡고 뒤로 넘어가려는 찰나 당소소가 청명의 뒷머리에 침을 콕콕 놓았다.

치솟았던 피가 쭉 빠져나오자 당소소가 태연히 말했다.

“피 뺐으니 혈압 내려갈 거예요. 계속하세요, 사형.”

“끄으응.”

얼굴을 빠르게 썩썩 문지른 청명이 이를 갈았다.

“그러니까…… 저놈들은 도장만 찍으면 되는 상황인데, 댁이 그 도장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놈들은…… 댁을 찾지 못한 게 아니라 찾지 않은 거로군. 저들에게 필요한 건 신물이지, 당신이 아니니까. 댁이 바보처럼 여기다 신물을 가져다 놨을 리도 없고, 잡힌다고 그 위치를 순순히 불지도 않을 테니까.”

“정확합니다.”

“그럼 우리는 이 상황에서 저놈들을 모조리 설득하거나, 때려잡아서 새로운 개방주로 만들면 된다?”

“예.”

“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 새끼야!”

청명이 발작하는 걸 숨 쉬듯 무심히 누르며 오검은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왜 하는 일마다 쉽게 풀리는 일도 없이 이런 식인가.

“에라, 씨!”

하체를 덮쳐 누른 혜연을 걷어차서 날려 버린 청명이 벌떡 일어났다.

“그럼 그렇지, 내가 하는 일이 쉬울 리가 있나?”

“어떻게 할 거냐, 청명아?”

백천이 물었다. 청명의 흰자에 핏발이 잔뜩 섰다.

“뭘 어떻게 해? 이렇게 돼 버린 거, 이젠 이판사판이야! 개방이 박살 나든 내가 박살 나든!”

“……아니, 무작정 때려잡는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다니까?”

“됐고!”

청명은 팔짱을 낀 채 뭔가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도 다행히 우리가 개봉에 있고, 저놈들은 우리가 여기에 있는 줄 모르는 상황이군.”

“그게 뭐 도움이 되냐?”

“아닌 것보다는 낫지. 그리고…… 음, 하나가 부족한데.”

청명이 풍영신개를 향해 획 시선을 돌렸다.

“그 인간 어딨어요?”

“그 인간이라니?”

“그 인간! 그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던 풍영신개가 순간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그 사람이라면 마침…….”

* * *

“빌어먹을 총단 새끼들.”

인적없는 개봉의 으슥한 골목, 홍대광이 아니꼬운 얼굴로 침을 탁 뱉었다.

이놈의 총단은 올 때마다 정이 안 간다. 더구나 욕만 먹으러 끌려온 상황이니 더할 수밖에.

“자오개 그 양반이 저지른 일을 두고 왜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제기랄. 막상 자오개한테는 따지지도 못하면서!”

현재 자오개는 자신을 따르는 개방도들을 이끌고 장강에 머물고 있다. 분명 방주의 허가를 얻은 일임에도, 총단의 장로들은 그런 자오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하지만 자오개는 지금 표면적으로나마 개방에서 나간 상황이다 보니 그를 불러 어쩌지는 못한다. 그러니 총단에선 애먼 홍대광을 대신 잡아 조지는 것이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이런 일로 몇 번이나 총단까지 불려오니 홍대광도 속이 부글부글 끓을 수밖에 없었다.

“에이, 씨바! 더러워서 진짜. 차라리 그냥 나도 탈퇴나 해 버릴까?”

어차피 방주 자리도 물 건너간 듯한데, 천우맹 쪽에 받아 달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아니……. 그래도 그 인간 밑으로 가는 것보다는 여기가 낫지.”

홍대광은 빠르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죽어도 청명 총사를 모실 자신이 없었다. 여기가 그냥 지옥이라면 거기는 무간지옥이니까.

“어휴.”

울며 겨자 먹기로 천우맹이라는 선택지를 지운 홍대광이 다시 한번 침을 퉤 뱉었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총단으로 향하려는 바로 그때였다.

“잠시.”

“응?”

누군가가 앞에 불쑥 나타나 그를 살짝 잡아끌었다.

“누구……. 응? 이송백? 종남의 이송백?”

“화음 분타주를 뵙습니다.”

“종남 사람이 저한테 왜 갑자기? 저는 화산에 대해 아는……. 엑? 진금룡 대협? 아니, 종남 분들이……. 어?”

진금룡을 필두로 등 뒤에 또 다른 종남인들이 등장하자 홍대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윽고…… 그의 두 눈이 세차게 떨렸다.

“조, 종남? 아니, 화…….”

그는 손으로 제 입을 콱 틀어막았다. 가장 뒤에 있는 이를 발견하고 나니 몸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이, 이게 뭔……. 아니, 진짜 정신이 나갔나? 대체 무슨 짓을……!”

“어이, 거지 아저씨.”

“화산신룡! 야, 인마 너…….”

“방주 되는 게 소원이라 그랬지?”

“뭐?”

“원래 친구 잘 두면 능력이 좀 부족해도 감투 하나는 쓰는 법이거든?”

“…….”

“오늘이 그 감투 쓰는 날이야.”

기겁한 홍대광을 보며 청명이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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