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7화.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
청명은 눈물 흘리는 현풍신개를 말없이 응시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격정에 차 있는 현풍신개의 얼굴은 청명에게 묘한 위안을 전해 주었다.
그 시절 그가 행한 것들이 그저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위안을 말이다.
“……고맙다.”
그렇기에 이 말은 여러 의미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이 말을 듣는 현풍신개조차 채 다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검존.”
현풍신개가 힘을 다해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진작 검존께 드렸어야 할 의기입니다. 진즉에 내었어야 할 용기입니다. 이리 다 늦어 버린 뒤에야…… 그 지독한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게 되어…….”
말을 채 다 잇지 못하고 현풍신개는 입술을 꽉 물었다. 요동치는 감정을 억제하기 어려워서였다.
그렇게 한동안 어렵사리 감정을 다스린 그가 청명을 보며 말했다. 죄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다만, 제가…… 너무도 오래 개방을 방치한 덕에 그리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송구스럽게도 검존의 손을 빌려야…….”
청명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상관없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만 알려 주면 돼. 길을 여는 건 내 몫이니까.”
현풍신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렇지요. 검존께서는 언제나 그러셨지요.”
돌연 아주 먼 기억을 더듬는 듯, 현풍신개의 눈빛이 느리게 가라앉았다.
“……여쭙고 싶은 것도 많고, 드리고 싶은 말씀도 많지만……. 쿨럭!”
쪼글쪼글한 입에서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흐으…….”
바싹 마른 손으로 제 심장께를 가볍게 움켜잡은 그가 웃었다.
“보시다시피…… 제게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질 않습니다.”
“……현풍개.”
청명이 뭔가 말을 하려 하자 현풍개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 안쓰러운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검존께서는 제 명을 줄이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제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신 것이잖습니까.”
은은하게 미소를 드리운 현풍신개가 시선을 돌렸다. 시선 끝에 놓인 건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그리고…… 저도 검존께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청명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음?”
위쪽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천상루주가 돌연 눈살을 찌푸렸다.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던 위층에서 미약한 소음이 새어 나온 것이다. 이 말인즉, 아래층과 위층 사이를 막고 있던 기막이 걷혔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희미하지만 또렷한 소리가 이어졌다.
“……올라오너라.”
“예!”
즉시 대답한 천상루주가 백천과 그 일행을 향해 말했다.
“다시 올라가야겠소.”
“예.”
마찬가지로 그 소리를 들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상루주를 필두로 위층으로 올라가니 어둑어둑한 암실 침상에 누운 현풍신개의 모습과 그 옆에 선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자리를 피하기 전과 딱히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듯했다.
“쿨럭. 쿨럭, 쿨럭!”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현풍신개가 연거푸 기침을 토하니 천상루주가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삽시간에 얼굴을 굳혔다. 상황이 좋질 않았다.
“쉬셔야 합니다. 너무 오래 깨어 계셨습니다.”
“……괜찮다.”
“아닙니다. 자세한 말씀은 나중에 하시고, 일단은 대법을…….”
“과아(果兒)야.”
“…….”
“이제 됐다.”
천상루주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가…… 네게는 참으로 못 할 짓을 했구나.”
“아닙니다, 사부님.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제자가 스승의 의지에 따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간곡히 부인하는 천상루주를 향해 현풍신개가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외면했지. 내가 하려는 모든 것이 결국은 너희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거였단 사실을.”
“…….”
“이분들의 바람을 들어드리거라. 그 뒤에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사부님…….”
“할 수 있겠느냐?”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침묵하던 천상루주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명이 아니라 부탁이란다. 들어줄 수 있겠느냐?”
그 말에는 천상루주가 입을 꾹 닫았다.
현풍신개는 그런 그를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한참 동안 현풍신개를 바라보던 천상루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현풍신개는 희미하게 떨리는 손을 뻗어 천상루주의 손을 움켜잡았다. 천상루주도 그저 말없이 그 주름진 손을 맞잡았다.
그 작은 동작만으로도 이들이 얼마나 서로를 위하고 생각하는지가 선명하게 전해졌다.
현풍신개는 손을 잡은 채로 청명과 그 뒤에 선 오검을 보았다.
“쉽지 않겠지만…… 저분들이 도와주신다면 능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예, 사부님.”
“그리고…… 나는 믿는단다. 그리 차게 식혔다 해도, 여전히 네 안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을.”
그 말에 천상루주가 작게 움찔했다.
“과아야…….”
“……예, 사부님.”
“나도 이제야 알았단다. 살아만 있다면 무엇이든 되돌릴 기회가 있단다.”
“…….”
“어쩌면 내가 너를 믿지 못했던 걸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제야…….”
“제발 그런 말씀 마십시오. 사부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현풍신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따뜻함이 더 많은 걸 전할 때도 있는 법이다.
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던 이들이니, 더 이상의 긴말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를 깊게 이해하니까.
“검……협.”
현풍신개가 청명을 보며 말했다.
“능력 있는 사람이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청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검협. 검협도 아시겠지만…… 검협께서 걸어야 할 길은 너무도 힘겹고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가도 가도 끝이 나지 않는 가시밭길일 것입니다.”
우려 섞인 말이었다. 청명은 퉁명스레 툭 뱉듯이 답했다.
“뭐 어쩌겠어. 길이 그것뿐인데. 넋 놓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
“…….”
“그리고 영원한 가시밭길 같은 건 없어. 어떤 길이든 결국은 끝이 있으니까. 나는 그저 그 끝을 향해 갈 뿐이야.”
현풍신개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결국 그에게 부족했던 건 저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는 가시밭길이 두려워 그 앞에 주저앉아 버린 사람이니까. 만일 그에게 그 길을 뚫고 지나칠 용기가 있었다면, 개방도, 세상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렇지요.”
과거에도 지금도 청명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렵고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걸으면 상처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망설이지 않는다.
‘아니, 망설이지 않는 게 아니겠지.’
망설이고 또 망설여도 결국은 그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과거에도 수많은 이들이 그 등을 따랐고, 지금도 저 많은 이들이 이 사람의 등을 바라보는 것이다.
“믿겠습니다. 검……협.”
청명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현풍신개의 천장 쪽으로 향했다. 그 너머에 있을 하늘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길었지요, 너무도……. 이제야…… 겨우 저들에게 용서를 빌, 작은 용기가 생겼습니다.”
“……신개.”
“과아야……. 창을 열어 주려무나.”
“예, 사부님.”
천상루주가 지체 없이 달려가 작은 창을 열었다. 무척 오랫동안 열린 적이 없었는지 끼익 거친 소음이 울렸다.
활짝 열린 창으로 밤공기가 밀려들었다. 누군가에게는 차갑게, 또 누군가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질 바람이 답답했던 밀실 안의 공기를 밀어 내며 휘돌았다.
“공기가 조금 찹니다, 사부…….”
고개를 돌리던 천상루주가 그대로 덜컥 굳었다.
침상에 누운 현풍신개의 눈이 감겨 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편안한 표정이었다.
천상루주는 입 안 살을 꾹 깨물었다.
눈물을 흘리는 건 옳지 않다.
현풍신개는 이제야 자신을 옭아매던 고통에서 벗어난 것이니까. 그러니 차라리 웃음을 터뜨리는 게 더 옳다.
하지만 그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애써 옮겨 침상으로 다가간 천상루주는 식어 갈 일만이 남은 현풍신개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모를 것이다. 그 누구도.
이 노인이 얼마나 많은 것을 짊어지고 지금까지 버텨 왔는지.
“……사부님께서 하신 부탁은, 제가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그러니…….”
편히 쉬십시오.
차마 잇지 못한 말은 가슴속에 묻었다. 천상루주가 현풍신개의 손을 마지막으로 꽉 움켜잡고는 조심스레 손을 물렸다. 그리고 청명과 그 일행에게 말했다.
“잠시…… 시간을 줄 수 있겠습니까? 수습을…….”
“거기 둬.”
“……예?”
뒤를 돌아보니 청명은 영원한 잠에 빠진 현풍신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싸우다 죽은 이는 그곳에 묻힌다.”
“…….”
“그게 그 시절의 원칙이었지.”
천상루주의 어깨가 짧게 떨렸다.
“전쟁은 끝났지만, 저 사람에게는 여전히 전장이었겠지. 지금까지 계속 싸워 왔으니까. 시대의 찌꺼기 같은 게 아니야. 모두가 내려놓았던 싸움을 마지막까지 이어 간 전사다.”
“……화산검협.”
“그러니 거기에 둬. 본인도 그걸 원할 거야.”
천상루주는 희게 질리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세상 누구도 현풍신개에게 이런 말을 해 주지 않았고, 해 줄 수도 없었다. 오직 하나, 이 사람을 제외하면.
“……그렇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렵사리 뱉은 대답에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구석에 열린 창으로는 여전히 새로운 바람이 밀려들었다. 세상과 통하기에는 너무도 작고 보잘것없지만, 그토록 오래 닫혀 있던 창이 이 순간 열려 있다는 게 중요했다.
다름 아닌, 현풍신개의 의지로.
“아미타불.”
혜연이 짧게 불호를 외고 독송을 시작했다. 화산의 제자들도 제각각 도호를 외고 각자의 방식으로 떠나는 현풍신개에게 예를 표했다.
그가 어떤 일을 해 왔는지 모든 것을 구구절절 아는 이는 없다.
하지만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이 어둑한 암실에서 이 순간까지 버텨 온 의지만으로도 그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내려가자.”
“그래.”
백천이 현풍신개의 시신을 향해 공경을 담아 포권 하고는 몸을 돌렸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이윽고 청명과 천상루주도 현풍신개를 일별하고 암실을 나섰다.
“……닫겠습니다.”
끼이이익.
천상루주가 기관을 움직이자 아래로 내려왔던 계단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천장으로 향하는 문이 굳게 닫혔다.
쿠웅.
청명은 닫힌 문을 묵묵히 응시했다.
이제 저 문은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다.
청명이 없는 세월에서조차 혼자만의 싸움을 이어 갔던 이가 가지기에는 다소 작고 초라한 무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명은 저곳이야말로 현풍신개에게 가장 어울리는 무덤이라 생각했다.
‘거기서 지켜봐라.’
모든 것이 결코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걸 청명이 증명할 것이다. 그리고 청명이 행한 모든 일이 바람을 타고, 작고 고요한 암실로 전해질 것이다.
빛바래고 말라붙어도, 결코 식지 않을 한 방울의 피를 가진 이의 쉼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