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6화.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
아래층으로 내려온 화산의 제자들은 다소 불안한 얼굴로 위층을 빤히 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일까요?”
“글쎄…….”
“기막을 친 듯한데, 유심히 잘 들어 보면 들릴 것 같기도……. 아악!”
귀를 쫑긋거리며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미는 조걸의 귀를 윤종이 콱 움켜쥐고 당겼다.
“듣지 말라고 내려보낸 건데 그걸 굳이 들으려고, 인마!”
“아악! 귀, 귀! 아니, 솔직히 사형도 궁금하긴 하잖습니까!”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면 그게 사람이냐? 짐승이지.”
“끄으응.”
차마 부인하지 못한 조걸이 앓는 소리를 내며 슬그머니 엉덩이를 뺐다. 윤종은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궁금이라…….’
솔직히 그도 궁금하긴 했다. 마교대전을 겪은 개방의 선대 방주와 청명이 어떤 대화를 나누려 하는지.
“사숙은 안 궁금하세요?”
“안 궁금하다.”
“네? 진짜로?”
의외의 대답에 조걸이 되물었다. 백천이 막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검협께서는…….”
“음?”
곁을 지키고 서서 그들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고 있던 천상루주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화산검협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어떤 분이냐니.”
모두의 얼굴에 짧은 당황이 스쳤다. 질문을 던진 시점 자체도 난데없긴 했지만, 도무지 개방의 방주가 던질 만한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화산의 제자들보다 청명에 대해 더 잘 알 수도 있는 사람이 바로 개방의 방주 아니던가?
“어떤 분이라니, 그야…….”
“미친놈.”
“또라이.”
“제정신은 아니에요. 이건 확실해.”
“마구니외다. 아미타불.”
“……다들 말씀이 좀 심하신 것 같은데……. 그, 그렇게까지 이상한 분은 아니잖습니까.”
청명을 감싸는 듯한 말에 모두가 뚱한 눈으로 이송백을 돌아보았다.
“그래, 모르는 게 약이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제가 보기에는 화산 분들이 화산검협을 과하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 분이 아닌데.”
“네네.”
“그 말 언제까지 가는지 꼭 지켜보겠습니다, 소협.”
피식 웃은 백천이 다시금 천상루주를 바라보았다.
“뭐라 표현하기는 힘든 놈입니다.”
“……그렇군.”
천상루주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도움이 될 만한 대답들도 아니었는데, 천상루주는 그 안에서 뭔가를 느낀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그저 궁금했을 뿐이네.”
천상루주의 시선이 위로 향한다.
“……오래 들어 왔던 사람이니까.”
백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때, 조걸이 슬쩍 다가오더니 다시 백천에게 물어 왔다.
“그런데, 사숙. 정말 안 궁금하십니까?”
“……그렇다니까.”
“아니, 뭔 놈의 허세를 그렇게. 요새 사숙 좀 무게를 과하게 잡…….”
쾅!
짧고 강력한 백천의 타격에 조걸이 일자로 쓰러졌다.
“응. 요새 과하게 깝죽대긴 했지.”
“정당한 결말 환영합니다.”
나머지 오검이 그 광경을 보며 박수 쳤다. 쓰러진 조걸을 보며 피식 웃은 백천이 뇌까리듯 말했다.
“궁금할 것도 없지.”
그리고 천장에 뚫린 구멍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놈이 말하는 건 언제나 ‘다음’이니까.”
그 두 눈에 가득한 건 그저 신뢰였다.
“……검존.”
현풍신개의 입술 새로 갈라진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 속에 담긴 감정들은 채 다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청명은 그런 현풍신개를 그저 담담히 바라보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잠시 말꼬리를 끈 청명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까지 한 일이 잘못되었다고는 하지 않겠다.”
느릿하게 고개를 젓는 그의 얼굴에 살짝 지친 기색이 스쳤다.
“그 전쟁을 겪은 이라면 누구라도 자신만의 결론을 내놓을 수밖에 없지. 차마 다른 이들의 이해를 바랄 수도 없는 결론을 말이다.”
청명 역시 마찬가지다. 그도 나름의 결론을 내었고, 지금도 내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그 결론을 다른 사람이 이해해 주길 바라지는 않는다. 겪지 않은 이들은 알 수 없을 테니까.
청명이 단호하게 현풍신개를 보며 말했다.
“다만, 나는 성질이 더러워서 너처럼 얌전하게 목을 빼고 기다리지는 못해.”
“…….”
“무의미할지라도 발버둥 치고, 발악하고, 물어뜯을 거다.”
현풍신개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니 내게 말해. 개방을 다시 원래의 개방으로 돌릴 방도를. 내가 그들의 힘을 얻을 방법을.”
현풍신개는 말없이 청명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청명은 그런 그를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긴 침묵 끝에야 마침내 현풍신개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정말…… 그와 다시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검존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의 강호는…….”
“과거보다 약하겠지.”
“…….”
“그리고 놈은 더 강해져서 돌아오겠지. 만일 정말로 놈이 돌아온다면, 우리가 이길 확률 따위는 일 푼도 채 되지 않을 거다.”
“그 모든 걸 다 아시면서 어찌…….”
“말했잖아.”
청명이 피식 웃었다.
“이길 수 있어서 싸우는 게 아니야. 싸울 수밖에 없으니까 싸우는 거지.”
“…….”
“나는 싸우는 것밖에 못 하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내어 놓을 수 있는 답은 하나밖에 없지.”
검을 툭 친 청명이 조용히 읊조렸다.
“싸울 뿐이야. 상대가 누구든.”
현풍신개는 제 입술을 잘게 씹었다. 그 와중에도 진의를 파악하겠다는 듯 두 눈은 부지런히 청명을 살폈다. 청명에게선 조금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풍신개가 서글픈 음성으로 말했다.
“검존께서……. 그때 검존께서 유명을 달리하지 않으셨더라면…….”
“…….”
“아니, 하다못해 조금 빨리라도…….”
노인은 주름진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청명도 눈을 감았다.
그가 절망했듯, 현풍신개 역시 지옥처럼 괴로웠을 것이다. 누구 하나 손 내밀어 주지 않는 세상에 홀로 내버려진 것 같았겠지.
“검존. 그때의 강호는 지독했지만, 또 동시에 수많은 재사로 넘쳐나던 곳이었습니다.”
“……그랬지.”
천하삼대검수. 허울뿐인 명칭인 건 사실이나, 이는 달리 말해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 청명과 비견이라도 될 수 있는 검수가 둘은 더 존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거기에 당보와 청문, 청진까지.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모두가 천하를 제 손에 쥐었을 이들. 그런 이들이 힘을 모아 마교를 막아 내었다.
“하지만 지금의 강호는 그때의 수준에 절대 미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싸우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현풍신개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검존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그 전쟁에서 보여 주셨던 것을 기억하는 이라면, 그 누구도 감히 검존을 의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검존께서 아무리 강하셔도 혼자서는…….”
“나는.”
청명이 단호한 목소리로 현풍신개의 말을 끊었다.
“과거의 그들이 위대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천마의 목을 벨 수 있었다.”
“…….”
“나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이들이었지. 나는 그저 그들이 휘두르는 검이었을 뿐이야.”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미약하지만 등잔의 불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불빛과 어두운 이곳 사이에는 청명이 쳐 둔 기막이 펼쳐져 있다.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지만…… 말이 들리지 않는다 해서 모든 게 단절된 건 아니다.
설령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해도, 저들은 분명히 저곳에 있다. 그리고 청명이 익히 아는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볼수록 위대한 이들이었지. 그렇지만 그들이라 해서 처음부터 위대했던 건 아니야.”
“…….”
“하나같이 모나고 모자랐던 이들이었다. 그저…… 어떻게든 위대해져야 했을 뿐이야.”
청명의 시선이 다시 현풍신개에게로 돌아왔다.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했지?”
“……검존.”
“아니.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 반대야. 그리고 이전의 나는 모든 것을 홀로 하려 했기에, 결국 거기서 끝난 거다.”
청명의 담담한 말이 이어지자 현풍신개의 어깨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으니까.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은 없다고 여겼으니까. 내가 그 짐을 고스란히 안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지.”
이야기하는 내내 청명의 표정에는 이렇다 할 동요가 없었지만, 그 이야기 안에는 청명의 삶, 나아가 현풍신개가 살아온 삶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건,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다.”
청명이 눈을 감았다.
현풍신개에게 전하는 말인 동시에, 과거의 그 자신에게 전하는 말. 들어 줄 이가 없어서 하지 못했던 말.
“그래, 네 말대로 혼자서는 못해.”
“……검존.”
“그러니 나를 도와라, 현풍개.”
다시 눈을 떴을 때, 청명의 눈은 한없이 서늘하고 단호했다.
“그렇게 다 끝나 버린 사람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지 마라. 너는 아직 살아 있다. 그때 네가 하지 못해 무너진 것들을 되돌릴 기회는 아직 남아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마.”
현풍신개의 두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야가 흐려지며 겹쳐 보였다.
앞에 서 있는 어린 소년과, 과거 그가 그토록 동경했던 매화검존의 모습이.
현풍신개는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이는 검존이되 검존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건, 검존보다 나약하고 부족해 보이지만 과거의 검존보다 분명 더 단단해진 또 다른 사람이다.
“도우라 하셨습니까……?”
“그래.”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게 아니라…… 저를 도우시는 게 아니라…… 다 늙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제게 되레 도움을 청하시는 겁니까?”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래.”
“……가혹하시군요, 검존.”
청명의 웃음에 현풍신개도 어깨를 떨며 쿡쿡 웃었다.
기침과 웃음이 반쯤 섞인 그 소리는 말라비틀어진 현풍신개의 목을 긁으며 오래도록 새어 나왔다.
“검존……. 저는 살아 있는 송장입니다. 개방의 미래도…… 세상을 위한 길도, 흐려진 제 눈에는 이제 보이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별할 힘을 잃은 제게는…… 그 어떤 말도 공허할 뿐입니다.”
명백한 거절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도 청명은 조금도 동요 없이 현풍신개를 보았다.
이윽고 현풍신개가 얼굴을 투박하게 훔치며 말했다.
“하지만…… 검존께서 제게 그저, 그저 당신을 도우라 하신다면…….”
눈물이 걷힌 자리로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뿌연 시야로 여전히 생생히 떠오르는 광경이 있다.
피 묻은 검처럼 솟아오른 산. 그 산을 두고 비겁하게 돌아서던 그때.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용기를 내지 못했던 그때. 평생 아물 틈도 없이 그의 가슴을 날카로운 비수처럼 후벼파던 기억.
만일 그때 돌아서지 않았다면, 뒤늦게라도 용기를 내어 십만대산에 올랐다면, 적어도 이토록 후회하며 비참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텐데.
안개보다도 짙은 미련이 이곳의 시간과 겹쳐졌다.
“어찌…….”
그토록 버석거리던 마른 몸에서 쏟아진다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 긴 세월을 살고도 이 눈물을, 이 감정을 설명할 수 없을 듯했다.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현풍개가 그날 돌아서며 등 뒤에 남겼던 건 그저 청명과 결사대뿐만이 아니다. 그는 그날 현풍개를 현풍개로서 있게 해 주는 붉은 피를 두고 돌아섰다.
말라붙은 고목 같던 몸에 다시금 붉은 피가 돌기 시작했다. 신념이었고, 삶이었으며, 또한 그의 모든 것이었던 뜨거운 피(義血)가.
“당신이 원하신다면, 이미 빛바래고 초라해진 의기일지언정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
백 년의 세월 동안 뛰지 않았던 심장이 다시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