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5화. 그럴 필요 없어. (5)
격정을 감추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물끄러미 보던 청명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스스로 뱉은 말이 전신을 맴돌고 휘돌아치는 기분이었다.
“후.”
짧은 호흡을 뱉으며 밀려드는 감흥을 애써 밀어 낸 청명은 다시 잠잠해진 눈으로 현풍신개를 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쉽지 않았을 텐데.”
현풍신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에 물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처음에야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어투에 살짝 투정이 어려 있었다. 청명은 굳이 그 사실을 탓하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지켜보면 볼수록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계에 계실 화산의 영령들이 굽어살핀다 해도 불가능하지요. 그토록 어린 검수가 그 많은 일을 해낸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지금껏 청명의 정체를 의심한 이들은 제법 있었으나 그중 누구도 이런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부정하려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으로 치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검……존이시여. 세상에는 분명 존재합니다. 죽음이란 종착을 거슬러 역천에 이른 이들이 말입니다. 이미 검존께서도 만나 보지 않으셨습니까?”
“……달뢰라마인가?”
“그러합니다.”
서장의 달뢰라마. 포달랍궁의 수장인 그가 죽음과 환생을 반복하여 수백 년간 포달랍궁을 이끌고 있다는 건 강호에도 꽤 널리 전해진 사실이다.
다만 워낙 황당한 이야기라 믿는 이가 드물 뿐.
청명은 조금 쓰게 웃었다.
- 그 아비지옥과도 다를 바 없는 삼아승지겁을 어이 걸으려 하느냐.
과거에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스쳤다. 그 기억을 끊은 건, 현풍신개의 마른기침 소리였다.
“그리고…… 쿨럭, 검존께서도 짐작하시겠지만…….”
“그래.”
청명이 담담히 대답했다.
“하나 더 있겠지, 아마도.”
“……제 생각도 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 굳이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둘에게도……. 아니, 오히려 그들에게 가장 불길하고 두려운 이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검존께서도 그들처럼 다시 태어나실 수도 있다. 그리 생각하고 나니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간 화산검협 청명의 정체를 이해하기 위해 고민한 모든 시간이 어리석게 여겨질 정도로 명쾌하게…….”
“왜 나라고 생각했지? 그저 과거 화산의 검수 중 하나라 여길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현풍신개의 두 눈에 다시금 뿌연 물막이 차올랐다.
“아직…… 아직도 눈에 선한 것을요……. 화산의 무복을 입고, 그 검으로 마교의 악도(惡徒)들을 거침없이 베어 넘기던 검존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제가 어찌 다른 분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까.”
현풍신개가 고개를 내저었다.
“검존께서 그 어린아이의 몸으로 보여 주신 수많은 것들이 저를 확신하게 했습니다. 검존이 아닌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제가 개방의 방주이기 때문에 알 수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전쟁을 겪은 이라면 누구라도 같은 결론을 내렸겠지요.”
청명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랬었군.”
청명의 말을 끝으로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기대하지 않았던 조우. 준비도 없이 맞닥뜨린 서로인지라 할 말이 그리 쉬이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 언제였지? 내가 검존이라 확신하게 된 게?”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명백했음에도, 그럼에도…….”
현풍신개의 손이 덜덜 떨렸다.
“확신에 가까운 의심만 가졌을 뿐,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북해의 일을 보고받고, 항주에서의 일을 듣고, 해남으로의 여정을 모두 지켜보면서도…… 감히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
“어쩌면 저는 그저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검존이기를 너무도 바라면서도, 동시에 결코 아니길 빌었습니다. 이리 당신을 뵙기를 고대하고 또 고대하면서도, 영원히 이 순간이 오지 않길 빌었습니다.”
“…….”
“용서하십시오, 검존……. 부디 용서, 용서를…….”
긴 시간을 눌러 온 회한과 참회의 눈물이 주름진 얼굴을 흠뻑 적신다.
“제가 검존께 지은 죄를 어찌 갚을 수 있겠습니까. 개방이 그 대산의 결사에서 지었던 죄를 무슨 수로 갚겠나이까? 천하가 화산에 저지른 죄를 어찌…… 어찌 감히 입에라도 올리겠습니까…….”
청명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저……. 그저…….”
통곡하지 않지만, 현풍신개는 분명 절규하고 있었다. 청명은 알 수 있었다.
이곳에 누워 있던 이는 멸문 직전까지 몰렸던 개방을 다시 일으킨 위대한 영웅도, 숱한 세월 강호의 뒤편에서 암약해 오던 흉수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는, 나약하고 초라한 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 몸부림을 바라보던 청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 일이다.”
“검존…….”
“네가 할 수 있는 일 같은 건 없었어. 그건 그저 내가 어리석어 벌어진 일일 뿐이니 네가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현풍신개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노인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이건 용서가 아니다. 그저 현풍신개를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 주려는 청명의 배려일 뿐.
하지만 이러한 작은 배려조차 현풍신개에게는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서였나…….”
진실에 도달한 청명의 얼굴에 씁쓸한 회한이 묻어났다.
만일 이와 같은 일을 벌인 게 다른 이였다면, 청명은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검으로 단죄하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라 비틀어진 노인에게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거로군.”
현풍신개는 몸을 떨며 침묵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빛이 바래지도 않고, 여전히 눈만 감으면 그 당시의 공기와 냄새까지 또렷하게 펼쳐졌다.
모두가 벌레처럼 하찮게 죽어 가던 그 순간. 인세에 강림했던 그 지옥의 편린.
“……저는…… 저는 믿었습니다, 검존.”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현풍신개의 눈이 청명을 좇았다.
“이 모든 희생이 무의미하지 않을 거라고. 희생된 모든 거지의 목숨이 반드시 미래를 열 것이라고.”
“…….”
“하지만…… 결국은 무의미했던 겁니다. 거지들의 죽음도, 대산에서 죽어 간 이들의 의지도, 그리고…….”
“나의 검도.”
차마 잇지 못했던 말을 청명이 대신 툭 던졌다. 현풍신개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의 검조차 무의미했지. 그래, 돌이켜 보면 말이야.”
청명의 두 눈에도 짧은 회한이 깃들었다. 현풍신개가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존께서 돌아가……. 아니, 떠나신 후 강호를 틀어쥔 건 저 비열한 작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교의 잔당들을 의도적으로 방치했고, 또한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철저하게 지워 나갔습니다.”
“그 행위에는 당연히 개방의 협조가 필요했겠고.”
“……그렇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겠지. 개방도 화산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할 순 없었을 테니까.”
현풍신개는 대답 대신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개방을 다시 부흥시킨 방주. 그건 표면만 본 이들의 평가였다.
현풍신개는 스스로 방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기까지 그저 철저하게 저들의 꼭두각시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의문은 풀렸군.”
청명이 씁쓸하게 중얼댔다.
“줄곧 이해가 가질 않았지. 구파 놈들이 정말 화산을 지우려 했다면, 단순히 마교도들이 화산을 습격하는 정도에서 만족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미 더럽힌 손, 드러나지 않게 화산의 숨을 끊어 놓을 방법 따위야 얼마든지 있었을 거고.”
“…….”
“그럼에도 화산은 완벽히 망하지는 않았다. 피 흘리고 비참한 몰골일지언정 숨은 붙어 있었지. 마치…… 누군가가 어떻게든 그 명맥만은 이어 놓으려 애를 쓴 것처럼.”
흡사 꿰뚫는 듯한 청명의 시선이 현풍신개에게 닿았다.
“너였더냐?”
현풍신개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감히…… 감히 속죄라고 말씀드릴 만한 일은 아닙니다. 저 혼자만의 힘도 아니었고 말입니다.”
“……그래. 그랬었군.”
청명의 입술 새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두 눈에 옅은 허무가 덧씌워졌다.
우습다. 원망하고자 해도 원망할 이가 남아 있지 않다.
모든 일을 앞장서서 저지른 이들은 그 대가를 치르지 않은 채 이미 죽어 버렸으니까.
지금 이 세상에 남은 건, 자신들이 무엇을 밟고 서 있는지도 모르는 이들뿐이다. 그들에게 죄를 묻는다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물론 이 역시 이미 생각하고 한차례 결론을 내렸던 일이니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저 홀로 삭혀 왔던 일을 다른 이의 입으로 들으니 속이 쓰릴 따름이다.
“그래서 개방이 저들에게 협조하지 못하게 만든 건가?”
“…….”
“적어도 다시 구파의 주구가 되지는 않기 위해?”
현풍신개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는 덜덜 떨리는 고개를 애써 내저었다.
“아닙니다, 검존. 그런 것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저를…… 저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검존. 저는 검존의 그런 안온한 시선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이입니다.”
현풍신개가 제 얼굴을 움켜잡는다.
“제가…… 제가 그토록 기개 있는 이였다면, 이 더러운 목숨을 어찌 지금까지 부여잡고 있었겠습니까? 저는 그런 인간이 못 됩니다. 저는 그저 하찮은…… 그저 하찮기만 한 놈일 뿐입니다.”
“…….”
“저는…… 검존이 아닙니다. 저는 검존처럼 될 수 없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보시지 않았습니까? 겪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시지 않습니까?”
현풍신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그의 안을 잠식했던 죄의식이 밀려나고, 그 빈자리로 청명 또한 익히 아는 감정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를!”
별안간에 비명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노인의 표정은 낯설지만 익숙했다. 그건…… 차마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잠식된 인간의 얼굴이었다. 온몸이 흡사 학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경련했다.
“아, 알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들은 무시하고 외면했지만, 저는 알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정보를 다루는 이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알 수 있었습니다…….”
“……천마인가.”
“흐으…….”
현풍신개가 눈을 까뒤집었다.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찢기고 마는 것처럼. 그는 더듬더듬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그가……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걸……. 그가…… 그 저주받을 악귀가 다시 저 마교 무리를 이끌고 이 땅에 올 거라는 걸!”
“…….”
“그리고 우리는 다시는…… 그를 상대할 수 없다는 걸 말입니다. 종말입니다. 강호의 종말이자 세상의 종말. 결코 피할 수 없는 정해진 결말이 오고 있습니다.”
현풍신개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나마 침착하게 대화를 했던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다시 반송장 같은 초라한 노인이 되었다.
“그저…… 그저 모래성일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강호가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다 해도, 그건 백사장에 헐겁게 지어진 모래성일 뿐입니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들어 해안에 닿는 순간, 맥없이 허물어져 쓸려 가고 말…….”
“…….”
“이걸 알면서 어찌…… 어찌 모두에게 말하겠습니까? 그 모래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어차피 무의미한 것을……. 그럴 거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하찮은 삶이나마 평안히 누리는 게 낫지 않습니까…….”
청명은 순간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결국은 현풍신개도 마찬가지였다. 그 지독했던 전쟁과 천마의 존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금껏 살아온 것이다.
생존자이자 찌꺼기, 그리고…….
죄인.
그래, 마치 청명처럼 말이다.
“그래서 저는…….”
하나.
“됐다. 그럴 필요 없어.”
청명이 단호히 현풍신개의 말을 끊었다.
“검존……?”
“네 넋두리는 들을 만큼 들었어.”
청명이 현풍신개를 쏘아보았다.
“너는 결말이 정해져 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아니, 설령 결말을 바꾸지 못할지라도 앉아서 마냥 기다리지는 않아.”
“…….”
“그러니 내게 말해라. 개방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크게 뜨인 현풍신개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