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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94화 (1,495/1,567)

1494화. 그럴 필요 없어. (4)



모두가 숨죽이며 현풍신개를 응시했다.



무거운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건, 이 모든 것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한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대체 무슨…….”



이송백의 눈이 잘게 떨렸다.



믿지 않을 수 없지만,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저 노인의 말대로라면, 구파와 오대세가의 장문인들이 희생된 이들을 철저하게 버렸다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그중 당연히 종남의 장문인도 있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대체?”



이송백이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려는데, 혜연이 말없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



이송백과 눈이 마주치자 혜연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라며 만류하는 듯했다.



이송백이 침묵하자 현풍신개가 다시 입을 뗐다.



“그 말은 그리 틀리지 않았네……. 돌이켜 보니 알겠더군. 나 역시 그저 비겁한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을. 내 목적을 위해 수많은 이들을 사탕발림으로 구슬리고 희생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선배님.”



“십만대산의 정상에 오른 결사대는 결국 천마의 목을 베었네.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말이야. 하지만……. 그래. 우리가 목숨을 걸어 소탕해야 했던 마교의 잔당은, 어떤 피해도 없이 섬서로 몰려갔지.”



현풍신개의 입에서 쿡쿡 자조 어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습지 않은가? 저 먼 십만대산에서부터 강남을 뚫고, 장강을 넘고, 다시 섬서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중원을 종단하는 그 먼 길……. 그 지독한 행보 속에 희생된 게 오직 화산뿐이라는 게.”



“선배님?”



“그게 정말 우연이었을까?”



“……뭐?”



“검존께서 천마의 목을 베었다. 그걸 누가 지켜보았을까? 그 전에 이미 그 산에 있던 모든 마두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말은 설마…….



과거였다면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도로만 보았을 때는 그 거리를 실감하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인지. 지독하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먼 길을, 다름 아닌 그들의 두 다리로 직접 달려 보았으니까.



“검존께서 천마를 베었다는 것이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 하지만 오히려 마교만은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 그게 정말…… 정말 우연이었을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송백의 입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백천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짧게 다듬어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정작 말을 꺼낸 현풍신개는 담담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나는 마냥 그들을 욕할 수도 없네. 나 역시 그저 숨죽였으니.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어. 마교의 잔당들이 화산을 짓밟기 위해 달려가는 걸 뻔히 보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내가 믿어 왔던 의기는 다 거짓이었던 걸세.”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손이 덜덜 떨며 얼굴을 감쌌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 의기가 거짓이었다면, 그 의기 아래 죽어 간 이들은 다 무엇이었던가? 나는……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무엇을 위해…….”



누구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얼마나 살았는지 가늠도 되지 않을 만큼 늙어 버린 노인이 이토록 아이처럼 흐느끼는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라도 차마 위로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청명은 여전히 냉정했다.



“그래서 개방을 이리 만든 건가?”



“……저 아이는 나를 훌륭한 방주라 했지만…… 그건 틀린 말이외다.”



현풍신개가 공허하게 텅 빈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으니까. 반쯤 무너진 세상은 부랑자와 거지들로 넘쳐났소. 그런 이들을 방도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개방은 다시 과거의 위세를 되찾아 갔지.”



“…….”



“하지만 나는…… 그들을 보며 그저 죄악감과 불안감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오. 언젠가는 이들도 과거에 희생되었던 그들과 같은 길을 걷겠지. 의혈개방. 의혈……. 그 천형과도 같은 글자가 다시금 이들을 사지로 끌고 가겠지.”



넋두리하듯 중얼대던 노인이 청명을 마주 보았다.



“……내가 틀린 것입니까?”



“…….”



“내가 어찌해야 했습니까?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나 홀로는 무엇도 바꿀 수 없는데. 이미 운명이 정해졌다면, 적어도 이 가여운 이들에게 희생되는 삶만은 주지 않겠다고 생각한 게…… 잘못입니까?”



노인의 목소리는 절박하게까지 느껴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백천은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말투가 계속 바뀌고 있다. 노인이 혼란을 느끼고 있는 듯도 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때 청명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더니 느리게 다시 뜨며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버텨 왔다는 건가?”



“…….”



“사술을 익혀 수명을 강제로 연장하면서까지? 지독한 고통이 뒤따랐을 텐데?”



현풍신개의 입에서 바람 새는 듯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육체의 고통 따위…… 고통도 아니지요. 나는 개방을 바꾸고 싶었지. 하지만 누구도 내 말을 이해해 주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소. 그래서 그들이 알지 못하도록 천천히 개방을 바꾸었지. 그럼에도…… 여전히 그 의기를 이기지 못한 이들이 나타난다오.”



“…….”



“그 때문에라도 살아야 했소. 이 음습한 골방에 몸을 감추는 한이 있더라도, 제자의 제자, 그 제자의 삶을 이곳에 묶어 고통을 겪게 하더라도, 나는…….”



현풍신개가 불현듯 말을 멈추었다. 청명의 시선 때문이었다. 흡사 사람을 꿰뚫는 듯한 그 눈빛에, 현풍신개는 잘게 몸을 떨었다.



“화산검협…….”



“…….”



“나는…… 나는 죽는 게 두렵소. 죽어 먼저 간 이들을 마주할까 봐 두렵소. 그래서 죽을 수가 없소……. 그래서…….”



청명이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노인의 눈동자에 회한과 공포가 스쳤다.



“육신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오래도록 겪는 것이, 먼저 간 이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테니까. 그래서……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죽음을 피했다오. 어떻게든…….”



진득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살아 숨 쉬는 것조차 죄스러웠지만, 죽을 수도 없소.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망자. 그게…… 그게 바로 나라오.”



백천의 입에서 짙고도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저 알고자 했다. 개방을 뒤에서 흔드는 자가 누구인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건 너무 지독한 이야기가 아닌가.



“어찌 오셨소…….”



노인이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시 내게 저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라 오신 거요……? 내게 또 다른 죄악을 저지르라 하시는 거요? 이 억겁의 세월로도 갚지 못했던 죄인데, 거기에 또 무엇을 더하려 하시는 거요. 어찌 오셨소. 어찌…….”



백천은 차마 더 보지 못해 눈을 감아 버렸다.



저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안 들었다. 백 년 가까이 쌓여 온 의지를, 굳을 대로 굳어 버린 마음을 누가 바꿀 수 있겠는가?



현풍신개가 처연한 얼굴로 고개는 내저으려는 그때, 청명이 입을 열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



“잘못을 저지르고.”



“…….”



“죄를 범하지.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죄를.”



현풍신개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때로는 내가 말해 온 모든 걸 부정하고, 내 삶의 전부라고 믿었던 것을 시궁창에 처박지. 그리고 이를 변명하며 부정해.”



청명이 노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게 사람이다. 추악하고 끔찍하지.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사람은 살아가.”



“…….”



“당신의 길이 틀렸다고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옳다고도 할 수 없어.”



“……무엇이 옳지 않았던 것입니까?”



“이해받지 못할 거라 여긴 것.”



“…….”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 지레짐작하여 홀로 모든 걸 감당하려 들었던 것.”



현풍신개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건 고독을 가장한 도피야. 내가 없어지면 다시금 무너질 모래성에 지나지 않지. 아무리 화려해도 모래성은 모래성일 뿐이다.”



청명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천상루주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건 또 다른 희생을 만들어 낼 뿐이야.”



노인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청명과 천상루주를 번갈아 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갈등하는 듯하던 노인이 서서히 입술을 벌렸다. 푹 잠긴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였다.



“자리를…… 자리를 잠시 비켜 주거라. 모두.”



“사부님. 그건…….”



“그리해다오.”



천상루주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현풍신개의 눈빛을 보니 지금은 거역해선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내려갑시다.”



다른 이들 역시 별말 없이 그런 천상루주의 뒤를 따랐다. 오직 한 사람, 청명만이 정해져 있던 약속처럼 그 자리에 남았다.



백천이 뭔가 미련이 남은 듯 마지막으로 뒤를 흘끗 보다 아래층으로 향했고, 청명은 그 즉시 기운을 넓게 펼쳐 소리를 차단했다.



이제 이곳에서 나는 소리는 오직 청명과 현풍신개,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화산검협.”



“……말씀하세요.”



둘만 남은 순간 청명의 말투가 조금 어색해졌다.



하지만 현풍신개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없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대의 이야기를 한참 전부터 듣고 있었소.”



“…….”



“처음에는 불편했지. 내가 외면했던 화산, 차마 고개 돌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그 화산을 다시 일으키는 이가 나타난 거니까.”



청명이 말없이 현풍신개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그대의 행적을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나는 한가지 의구심을 버릴 수 없게 됐다오. 정말 이 모든 것이…… 천고의 재능을 타고난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 가능한 일인가.”



“…….”



“그렇게 그대를 지켜보던 나는 결국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지. 그렇기에……. 그렇기에 나는 너무도 두려웠다오. 그대를 마주하는 게.”



한없이 회한에 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두려웠고, 또한 기대했지. 그건 지독한 고통이되, 또한 더없는 환희였네.”



말라비틀어진 손이 청명에게로 뻗어졌다. 덜덜 떨리는 그 손은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현풍신개는 기어코 멈추지 않고 그 손을 모두 뻗었다.



“마…….”



주름으로 가득한 입술에서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맞으……. 맞으십니까?”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메마른 얼굴을 모두 적실 만큼 펑펑 쏟아진 눈물이 턱 끝에 맺힐 틈도 없이 뚝뚝 떨어졌다.



“제, 저의 생각이 맞습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제가, 제가 당신을 뵙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현풍신개의 몸이 애처롭게 떨렸다. 염왕을 앞에 둔 죄인도 이토록 떨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휘청이는 몸을 필사적으로 다잡으며 청명을 응시했다.



“제발…….”



그런 현풍신개를 가만 바라보던 청명이 눈을 감았다.



짧은 기억.



어느 날에 스쳐 지나듯 만났던, 아직 젊은 날의 현풍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매화검존을 더없는 선망의 시선으로 보았던 장년의 현풍개가.



“그래.”



청명의 입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무도 오래 머금었던 말이다.



스스로 내뱉을 날이 올 거라고는 믿지 않았던 그 말.



“내가…….”



조금은 어색한 그 말이, 혀끝에서 떨어져 나가듯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내가 검존이다.”



현풍신개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차마 어떠한 말도 못 하고 삐걱대는 것 같은 신음만 흘렸다.



그러다 이내 필사적으로 양손을 제 가슴 앞으로 모았다. 그는 깍지 낀 주먹을 청명을 향해 내밀었다.



“개방의 현풍개가…….”



깊이 수그러드는 고개에 더없이 큰 공경이 담겼다.



“감히…… 감히 검존을……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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