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3. 그럴 필요 없어.(3)
현풍개가 외쳤다.
"왜 가지 않는 겁니까!"
흡사 피를 토하는 듯 처절했지만, 듣는 이들의 반은은 무심하기만 했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 입니다! 저들이 천마의 발을 묶고 있는 동안 잔당을 소탕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마교는 언제고 다시 중원을 노릴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소방주."
어디선가 들려온 냉정한 목소리가 현풍개의 노기를 억지로 짓눌렀다.
"소방주 역시 아시잖소. 마교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오. 어쩌면 공멸조차 각오해야 하겠지."
"애초에 그 각오는 하지 않았습니까!"
"천마가 어찌 되는지 지켜본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소. 나 역시 검존이 천마를 벨 수 있다고는 믿지 않지만......세상에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현풍개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검존께서 천마를 죽이면? 저들을 그냥 돌려보내겠다는 겁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중원에 대한 적의를 품은 마교도들을 그냥 돌려보낸다고요? 언제고 이 중원을 다시 침공할 이들을 이대로 보내겠다는 것입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원시천존. 현풍개께서는 일단 진정하시오."
"진정이라니, 이런 상황에!"
"마교도들이 위협적이라고는 하나, 천마가 없으면 결국 오합지졸에 불과하오. 오합지졸을 굳이 건드리고 몰아붙이는 건 벌집을 건드리는 것과 다르지 않소."
"오합지졸?"
현풍개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그 오합지졸들에게 죽어 나간 무당의 문도들은 다 뭡니까?"
"......말을 가리시오."
"장문인들께서도 마교와 주교들의 힘을 아실 것 아닙니까? 삭초제근 하지 않으면 저들은 언제고 이 중원을 다시 침골할 것입니다!
저들의 뿌리를 뽑을 유일한 기회가 지금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 저들을 대산으로 보낸 게 아닙니까? 그 목숨으로 기회를 만들어 내기 위해!"
"소방주......"
"그러지 않을 거라면 저들은 왜 대산으로 간 것입니까? 결사대는 무엇을 위해 대산을 올랐습니까? 다 같이 갔어야지요, 여기서 이렇게 손가락만 빨고 구경할 것이었다면!
그대들도 산 위에 올랐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왜 여기에 있습니까! 당신들은 왜 이곳에 있습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현풍개는 흡사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심장을 토해 낼 기세였다. 몇몇 이들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증오에 찬 눈으로 노려보는 현풍개와, 조금도 움직일 마음 없이 침묵하는 이들. 그 대치 상황에 내려앉은 정적이 황량한 대지를 타고 불어온 바람에 흔들렸다.
"아미타불"
누군가가 불호를 외며 정적을 깼다.
"소방주는 마음을 다스리십시오."
"방장!"
"우리는 두려워서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를 염려할 뿐입니다. 모든 것을 건 승부에서 패한다면 중원이 어찌 되겠습니까?"
"그게 뭔......"
현풍개는 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개소리다. 그저 개소리일 뿐이다.
진정 중원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저들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마교는 항상 그랬다. 한번 쳐들어오고 나면 그 뒤에는 더욱 강해져서 돌아왔다.
지금 모든 걸 걸어 막아야 할 정도라면, 다음에는 모든 걸 걸고도 절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수도없이 말했다. 수도없이.
그렇기에 현풍개 역시 모든 것을 퍼부은게 아닌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가족 같은 사형제를 적진 한중간으로 급파했다. 그가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애도 한번을 하지 못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자를 천마의 움직음을 파악하기 위해 떠나보냈다. 그 아이는 한 줌의 핏물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했다.
죽어 갔다. 죽어 가고, 또 죽었다.
셀 수도 없는 그 생때같은 목숨을 몇이나 버리며 여기까지 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금밖에는......"
"그만하시오, 소방주."
누군가가 차갑고 냉정하게 현풍개의 말허리를 잘랐다.
"마교가 다시 발호할 것인지는 정해지지 않은 먼일이오. 고작 그 정도에 모든 것을 걸 수는 없소이다."
"지금 뭐라고......"
"아니, 오히려 마교가 돌아올 수도 있기에 지금 모든 것을 걸어서는 안 되는 거요. 만일 마교가 다시 돌아왔을 때, 강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을 막겠소?
저 천마가 살아남았을 때, 우리가 없다면 누가 그를 막겠소? "
으드득.
현풍개가 이를 갈아붙였다. 앞에 선 이를 노려보는 눈에 핏발이 가닥가닥 섰다.
"그럼 애초에 그렇게 말했어야지"
"......"
"이미 대산에 오른 이들에게도 그리 말했어야지! 그대들이 목숨을 걸 동안 우리는 여기서 구경이나 하겠다고, 그렇게 말했어야지! 우리 역시 목숨을 걸겠다는 말로 기만하지는 말았어야지!"
그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이게 정말 중원을 위한 일입니까? 장문인들께서 목숨이 아까워 지어낸 변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놈이!"
패도가 실린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현풍개의전신을 후려치듯 울렸다.
"다들 진정하십시다."
그때,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달아오른 주변을 진정시켰다.
"저는 소방주께서 이리 말씀하시는 연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연유라고 하셨습니까?"
"이 모든 건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나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
"무음신개께서도 이미 동의하셨소이다."
현풍개가 충격에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지금 뭐라고......?"
"개방의 방주이신 무음신개께서 동의하셨다 했습니다. 그럼 설마 우리가 개방을 속이기라도 한 줄 아셨습니까?"
현풍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고 말았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세상이 아래로 푹 꺼지는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무음신개라는 말이 현풍개를 그리 만들었다. 아찔한 감각 속에서 현풍개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짜내었다.
"......방주께서, 방주께서 왜......"
수많은 눈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안타까움 실린 눈빛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저 냉정하리만치 무심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상황을 지켜볼 것입니다."
"......"
"때로는 뜨거운 협의보다 차가운 이성을 중시해야 할 때가 있소이다. 소방주께서도 개방의 방주가 되실 분이니 그 사실을 늘 기억하십시오."
"......흐"
현풍개는 자조 어린 비웃음을 흘렸다.
"말은 바로 합시다. 이성이 아니라......이득이겠지요."
"소방주!"
"장문인들께서 원하는 건 그저 이대로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저 목숨이 아까운 것뿐 아닙니까?"
"말씀을......"
"좋습니다. 그럴 수 있지요. 사람이 제 목숨 아까워하는 걸 두고 뭐라 하겠습니까? 하지만......"
으드득.
현풍개의 입술에 이가 파고들었다.진득한 피 한 줄기가 악물린 턱을 타고 흘렀다.
"적어도 그럼 저들을 저리 보내서는 안 되는 거였소이다."
"......"
"적어도 가슴에 혈기밖에 없는 이들에게 그 목숨으로 타인의 목숨을 지키라고 떠들어 대선 안 되는 것이었소."
"......"
"적어도! 제 몸을 지킬 무학조차 없는 이들에게! 너희 역시 저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소리만은 지껄여서는 안 되었소이다! 강호를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내 귀에 감언을 늘어놓지는
않아야 했소! 모든 것을 걸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개 같은 말을 지껄이지는 말아야 했단 말이오! 내 말 무슨 소린지 아시겠습니까?"
현풍개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먼 산꼭대기를 가리켰다.
"강자에게는 강자의 의무를 요구하고, 약자에게는 약자의 협의를 요구하면서! 정작 그대들은 무엇을 내어놓았소?"
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 비겁하기 짝이 없는 주둥이로 대답해 보시오, 어디!"
"이놈이......"
덩치 큰 사내가 막 거품을 물며 진노하는 찰나, 누군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방주."
"뭡니까?"
"그럼 소방주는 뭐가 다르오?"
"......뭐라고?"
질문을 던진 이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 생각하셨다면, 소방주께서도 소방주의 의무를 다하셨어야 하는 게 아니오?"
"......"
"그 손으로 개방도들을 하나하나 지옥으로 밀어 넣으면서, 소방주는 무얼 하셨소? 그대의 말대로라면 가장 먼저 목숨을 걸었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소방주 아니시오?"
현풍개의 몸이 움찔 떨렸다.
"나는......"
"나만 비겁하다면 수치스럽겠지만, 세상 모두가 비겁하다면 그리 나쁜 게 아니지. 그리고 소방주. 적어도 우린 위선자는 아니외다."
"......"
"하는 행태는 우리와 다를 거 하나 없으면서, 그 입으로는 협의를 지껄여 대는 그런 위선자는 아니란 말입니다."
"그, 그 입 닥치시오!"
사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무음신개께서 부상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시기에 소방주께서 개방을 이끌고 계시지 않소. 그러니 소방주의 말이라면 개방은 당연히 따를 것이오."
사내가 산 뒤편을 가리켰다.
"설령 우리가 함께하지 않는다 해도, 개방이 그 의기를 증명하기란 어렵지 않잖소? 설마 이제 와 완전한 삭초제근이 아니면 그 수를 줄이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하시지는 않겠지요?"
현풍개의 손이 덜덜 떨렸다.
"증명해 보시오, 소방주. 그 피 끓는 의기를. 그 대단한 협의를. 그 목숨과 개방의 운명을 걸고 증명하시오.
그럼 우리는 앞으로의 평생을 개방의 의기를 숭상하며 보내겠소. 어떻소? 당연히 그럴 용기가 있으시겠지요?"
명백히 비웃음 어린 말이었다.
하지만 현풍개는 아무런 반받고 할 수 없었다. 그저 떨고, 또 떨고, 가슴으로 고함치는 것 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 따위 없으니까.
"고고한 자가 비열한 자를 비웃는 건 당연하지만, 비열한 자가 비열한 자를 비웃는 건 우습지요. 설마......그대는 그대 자신을 대단한 협의지사로 생각하셨소?"
"나는......"
"지금 강호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을 뿐이오. 저 산에 오른 이. 그리고 오르지 않은 이."
"......"
"모두가 장님이 된 세상이라면, 두 눈을 뜬 자가 칼에 찔니는 법. 하지만 다행이오. 적어도 내게는......"
사내의 신랄한 조소가 현풍개의 온몸을 찌르는 듯했다.
"소방주 역시 눈이 있어 보이지는 않으니 말이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리는 듯한 분노가 휘몰아쳤다. 하지만 사내는 분노하는 현풍개를 무시하고 드높은 산 정상을 주시했다.
"협의에 눈이 먼 자는 그 협의를 관철하고, 이득에 눈이 먼 자는 그 이득을 관철하며, 맹종에 눈을 먼 자는 그 맹종을 관철하니.
세상이 참 순래대로 올바르다는 생각도 드오. 모두가 원하는 걸 손에 넣지 않았소이까."
사내가 옅은 웃음을 흘리고 몸을 돌릴 때였다.
"......죽어."
"음?"
"그대들이 언젠가 죽어, 먼저 죽어 간 이들을 만난다면......그때는 뭐라고 하실 셈입니까? 그 입으로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합니까?"
"아직 그런 이야기를 믿고 있소?"
사내가 나직이 웃었다. 잠시 후, 짧은 불호가 사내가 해야 할 대답을 대신했다.
"아미타불.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겠소이까?"
"......"
"어차피 인생은 고해요. 그 고통을 피하려 함이 때로는 더 큰 죄악을 낳는 법이외다."
"이......"
"소방주께서도 이해하리라 믿소. 아니......"
노승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해하셔야 할 것이오."
모두가 몸을 돌리고 현풍개에게서 멀어졌다.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이었으나 현풍개는 그들을 막지도, 따라붙지도 못했다.
"어......"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 뿐.
넋을 놓고 먼 산을 바라보다가, 다시 제 주변을 멍하니 둘러보았다.
때에 절은 작은 곤봉이 눈에 툭 걸렸다. 그가 직접 사지로 보냈던 제자의 유품이다.
현풍개의 입에서 짓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흐으......"
무엇을 위해 죽어 갔던가?
"흐으으으으으."
대체 무엇을 위해 그들을 지옥으로 멀어 넣었던가?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절규는 누구의 귀에도 닿지 못했고, 누구의 마음도 흔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