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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92화 (1,493/1,567)

1492화. 그럴 필 요 없어.(2)



심장이 죄어들고, 숨조차 잘 쉬어지지 않았다.



마교대란.



수없이 들어 온 말이지만, 이 노인의 입에서 나온 네 글자는 지금껏 들어 왔던 거과 전혀 다른 무게로 느껴졌다.



"......아미타불."



그 무거운 분위기 속, 혜연이 나직이 불호를 외었다. 탄식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시주께서......마교대란을 두 눈으로 보신 분이란 말입니까?"



혜연의 물음에 노인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어, 어찌......"



혜연은 쉬이 믿기 어렵다는 눈으로 노인을 응시했다.그럼 이 노인의 나이가 지금 대체 몇이란 말인가?



"사, 사형. 그때 살아 계셨다는데요?"



"으음."



크게 당황한 조걸에 비해 윤종은 비교적 태연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건 아니잖으냐. 당조평 어르신 같은 경우도 있고."



"아......그렇네요."



그 순간, 모두의 귓가에 낮은 청명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심하다 못해 다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색채가 없는 음성이었다.



"죄인이라......"



다른 이들은 '생존자'라는 말에 주목했지만, 청명은 '죄인'이란 말이 귀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무슨 의미지?"



노인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게끔 빤히 보던 노인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대란은. 그 전쟁이라 부를 수도 없는......지독했던 참변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휩쓸었소."



"......"



"모두가 피해자였지. 죄 없이 죽어간 이들,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숨이 끊긴 이들, 살아남았으되 평생을 고통에 신음해야 했던 이들......"



이내 주름진 노인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두려움과 껄끄러움, 그리고 진득한 죄의식이 엿보였다.



"하지만 나는......나는 아니오. 나는 그 죄악의 피해자가 아니라 그 죄를 저지른 자니까."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을......"



"그때, 나는......"



노인이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토해 내듯 말했다.



"개방의......소방주였다오."



"......뭐?"



모두가 충격에 눈을 부릅떴다.



지금이야 강호에 젊은 소가주나 소문주가 드물지 않지만, 당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인적인 흐름에 어떤 지장도 없던 그 당시에는 문주란 으레 예순 이상인 경우가 많았고,


소문주라 하더라도 최소 마흔 이상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데 그 시절에 소문주의 자리에 오른 이라면......



"그, 그럼 지금 대체 몃 살이란......"



"걸아!"



"죄, 죄송합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만."



조걸이 즉시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충격을 지우지 못하고 휘둥그렜다.



'못해도 백 하고도 서른인가? 아니 백 하고도 쉰일 수도 있어.'



경지에 오른 무인이 백 세 넘게 장수한다는 건 들어 봤지만, 이만큼이나오래 산 이를 두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정말인가?'



여전히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 조걸은 유심히 노인을 살폈다. 그때, 백천이 경계심이 누그러지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노인장께서 당대 개방의 소방주셨단 말입니까?"



"그러하오. 장문대리."



"......선배님을 뵙습니다."



백천은 조금 얼떨떨한 목소리로 예를 표했다. 어쨌든 응당 예를 표해야 할 상황이니 말이다. 다른 화산의 제자들도 그런 그를 따라 자신을 개방의 소방주 였다고 칭한 노인에게 예를 표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은 예를 표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풍백(風伯)무음신개(無音神丐)와는 무슨 관계지?"



"그분께서 내 스승이오. 마교대란 당시 스승께서 개방의 방주셨고."



"자, 잠시만!"



그 순간 이송백이 화들짝 놀라 말한다.



"풍백 무음신개의 제자시라면......혹시 선배님께서 현풍신개이십니까? 과거 개방의 방주셨던?"



노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내가 현풍개라 불렸던 그 거지일세."



"세, 세상에......"



이송백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살짝 휘청였다. 영문을 모르는 화산의 제자들이 물었다.



"이 소협. 아시는 바가 있소?"



"예?"



"현풍신개! 마교대란 당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사분오열 났던 개방을 정비하고, 다시 방도들을 충원했던 전설적인 방주란 말입니다. 근 백 년의 강호사를 논함에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분입니다!"



"엑?"



조걸과 그 무리들이 고개를 획 도려 노인을 다시 보았다.



곧 관에 들어갈 것 같은 이 노인이 정말 그리 입지전적 인물이란 말인가?



"하지만 적어도 오십 년 전에는 승하하셨다고 들었는데, 설마 아직 살아 계셨을 줄은......그것도 이런 곳에서......"



이송백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끔뻑였다.



배분으로 따지자면 말을 썩을 엄두도 나지 않는 이다. 심지어는 종남의 장문인도 감히 이 앞에선 허리를 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이를 앞에 두고 있자니 다리가 휘청거릴 수밖......



"영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 것 같은데."



"헉"



하지만 청명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오히려 막말을 툭 뱉었다. 이송백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도, 도장! 그러시면 안......"



"죄인이라는 게 무슨 의미지?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숫제 으르렁거리는 청명을 보며 이송백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미, 미쳤어.'



청명에게서 파격을 빼면 설명이 어렵다는 건 잘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선을 넘었다. 한참 넘었다.



현풍신개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게 강호에 알려진다면, 강호의 숱한 노강자들이 청명을 거꾸로 매달고 껍데기를 벗기려 들 것이다.



하지만 가만보면 다소 기이했다.



까마득한 후배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를 눈앞에서 들은 당사자, 즉 현풍신개가 전혀 불쾌해하지 않는다. 



'이럴 수가 있나?'



물론 현풍신개는 그럴 수도 있다. 그에게 있어 청명은 증손자뻘도 되지 않는, 까마득히 어린 후배니까. 무릎에 올라 수염을 당긴다 해도 귀여워 보일 수 있겠지.



그러나 그들의 뒤에 있는 천상루주, 당대 개방의 방주까지 이 상황을 좌시하고 있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이상한 건 개방뿐만이 아니다 청명도 마찬가지다.



청명이 버릇없단 말을 종종 듣기는 하나, 이렇게 노인에게까지 무작정 적의를 드러낼 만큼 안하무인에 막무가내는 아니다.



'그리고 이건 저의가 아니라......'



살기?



청명에서서 흘러나온 서늘한 살기가 현풍신개에게로 흘러갔다. 이를 느낀 천상루주가 막 움직이려는 찰나, 현풍신개가 손을 들어 그런 만류했다.



"끼어들지 말거라."



"하나 사부님. 저......"



"끼어들지 말라 했느리라."



현풍신개에게서 뿜어나온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천상루주를 단번에 짓눌렀다. 그러자 기세만큼은 어디서도 뒤지지 않을 것 같던 청상루주가 변변한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가만히 고래를 숙였다.



"쿨럭. 쿨럭."



현풍신개가 마른기침을 힘없이 뱉더니 청명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상상하는 그런 건 아니외다. 화산검협."



"......"



"그런 짓은 저지를 수 없소. 그 전쟁을 눈으로 본 이라면 마교의 발을 핥을 수는 없지.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소이다. 그러니 그 노여움을 그만 거두시오."



청명의 어깨가 그제야 조금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럼? 무슨 의미예요? 죄인이라니."



'아......'



이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그제야 이 비정상적인 대치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깨달았다.]



죄인이란 말과 자신의 생존마저 숨겨야 하는 삶.



그 두 가지를 고려했을 때, 청명은 이자가 중원을 배신한 자일지도 모른다고 여긴 것이다.



청명의 눈빛에서 살기가 사라지자 현풍신개가 깊은 탄식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 대란에서......"



현풍신개의 두 눈이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했다.이제는 세상에 없는 곳, 과거의 어딘가를 말이다.



"나는 수만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



"......"



"수도 없는 이들, 다 셀 수도 없는 이들, 그들을 모조리......모조리 전장으로 내몰았소이다. 모조리."



현풍신개의 앙상한 어깨가 천천히 들썩이기 시작했다.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둔중하고 눈눅한 공기가 그들의 주위로 내려앉았다.



"사형제도, 제자도......개방이란 이름 아래 있는 자라면 그게 누구라도 사정없이 적진으로 내몰았소이다. 그래야 하니까. 그래야만 적들을 파악할 수 있으니까."



"......아미타불."



혜연이 고래를 내저었다.



"그게 어찌하여 선배님의 잘못이겠습니까. 그건 누구라도......"



"전시의 개방이 어떤 곳인지 아는가?"



현풍신개는 혜연이 건넨 위로를 잘랐다. 얼핏 냉겅하기까지 한 기세에, 혜연은 저도 모르게 섣불리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마교도의 손에 부모를 잃은 이도, 제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도, 수중에 남은 게 단 하나도 없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이도......전시에는 모두 거지가 되어 개방으로 흘러 들어온다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노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그런 이들을 적진으로 내몰았소. 복수하기 위해서는 그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부추기며 고작 열 살 먹은 아이의 손에 칼을 쥐여 줬다오. 돌아오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그저 목숨이 언제 끊기는가로 적들의 유무를 파악하기 위해."



백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마교와의 전쟁이 얼마나 처참했는지야 수도 없이 들었지만, 이런 이야기까지는 들은 적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죽음과 피가 '큰 피해' 라는 말 아래 뭉뚱그려진 걸까.



"어린아이가 고사리손으로 단도를 부여잡은 채 강남으로 향하는 모습을 나는 그저 지켜보았소. 아니, 오히려 그 등을 떠밀었지."



현풍신개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흡사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는 알았다. 현풍신개의 표정을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하는 말은 결코 변명이 아니다



"그래야만 이길 수 있으니까. 그래야만 멸망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래야만!"



현풍신개의 손이 덜덜 경련을 일으킨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는 현풍신개의 손을 빤히 바라보던 당소소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선배님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



"누구라도 결국엔 그래야 했을 거예요.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잘못된 건 마교잖아요!"



"아이야......"



현풍신개의 입가에 처연한 미소가 걸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단다."



마른기침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기침할 때마다 그에게선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빠져나가고 있는 건 그의 생이 아니라, 남겨 두었던 미련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키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내가 그 수많은 걸 희생하고 버려 가며 지켜 낸 게 무엇이었는지를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나도 그리 생각했지."



현풍신개의 두 눈이 짙은 회한으로 물들었다.



"내가 죽음으로 내몬 이들의 희생이 한낱 버러지들의 이득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가만히 읊조리던 노인의 얼굴이 점점 괴이하게 일그러지고 뒤틀렸다. 그 얼굴은 웃는 듯도 했고 우는 듯도 했다.



현풍신개를 응시하던 청명의 두 눈에서도 옅은 씁쓸함과 우일이 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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