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1화. 그럴 필요 없어. (1)
'뭐......?'
잘못 들은 건가?
그럴 수도 있다. 아니, 알 수가 없다.
혼탁하게 흐려진 노인의 두 눈에서는 그 어떤 진의(眞意)도 알아낼 수 없었다.
"......뭐라 한 거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에 청명의 눈이 번뜩였다. 반쯤 윽박지르듯 의식 흐린 노인을 재촉했다.
하지만 노인의 안개 낀 듯한 눈은 천장 쪽에만 멍하니 꽂혀 있었다. 청명에게는 그 어떠한 반응도 보여 주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했냐고......!"
"청명아?"
백천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청명이 보인 격한 반응에 당황한 것이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노인을 노려보던 청명이 깊고 긴 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동요로 가득하던 얼굴이 서서히 돌아왔다. 노인은 여전히 목내이(木乃伊) 같았다.
'이자가 개방을 암중에서 조종해 온 이라고?'
인지조차 없는 노인은 사람보다 나모토막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이런 자가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당혹감은 이내 노기로 변해 갔다. 그때, 등 뒤에서 천상루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러서시오."
위층으로 따라 올라온 천상루주가 성큼성큼 걸어와 노인이 누운 침상 곁에 섰다.
"......네가 보여 주려던 이가 이 사람인가?"
"그렇소."
청명의 눈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게 뭐 하자는 짓거리지?"
"오만은 언젠가는 자신을 망치는 법."
"뭐?"
"그대는 대단하지만, 그대가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오. 그게 역사든, 아니면 지식이든."
청명의 눈이 의문으로 물드는 찰나, 개방주의 손끝에 시커먼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도무지 정공(正功)으로는 보이지 않는 음울한 기운. 정파인 개방의 방주가 운용해서는 안 될 기운이다.
"너?"
파아아앗!
천상루주의 손이 빛살처럼 날아들어 노인의 몸을 연이어 찔렀다. 눈 한 번 깜짝할 틈에 이루어진 수십 번의 타혈. 기식이 엄엄한 노인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행위로 보였다.
"무슨......!"
"뭐 하는 짓거립니까!"
"소, 소소야! 어서!"
오검이 당황하여 막아서려는데, 청산루주가 서늘한 목소리로 잘랐다.
"도인들은 수행을 통해 그 삶을 연장하려 하지."
"......뭐?"
"물론 궁극적인 목적이야 깨달음을 통한 등선이겠지만, 양생과 연단을 통해 그 수행의 기간을 늘리는 것 역시 도인들의 목적일 터."
천상루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삶을 연장하는 방법에는 반드시 수행을 통한 경지의 상승만 있는 건 아니오. 몇 가지를 감수한다면 수명 자체를 늘릴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오로지 청명만이 천상루주의 말뜻을 이해했다.
"......귀식(龜息)인가?"
"아는군."
청명의 시선이 다시금 노인에게로 향한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길 것처럼 퍼렇고 거무죽죽하던 노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하, 잘도 이런 미친 짓거리를."
청명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조걸이 물었다.
"청명아. 그게 무슨 소리야? 귀식이라니?"
"귀식대법(龜息大法)이다."
"귀식대법? 그건 은신할 때 숨죽이는 방법아니냐?"
"그렇지."
"갑자기 그게 왜 나와? 이거랑 상관이 있어?"
"......귀식대법은 소리를 없애는 게 아니라, 몸의 활동을 줄이는 거야. 심장을 느리게 하고, 그리하여 피가 천천히 돌도록 하지.
동굴 같은 데 갇혔을 때 먹지 않고 오래 버티기 위해서도 사용하는 이유가 그거야."
곧장 알아들은 당소소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렇죠. 활력을 줄이면 소모되는 기운이 주니까요."
"......이자는 그 귀식대법을 항상 펼치고 있는 거다. 자신의 의식조차 없앨 정도로."
"예?"
당소소가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 어떻게 그런......?"
"어쩐지. 바로 머리 위에 있는 자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노인을 주시하는 청명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심지어 평범한 귀식대법이 아니야. 고루공(骷髏功)에...... 유마공(柔魔功)인가? 잘도 개방 거지가 서장과 천축의 무공을 익힐 생각을 했군.
당장 찢겨 죽어도 할 말 없는 짓일 텐데."
순간 천상루주의 두 눈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 그저 잠시 보는 것만으로 이자는 노인이 사용하고 있는 공력의 근원을 간파해 낸 것이다.
"......듣던 대로 그대는 정말 알 수 없는 자로군."
청명은 천상루주의 말에 대꾸해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노인에게만 꽂혀 있었다.
말라붙은 나무토막 같았던 노인의 몸이 점점 부풀어 오른다. 놀랄 정도로 확연하게 바뀌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 존재하지 않았던 생기가 노인의 몸에 들어차고 있는 것 정도는 보였다.
"쿨럭!"
마침내 노인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고, 동시에 초점 없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부릅뜬 눈은 아까보다 확연히 산 사람의 것 같았다.
천상루주가 외쳤다
"사부님!"
'사부?'
화산의 제자들이 화들짝 놀라서 노인을 다시 보았다.
개방 방주의 스승이라면, 이 말라붙은 노인이 개방의 태상방주라는 말인가?
""......물......"
"예, 사부님!"
청산울주가 미리 준비해 온 물병을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은 희미 하게 떨리는 손으로 물병을 받아 입가로 가져갔다.
이미 여러 번 해 본 일인 것처럼 여유가 있었다. 서두르지 않고 물을 여러 번에 걸쳐 입 안에 흘려 넣은 노인이 긴 숨을 내쉬었다.
사방으로 독한 약향(藥香)이 퍼져 나갔다.
당소소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쳤어......자기 스스로는 깨어날 수도 없는 귀식대법이라니. 그건 말 그대로 동면이잖아......"
만약 천상루주가 변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노인은 이 어두컴컴한 밀실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 채 말라 죽을 것이다.
세상 어떤 이가 그런 위험을 굳이 감수하려 들겠는가.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소소의 이 의문은 노인이 풀어 주었다.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으로.
"나를......"
"예."
나를 일으키라는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천상루주가 노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벽에 기대앉은 노인은 두어 차례 기침을 하더니 힘없이 중얼거렸다.
"......또 깨어......난 건가......?"
"송구합니다, 사부님. 다른 수가 없어서 그만."
"......되었다"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한결 맑아진 눈빛이 청명을 주시했다
"내 앞에 서 있는 화산 사람들만 보아도 상황은 알겠구나. 그래. 결국은 여기까지......"
청명의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의식도 없었다는 인간이 잘도 알아보는군. 우린 종남의 무복까지 입고 있는데 말이야."
그 말에 노인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꿈틀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미소를 지은 것이리라.
"수도 없이......들어 왔기 때문이외다."
"......"
"화산검협 그대와 화산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손에 잡히도록 숱하게 들었지."
청명은 피식 웃어 버렸다.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만큼이나 감시가 철저했다는 뜻이겠지."
"그럴지도......굴럭!쿨럭!"
이 정도의 대화도 힘에 부치는 듯 노인은 사이사이에 몇 번이나 마른기침했다.
"사부님!"
"비켜라."
천상루주가 부축하여 다시 누뷰히려 했지만 노인은 단호히 밀어 내었다. 자세를 정돈하는 모습이 조금 전 누워 있던 노인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단정했다.
이 광경만 보아도 노인이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쉬이 알 수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노인이 담담히 말했다.
"여기까지 오셨다는 건......그렇구려. 나를 죽이려 오셨구려."
청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저 말투가 신경을 자꾸 긁어서였다.
"필요하다면 그러려고 했지."
"......"
"하지만 딱히 그럴 필요까진 없어 보이는데?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너는 이미 한계로군. 그렇지 않아?"
노인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공들여 부정할 필요도 없다.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어야 할 늙은이가 대체 뭔 미련이 남아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지? 숨만 쉰다고 사는 건 아닐 텐데? 자신이 역겹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나?"
"청명아!"
"이 미친놈아! 개방의 태상 방주시라잖아!"
"입조심해라!"
화들짝 놀란 오검이 만류했지만 노인은 힘겹게 한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을 잠재웠다. 백천이 면목없는 얼굴로 어렵게 입을 뗏다.
"태, 태상방주님, 죄송합니다. 저놈이......"
"......마라."
"예?"
"함부로......끼어들지 마라."
백천이 입을 꿑 다물었다. 청명을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무게가 노인의 눈빛과 기운, 나아가 온몸에 실려 있었다.
여전히 겉모습만 보았을 땐 파리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어 보이는 백발노인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엄만큼은 숱한 고수들을 겪어 온 백천에게도 생경할 만큼 대단했다.
아마도 무위가 아닌 살아온 삶으로 전하는 무거움. 이 노인이 지나온 세우러의 깊이가 주는 무거움이리라.
"역겹다라......"
노인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천수가 다하면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의 순리. 이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히 용서받지 못할 죄이지요. 도인인 분께 이런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하외다."
"말 돌리지 마. 뻔한 이야기나 늘어놓자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니까. 대답해. 넌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이 빛도 들지 않는 컴컴한 밀실에 처박혀서 무슨 수작을 벌이고 있었던 거냐?"
"......화산검협."
문득, 노인의 입에서 허무 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엇이 궁금하신 것이외까......내가 왜 개방을 이리 만들었는지?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아직 살아 버티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외까?"
"어차피 같은 대답이겠지. 안 그래?"
청명의 이가 사납게 드러났다.
"대답해 봐 이런다고 개방이 대체 뭘 얻을 수 있지?"
노인은 대답 없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천상루주를 지그시 보았다. 조바심과 갑갑증이 일 즈음에야 노인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저 아이는 나를 사부라 불렀지만......정확히 말하면, 나는 저 아이의 스승이 아니외다."
"......아니라고?"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린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화산검협."
노인이 잘게 떨리는 고개를 힘겹게 돌려 청명을 마주 보았다. 진물이 낀 노인의 눈가로 회한이 번졌다.
"지금 내 나이는 일백이 한참 넘었소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오?"
"......뭐?"
"나는......"
노인의 눈동자 안에 순간적으로 수많은 감정이 격정적으로 몰아쳤다.
절망, 회한, 슬픔, 그리고 고통.
"나는......과거 그 지독했던 마교대란의 생존자."
청명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차마 죽지 못한 과거의 찌꺼기, 살아 숨 쉬어서는 안 될 천고의 죄인이오."
노인의 고개가 아래로 축 처졌다. 앙상한 고목나무(枯木나무)같은 전신에 떨림이 퍼져 나갔다.
더께처럼 쌓인 회한과 두려움이 온 방 안에 내려앉았다. 도잇에 질식할 것처럼 무거워진 고익가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숨통을 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