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490화 (1,491/1,567)

1490화. 널 찾아온 게 아닌데? (5)



“방주님 뒤에 누군가 있다?”



백천이 중얼거렸다. 천상루주를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에 의혹이 어렸다.



“흑막이라도 있단 거냐? 서, 설마 사파? 장일소가?”



“이 양반이 강남에서 머리라도 다쳤나? 아무리 그래도 개방이 그렇게 졸로 보여? 마교도 아니고 장일소 따위한테 장악당하게?”



“……미안하다. 요즘 뭐만 하면 장일소 생각부터 나서.”



“흑막이면 차라리 일이 쉬워지지. 잡아다 목을 잘라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럼?”



“이건 흑막 같은 게 아냐. 저 방주는 진짜겠지만, 진짜 방주가 아닌 거지. 가짜도 아니고, 진짜도 아니다. 그저 여기에 있을 뿐이야.”



청명의 말을 진지하게 듣던 백천이 제 사형제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윤종과 조걸도 같은 표정으로 그를 마주 봐 왔다.



‘걱정 마십시오, 사숙. 저희도 뭐라는지 모르겠습니다.’



‘너희가 있어서 고맙다.’



눈빛으로 따뜻한 사제애를 주고 받은 백천은 이내 자괴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청명이 말했다.



“진실을 감추는 제일 좋은 방법이 뭔 줄 알아?”



“칠 할의 그……. 진실이 어쩌고 하는 그거 아니냐?”



“진실 사이에 숨기는 거야.”



“응?”



“정보를 다룬다는 놈들은 보통 그러거든. 가짜 사이에 진짜를 숨기지 않아. 오히려 진실 사이에 진짜 진실을 숨기지. 그러면 사람은 보통 눈에 보이는 진실만 확인하려 들거든.”



“알 것 같다. 이런 곳에서 개방의 방주를 만나서 그가 하는 말을 들은 이라면, 이 뒤에 또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거란 소리지?”



“정확해. 기껏해야 저 사람이 진짜 개방주가 맞는가만 확인하려 들었겠지.”



백천이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 역시 그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슬쩍 돌아보니 다른 이들의 표정도 그와 비슷했다.



‘이건 우리 잘못이 아닙니다.’



‘아니, 솔직히 좀 수상하잖아.’



‘믿을 게 있어야 믿지!’



대충 그들의 마음을 안다는 듯 청명이 피식 웃었다.



“저 양반이 진짜 방주인지 확인하고, 개방 내부의 알력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보려 드는 순간 오히려 함정에 빠지는 거지.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거든.”



“……중요한 건 그 뒤에 있다는 거구나.”



“정확해.”



청명이 천상루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정답이지?”



청명은 웃었지만, 천상루주는 웃지 않았다. 그새 안색을 정비한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담담하고 멀끔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군.”



“흐음?”



“내가 개방의 방주고, 개방의 일은 내가 결정하네. 망상은 그 정도로 해 두지.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근거는 차고 넘치지. 바로 그쪽이 준 근거가 말이야.”



천상루주가 입을 닫았다. 청명을 보는 눈빛이 탐색이라도 하는 듯 매서웠다. 잠시 후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내가 근거를 줬다고?”



“응.”



“……무슨 근거를 줬다는 건가?”



“당신의 말은 다 그럴싸해. 그런데 한 가지가 빠져 있어. 그 모든 논리에는 단 한 가지 확신이 필요해.”



“그게 뭔가?”



“세상이 반드시 지옥으로 뒤바뀔 거란 확신. 거지들이 모조리 죽어 나갈 만한 전쟁이 반드시 벌어진다는 확신.”



천상루주의 눈이 찰나간 흔들렸다.



“거지들이 장강참변 이후로 급작스레 무능해졌다면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잖아. 이건 요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니야. 오히려 더 일찍부터 시작되었지. 개방의 거지들이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고 말이야.”



“그건…….”



“알겠어?”



청명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당신 말대로라면, 당신은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겁을 먹어 자신을 스스로 무능하게 만드는 머저리에 불과하단 이야기지.”



천상루주가 대답 없이 청명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청명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지. 개방의 방주라고 해서 항상 유능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말을 조심하는 게…….”



“하지만 의심스러운 건 그런 게 아니지. 진짜는 당신이 했던 말들이야.”



“……뭐?”



“당신이 나에 대해 말하는 걸 보면 아주 재미있었어. 정보로만 사람을 접한 전형적인 반응 같아.”



“그게 뭐가 이상한가? 사실인데.”



“맞아. 사실이니 이상할 게 없었지. 네가 이송백에 대해 무심코 주절주절 늘어놓기 전에는 말이야.”



천상루주의 얼굴이 확 굳었다. 청명이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송백이라는 인물보단 청명이라는 인물을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런데 이송백에게는 ‘내가 아는’이라는 말을 주저하지 않고 쓰면서, 나에 대해선 ‘듣던 대로’라는 말을 쓰거든. 그건 딱 하나를 의미하지. 나에 대해 평가를 한 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그저 타인의 평가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



“그렇지?”



천상루주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천은 보았다. 책상에 놓인 그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그 손을 책상 아래로 숨길 생각을 못 했을 만큼 내심으로는 동요한 것이리라.



“그건 너무 억지가 아닌…….”



“기다려. 아직 제일 중요한 게 남았으니까.”



청명이 천상루주를 쏘아보았다.



“내가 당신 뒤에 누군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흑막은 아니라고 한 이유는 하나야. 당신의 분노는 진짜였거든. 그런데 내가 봤을 땐 그게 정말 우습단 말이야.”



“어째서지?”



“당신이 왜 화를 내? 직접 겪어 보지도 않았고, 희생을 강요당해 본 적도 없는 이가?”



“…….”



“그릇된 걸 두고 저항하는 것과 원한을 품는 건 달라. 그런데 당신은 마치 직접 모든 일을 겪었던 피해자인 것처럼 말해 대더군. 유례없는 평화기를 산 당신이 말이야.”



천상루주는 영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의 분노가 잘못되었다는 건가?”



“아니. 정당하지. 당연히 정당하겠지. 하지만…… 정당한 게 꼭 자연스러운 건 아니잖아.”



“……모르겠군.”



“너는 모를 거야. 알 수 없지, 절대. 머리로 이해해서 분노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알 수 없어.”



하지만 세상 모두가 알 수 없어도 청명은 알 수 있다.



천상루주가 내뿜는 분노는 그가 이 세상에 가진 증오와도 결이 같다.



그렇기에 이상한 것이다. 천상루주는 그가 겪은 것을 겪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감정에 공감하겠는가?



많은 정보가 있기에? 개방이라 역사를 모두 알고 있기에? 그건 말이 안 된다. 역사를 알던 다른 문파의 장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만 봐도 안다.



“그러니 결론은 뻔하지. 당신이 방주인가 아닌가는 내 알 바 아니야. 중요한 건 개방을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은 따로 있다는 거지.”



천상루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웃기지도 않는 망상이로군.”



“…….”



“나는 또 다른 답을 알지. 내가 자네만큼 똑똑하지 않아서 좋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 또한 내가 과거의 일로도 충분히 분노할 수 있을 만큼 감정적인 사람이다.”



“…….”



“더는 그 헛소리를 들어 줄 수 없군. 그만 돌아가라. 이젠 진절머리가 나니까.”



“안 그래도 그럴 셈이야. 허수아비를 잡고 지껄이는 취미 같은 건 없다.”



청명은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저 네 주인에게 똑바로 전하기나 해.”



“뭘 전하라는 건가? 자네의 헛소리?”



“아니.”



뒤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 청명은 차갑게 일갈했다.



“도망쳐 봐야 달라질 건 없다.”



“…….”



“이 한마디면 돼. 알아처먹을 테니까.”



청명은 일행을 향해 턱짓했다.



“가자. 시간 낭비했다.”



“……진짜 가냐?”



“저건 전서구 같은 거야. 할 말을 실어 뒀으니 전해지겠지.”



“안 전해지면?”



“알 게 뭐야.”



심드렁하게 툭 뱉은 청명이 막 문으로 향한 그때였다.



“그렇다면!”



천상루주의 목소리가 청명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들끓는 목소리였다.



“자네는 그 하잘것없는 것을 위해 죽어 갈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할 텐가?”



“아무 말도 못 해.”



청명은 우뚝 멈춰 서선 말했다.



“아무 말도 못 했지.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야.”



“……이러고라니?”



“내가 할 말을 찾기 위해서. 그 죽음이 가치 없지 않았다고 말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거지. 필사적으로.”



잠시 문 너머를 응시하기라도 하는 듯 허공을 노려보던 청명이 이내 조용히 웃었다.



“신경 쓰지 마. 헛소리니까. 나도 늙었다니까.”



손을 휘휘 젓고는 휘적휘적 발을 뗐다.



“가자.”



“……응.”



마지막에 오간 대화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은 자명했다.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명의 뒤를 따라나섰다.



“……기다리게.”



하지만 천상루주가 다시 한번 청명을 잡았다.



청명이 슬쩍 천상루주를 돌아보았다. 입술을 꽉 깨물며 청명을 노려보던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째서…….”



“음?”



청명의 시선이 순간 천상루주를 떠나 위쪽으로 꽂혔다.


통. 통.



미약하나 분명히 들렸다.



그들이 서 있는 곳 위의 천장에서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린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등잔 밑에 또 등잔이 있었군.”



“후.”



천상루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나눈 대화 중 대체 어떤 것이 저 위까지 전해진 걸까?



“원하시니 어쩔 수 없군. 만나게 해 주지.”



“……호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걸세.”



“이제 와 협박이라도 하는 건가?”



“……만나 보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걸세.”



천상루주는 앉은 자세 그대로 책상 아래 어딘가를 건드렸다.



“오?”



“와…….”



“여기 기관이 있었다고?”



모두가 감탄하는 가운데, 천장의 한편에 쩌적 선이 생겨났다. 이윽고 기다란 계단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여기 칠 층이 전부 아니었어?”



“밖에서 보기엔 분명 그랬는데?”



“처마 밑에 공간을 좀 더 뺀 모양이에요. 나도 못 느꼈는데.”



당소소는 알아차리지 못한 게 분한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올라가면 된다.”



계단이 다 내려오자 천상루주가 그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오검은 살짝 껄끄러운 심정으로 계단과 그 위로 뚫린 시커먼 공간을 바라보았다.



“……함정은 아니겠지?”



“함정이면 뭐 어쩔 거야. 그냥 가 보자.”



“끄응. 불안한데.”



모두가 청명의 눈치를 살폈다. 정작 청명은 딱히 겁날 것도 없다는 듯 이미 계단에 발을 디밀고 있었다.



“……저 새끼는 간을 무쇠로 만들었나.”



오검이 진저리를 치며 서둘러 뒤를 따랐다.



위로 올라 보니 이 공간이 왜 눈에 띄지 않았는지 바로 이해되었다. 키가 조금 작은 편인 청명조차도 똑바로 서기 힘들었다. 그만큼 천장이 낮았다.



게다가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아래층과 달리, 이 밀실은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황폐했다.



“여긴…….”



청명의 시선이 어딘가로 확 끌렸다.



밀실 한편에 우두커니 놓인 침상. 곧 숨이 끊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백발노인이 누워 있었다.



“……이 사람은?”



청명도 순간 어찌해야 할지 감을 못 잡을 만큼 늙고 말라비틀어진 노인이었다.



그 노인의 앙상한 손이 느릿하게 들렸다. 힘없이 흔들리는 모양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인 듯했다.



청명은 말없이 노인의 곁에 가 섰다.



주름진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었고, 피부는 사막처럼 푸석푸석했다. 그리고 젊었을 적이 상상도 안 될 만큼 온몸이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야위었다. 한눈에 보아도 남은 삶이 얼마 되지 않았다.



전대 방주인가? 아니면 전전대?이런 자와 대체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는가.



청명이 고심하는 그때, 노인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탁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청명은 일단 입을 열었다.



“나는…….”



하지만 말을 맺지는 못했다. 알아듣기는 할까? 눈을 마주치고 있는데도 살아 있는 사람 같질 않았다. 대화가 될 거란 기대조차 들지 않았다. 이자는 말 그대로 숨이 붙어 있을 뿐이다.



기껏 찾아낸 개방의 머리가 이런 꼴이라니. 이래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밀려오는 탈력감에 청명이 막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였다.



“……검(劍)…….”



노인의 입에서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청명의 얼굴에 의문이 스쳤다.



검이라니, 뭔 말을 하고 싶어서…….



“……존(尊).”



청명이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우득!



가볍게 짚고 있던 손이 노인의 침상을 움켜잡으니 금 가는 소리가 울렸다.



당혹과 의문, 희미한 공포가 청명의 머릿속을 폭풍처럼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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