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485화 (1,486/1,567)

1485화. 네가 여기서 갑자기 왜 나와? (5)



“……청명.”



백천과 다른 화산의 제자들이 서로 눈짓했다.



‘들켰는데요? 사형?’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토낄까요?’



‘이 미친놈아. 토끼면 인정하는 게 되잖아!’



‘그럼 어떻게 합니까?’



모두의 시선이 백천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지금 마땅한 대응을 찾을 수 없지만, 화산의 당당한 장문대리 백천이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크, 크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 저희는 종남 사람입니다만?”



‘망했다.’



‘조졌다.’



‘저 양반 한 번씩 저러더라. 모가지 삐걱대는 것 봐.’



부정을 시도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부정을 시도하는 백천의 연기가 누가 봐도 ‘내가 범인이요’를 외치고 있는 게 문제였다.



“화, 화산은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문파니, 말씀을 조심해 주셨으면 좋겠소. 나는 그 화산검협 청명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가 갈리는 사람이니까!”



어, 이 말에는 반쯤 진심이 담겨 있었다. 확실히 백천이 청명 소리만 들어도 이를 갈아 대기는 하니까.



하지만 상대는 아무리 봐도 이런 어설픈 연기가 먹혀들 이가 아니었다.



“사숙.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차라리…….”



“그러시군요. 실례했습니다.”



“예. 그냥 때려 부……. 예?”



조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시선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에게로 향한다.



“천녀가 오해하여 실수한 모양입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인이 깊이 고개를 숙이자 화산 제자들이 얼이 빠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다시 고개를 든 여인이 정중히 입을 열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제게 종남의 영웅분들을 최상층으로 모실 기회를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어…….”



“가, 감사합……니다?”



화산 제자들이 다시 서로를 돌아본다.



이거 진짜 가도 되는 건가?



상황이 이리되어 버리자 조금 전까지는 선계로 오르는 길 같았던 계단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지옥문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합니까? 사숙!’



‘난들 아냐고!’



주변 놈들의 필사적인 옆구리 찌르기에 백천이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오르시겠습니까?”



여인의 재촉 같은 말에 모두의 시선이 결국에는 한곳으로 향했다.



“흐음.”



안색을 굳히고 여인을 노려보던 청명이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여기 주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수완이 보통은 아닌 사람 같군.”



“제가 저지른 무례는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부디 너른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길.”



여인이 과할 정도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청명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우릴 위로 올리라 한 사람이 여기 주인인가?”



“그렇습니다. 루주께서 여러분들을 보고자 하십니다.”



“흐음.”



청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투덜댔다.



“수완은 좋은지 모르겠지만, 영 예의는 없는 양반이네. 그렇게 보고 싶으면 제가 내려올 것이지.”



여인이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미소지었다.



“웃기는.”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뭐, 보여 주신다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 아, 돈은 안 내도 되는 거겠지?”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그럼 가야지.”



청명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백만 냥이 있어야 구경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을 공짜로 보여 준다는데, 일단 가고 봐야지. 안 그러냐?”



“왜, 왜 저를 보고 말씀하시오?”



“그야……. 아, 지금은 아니네. 낄낄.”



혜연을 보고 웃어젖힌 청명이 여인에게 턱짓했다.



“안내해.”



“네. 그럼 이쪽으로.”



여인이 정중하게 앞장서 계단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백천이 청명에게 바짝 붙어 속삭인다.



“야. 이거 진짜 가도 되는 거냐? 누가 봐도 들킨 것 같은데.”



“들켰으니 가야지. 여기서 꽁무니 빼면 그땐 진짜 개망신이잖아.”



“그건 그런데…….”



“끄응.”



청명이 앓는 소리를 냈다.



“루주인지 개뼉다귀인지. 보통 너구리가 아니네. 무공을 모르는 여인으로 응대를 하니, 뭐 손을 쓸 방법이 없잖아.”



청명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용담호혈이 더 상대하기 쉬웠다.



보이는 족족 대가리를 깨 버리면 되니까. 어떤 면으로 보면 이런 주루는 마교의 본단보다 더 손쓰기 어려운 곳이다.



“여튼 올라가자. 너구리가 나올지, 여우가 나올지. 그도 아니면 늑대가 나올지.”



“……족제비나 잘 넣어.”



“들어가 인마!”



청명이 고개를 내미는 백아의 머리를 검지로 꾹 누르고는 발을 옮겼다.



“……생각보다는 평범한 것도 같고.”



“좀 그런 느낌이죠?”



백천과 윤종의 얼굴에 묘한 실망이 피어났다.



일층이 워낙 화려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막상 계단을 오르며 보이는 다른 층의 광경은 그렇게까지 신기하지 않았다.



층을 올라가며 보이는 건 대부분 계단과 이어진 좁은 복도, 그리고 그 복도 좌우에 줄지어 배치된 커다란 문들뿐이었다.



“평범이요?”



“내버려 둬요, 사형. 모르는 게 나아.”



“……그렇겠지.”



“그래도 사숙은 좀 알 줄 알았는데.”



“있는 집 자식이라 해 봐야. 돈 없는 무가 기준이지.”



“……너희 지금 나 욕하냐?”



조걸과 당소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백천과 윤종은 저리 속 편히 말해 대지만, 그들의 시선에서는 이 광경이 무섭기까지 했다.



“저 문 앞에 깔린 융단 저거……. 서역에서 온 것 같은데. 문도 자단목이고.”



“저, 저 벽에 걸린 그림 저거 곽희(郭熙) 작품 같은데……. 저, 저 비싼 걸 복도에다…….”



“……문밖이 저 정돈데, 저 안에는 무슨 짓을 해 둔 걸까.”



“상상하기 싫으니 그만하죠.”



“그래. 그게 정신 건강에 이롭겠다.”



조걸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운남은 물론 서장까지 오가는 사해상회조차 감히 취급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물품들이 복도 발 깔개로 쓰이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황궁도 이리 호사스럽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조걸, 소소의 표정을 힐끔 바라본 청명이 앞서 계단을 오르고 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여기 무인들도 많이 오나?”



“천상루는 자격이 있으신 분이라면 누구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답은?”



“……하나 사실 무인분들은 거의 들르시지 않습니다.”



청명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그렇다는 건 이 주루를 이용하는 이들은 대부분 고관이거나, 부호라는 의미였다. 어쩌면 상계의 거두들일 수도 있고.



“회원이 되어야 입장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날그날 먹고 마시는 데 드는 돈은 또 따로겠지?”



“물론입니다.”



“나도 나름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돈 버는 놈들은 따로 있었네.”



“그래 봐야 작은 주루일 뿐입니다.”



“……작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모양이네.”



청명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어 버리자 여인이 살짝 미소를 짓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흠.’



위층으로 향해도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 다른 것은 복도를 향해 뚫려 있는 문들 사이의 간격이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뿐.



그 말은 위층으로 갈수록 각 방의 크기가 훨씬 커진다는 의미였다.



“이렇게까지 은밀하게 운영할 거면, 계단에도 문을 다는 게 낫지 않나? 각 층이 이리 다를 게 없으면, 굳이 비싼 돈을 주고 더 위의 층으로 가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글쎄요.”



여인이 그건 자신이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듯 말을 흐렸다. 이에 청명이 코웃음을 치려는 찰나, 전보다 조금 작은 목소리로 여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기에 탐이 나는 게 아닐까요?”



“……음?”



“별로 다르지도,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데…….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것. 사람이란 보통 그런 것에 욕구를 느끼기 마련이니까.”



“…….”



슬쩍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본 여인이 짧게 고개를 젓는다.



“손님께서는 이상한 분이시네요. 제가 객잔을 방문하신 분께 제 생각을 말씀드린 적이 없었는데.”



“오? 그런 의미에서 일자리 바꿔 볼 생각 없어? 우리도 객청에서 일할 사람 구하고 있는데.”



“……정말 곤란하신 분이시네요.”



여인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그리고 몇 걸음을 더 떼기도 전에 그들의 눈에 주루 최상층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



때로는 화려한 것보다 상징적인 것이 더 사람의 눈을 끌 때가 있다.



칠 층에 오른 그들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이전까지와 그리 다를 게 없었다. 주루의 중앙으로 길게 난 복도와 그 좌우로 보이는 벽.



다른 것이 있다면……. 이 칠 층의 복도에서 보이는 문은 오직 셋뿐이라는 것이다.



좌에 하나, 우에 하나 그리고…….



‘중앙.’



그들이 보는 복도의 끝. 그곳에 다른 곳과는 다른 색으로 칠해진 문이 보인다. 화려하지 않고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문. 지금까지 그들이 보던 문과는 명백하게 이질감이 드는 문.



“저곳이 루주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흐음.”



화산의 제자들이 마른 침을 삼키며 그 문을 바라본다. 계단을 오르며 조금 풀렸던 긴장감이 다시금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묘하군.’



백천이 슬쩍 고개를 돌려 제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곳까지 오며 무인의 기척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 말은 이곳에 그들을 위협할 만한 요인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의 사제들은 지금 명백히 전장을 앞둔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모시겠습니다.”



“부탁하지.”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를 지나 문 앞에 도착한 여인이 공손히 몸을 낮추었다.



“루주님. 손님분들을 모셔 왔습니다.”



짧은 침묵이 복도에 내려앉는다.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청명이 막 한소리를 하려들 때.



“모셔라.”



“예. 루주님.”



여인이 조심스레 문을 잡자 조걸과 당소소의 얼굴이 순간 긴장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막상 문이 열렸을 때 그들이 본 것은 딱히 대단할 것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집무실이었다.



“엥?”



“……뭐야.”



당소소와 조걸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물론 초라한 건 아니다. 적당히 좋은 가구와 적당히 좋은 물품들을 써 잘 꾸며진 집무실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에 비하면 차라리 당가의 가주실이 훨씬 더 화려했다.



“이쪽으로.”



미처 그들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짧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이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벽 한쪽에 세워진 서가(書架). 그 서가에서 한 권의 서책을 빼 든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장식은 없지만 고급스러운 재질로 된 비단옷을 입고 있는 중년의 사내.



딱히 이렇다 할 인상이 느껴지지 않는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 쪽으로 걸어온다.



“반갑소. 내가 이 천상루의 루주요.”



‘……이 사람이?’



청명을 비롯한 일행이 막 눈을 찌푸리려 하던 그때였다.


“그래서. 천하에 명망 높으신 화산검협과 화산의 장문대리께서 어떤 용무로 나를 찾아오셨소?”



파드득.



활짝 열려 있는 집무실의 창. 그 창을 통해 날아들어 온 황금색 깃털의 작은 새가 사내의 어깨에 가볍게 내려앉는다.



“키이!”



청명의 옷 안에서 백아가 튀어나와 만리금구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본 청명의 시선이 사내에게로 다시 옮겨진다.



“아무래도.”



청명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말려 올라갔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긴 하네.”



사내의 눈빛과 청명의 눈빛이 날카롭게 얽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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