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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84화 (1,485/1,567)

1484화. 네가 여기서 갑자기 왜 나와? (4)



“휴우.”



어깨에 짊어졌던 짐을 내려놓은 운암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끝인가?’



오늘 옮겨야 할 물품은 다 옮긴 것 같다. 물론 길지 않은 밤이 지나고 나면 다시 또 다른 일이 생겨나겠지만 말이다.



“끝나셨습니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운암이 고개를 돌렸다. 사천당가의 가주 당군악이 미소를 띤 채 다가오고 있었다.



운암이 재빠르게 포권 했다.



“가주님을 뵙…….”



하지만 운암은 생각만큼 상체를 숙이지 못했다. 무형의 기운이 그의 몸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의가 과합니다. 감히 화산 장문인의 읍을 받을 수는 없지요.”



운암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영 익숙해지질 않습니다.”



당군악이 옅게 웃었다. 아무래도 불편하긴 할 것이다. 운암은 현종과 대등하게 대화하던 그를 지켜봐 왔으니까.



게다가 당군악 역시 가주의 자리에 처음 올랐을 때, 선대와 관련 있는 사람들을 대하기가 무척 어렵지 않았던가.



“일은 모두 마치셨습니까?”



“겨우 끝냈습니다.”



당군악이 진력이 다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뭔 일이 이리도 커졌는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몰려오는 사람들이 줄어 그나마 숨 쉴 틈이 간신히 생겼다. 그 전의 며칠은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일을 키우는 것 하나는 세상 그 누구도 녀석들을 못 따라가지요.”



운암의 말에 당군악이 쓰게 웃더니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하니 문제입니다. 그런 녀석들이 지금 자리를 비웠으니.”



“…….”



“또 무슨 일을 벌이려 들지. 아직 여기 일도 다 수습이 되지 않았는데.”



무겁게 말을 내뱉은 당군악이 슬쩍 운암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운암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당군악은 의외라는 듯 넌지시 말했다.



“장문인께서는 걱정이 되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물론 녀석들이 한마디 툭 던지고 달아나듯 가 버렸을 때는 저도 황당했습니다.”



“…….”



“하지만, 가주님. 저는 그 아이들을 믿습니다.”



“무엇이든 잘 해내고 돌아올 거라 여기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당군악의 눈빛에 의문이 스쳤다.



“그럼 무엇을?”



“그 아이들이 지금껏 배우고 겪은 것들을 믿습니다.”



조금 길에서 벗어난 듯한 대답에 당군악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무어라 묻기도 전에 운암이 덧붙였다.


“녀석들은 도인입니다. 세상은 녀석들의 검만을 주목하지만, 그 아이들은 이 세상에서 제 나름의 도를 찾는 중이지요.”



“아…….”



당군악이 작게 탄성을 흘렸다. 운암이 빙그레 웃었다.



“아이들의 생각과 몸가짐이 화산에서 논하는 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든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저는 그저 돌아올 아이들을 기다릴 뿐입니다.”



당군악은 퍽 흥미롭다는 얼굴로 운암을 응시했다.



아마 현종이었다면 지금쯤 떠난 아이들에 관한 걱정으로 산을 쌓았을 것이다. 하지만 운암은 확실히 현종과 달랐다. 걱정과 우려도 존재하지만, 그 위에 확연한 믿음이 있다.



“이 말을 그들이 들었으면 좋아했을 것을.”



“하하. 그저 웃고나 말겠지요.”



운암이 빙긋 웃고는 먼 동쪽을 넘겨다보았다.



‘믿고 있다, 이 녀석들아.’



그들의 모든 것이 스스로 세운 도 위에서 이루어지기를.


화산이란 이름의 도 위에서.



* * *



“……와.”



“눈 돌아간다.”



“미쳤다.”



커다란 대문을 넘은 화산의 제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쩍 벌렸다.



화려한 광경에 퍽 익숙할 게 분명한 조걸이나 당소소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사, 사형. 저거 묘안석 아니에요?”



“말도 안 돼. 어느 미친놈이 묘안석을 전각 장식하는 데 써?”



“근데 맞잖아요?”



“엄마야…….”



조걸과 당소소가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 층 전체가 화려한 보석과 비단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사해상회는 물론이고 당가조차 엄두를 못 낼 사치다.



“……현영 장로님이 이걸 보셨으면 뭐라 하셨을까?”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 돈을 똥통에 처박는다고 쌍욕을 퍼붓지 않으셨을까요?”



“그렇지?”



백천과 윤종도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지어 사치와는 거리가 먼 불도를 걷는 혜연은 거의 정신을 잃을 기세였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곳이…….”



밖에서 보는 외양도 화려했는데 내부는 그에 비할 수도 없었다. 눈이 돌아갈 만큼 번쩍거리는 장식과 달큼한 향기, 흘러나오는 악기 소리,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이리저리 뒤섞여 흡사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여기가 그 선계인가?”



“오, 사숙. 그럼 등선할 만하겠는데요?”



“벼락 맞아 죽을 놈들 같으니.”



“……윤종아. 나 네 사숙이다.”



“…….”



모두가 화려함에 넋을 놓은 그때, 우아한 궁장을 갖춰 입은 한 여인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그녀는 어정쩡하게 선 종남, 아니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웅분들께서 이리 천상루를 찾아 주시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여인이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화산의 제자들은 전보다 조금 더 움츠러들었다.



“……사숙. 그렇게 쭈그러들다가 소소보다 작아지겠어요.”



“네 꼴이나 보고 말해.”



여인은 고개를 들더니 물었다.



“어찌 이곳까지 와 주셨는지요?”



“그, 그게 말이오……. 저희가 그…… 여기 위에…….”



“아, 비켜!”



백천이 버벅거리니 성질을 못 이긴 청명이 그 얼굴을 잡아 훅 뒤로 밀어 버리고는 앞으로 나섰다.



“주루에 술 먹으러 왔지, 뭐 다른 용무가 있겠어요? 높고 전망 좋은 데로 안내해 주세요.”



“아아.”



청명의 말을 들은 여인이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흘렸다.“죄송합니다, 손님. 저희 천상루는 그렇게 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우선 신분이 확실한 분들만…….”



“뭐? 신분?”



신분이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청명이 눈알을 부라렸다.



“신분이라니! 우리보다 신분이 확실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종남 몰라, 종남?”



“끅.”



“아니, 여기가 아무리 개봉이라고 해도 그렇지! 대종남파를 몰라본다고? 내가 오늘 여기서 천하삼십육검 한번 보여 줘?”



“끄으윽.”



뒤쪽에 서 있던 이송백은 계속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는 듯 제 가슴을 콱 움켜잡았다. 흡사 심장이 잘못되어 버린 사람 같기도 했다.



‘좀 있으면 피도 토하시겠는데?’



‘근데 나 같아도 그렇겠다. 하여튼 저 새끼는 선이란 게 없어.’



화산 제자들은 조금씩 이동하여 이송백을 가리며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살짝 난처해하던 여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천녀가 아무리 우매하다 한들, 그 무복에 새겨진 고아한 구름을 모를 정도는 아니랍니다.”



“그렇지? 그럼 들어가도 되지?”



“죄송합니다, 손님.”



“응?”



“미처 끝까지 말씀드리지 못한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희 천상루는 신분이 확실하고, 천하에 명망이 높으신 분들만을…….”



“명망? 여기서 이 사람보다 명망이 높은 사람이 있어? 이분이 그 진금룡이야! 오룡 중의 금룡! 진금룡!”



멍하니 있던 백천이 화들짝 놀라 얼른 오만한 표정을 덮어썼다. 조걸이 재빠르게 윤종의 귓가에 속삭였다.



“진금룡 별호가 금룡이었습니까? 그럼 금룡 진금룡입니까? 패군 장일소, 화산검협 청명, 금룡 진금룡?”



“……그, 그랬었나?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아니, 뭔 놈의 별호를 그렇게 생각도 없이 지어 가지고…….



“그리고 이분 몰라? 종남의 그……. 어, 그래! 이송백! 별호는 아직 없지만. 대충 나중에는 종남무적검 같은 걸로 불리실 분이라고.”



이송백은 나라 잃은 얼굴로 청명의 손에 질질 끌려 나왔다. 청명이 당당하게 외쳤다.



“이래도 명망이 없어?”



“그게…….”



“이야! 여기 대단하네, 대단해. 무려 종남과 진금룡과 이송백을 아주 싹 무시하네. 아주 대단한 주루야!”



“아, 아니. 말을 끝까지 좀…….”



이쯤 되니 여인의 새하얀 이마에도 서서히 핏대가 섰다.


‘화났네.’



‘짜증 났네.’



‘그럴 만하지.’



어떤 상황에도 평정을 잃지 않을 것처럼 우아하던 여인이 슬슬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다. 분명 어느 정도는 흥미진진한 광경이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오히려 서글펐다. 그들이 항상 당하던 일이니까.



여인이 아까보다 단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저희 주루는 회원만을 객으로 받고 있습니다. 신분이 확실하고, 천하에 명망 높은 분들만이 회원이 되실 수 있으며 그 회원만이 주루에 드실 수 있습니다!”



청명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팽 쳤다.



“뭔 놈의 주루가 회원? 여기가 문파도 아니고.”



“이곳이 어딘지 잊지 마십시오, 손님. 여긴 개봉입니다.”



“…….”



“누구라도 쉽사리 오가는 곳에서는 중요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아. 그런 식이다?”



확실히 거지들이 이렇게나 우글대는 지역이니 귀가 없는 곳을 찾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거지들의 이목을 피해 개봉을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까.



청명이 하! 소리를 내고는 툭 내던지듯 말했다.



“뭐 그럼 회원이 되면 그만이지. 진금룡 정도면 되겠지?”



“물론입니다. 천하에 이름 높으신 종남의 진 대협이라면 당연히 저희 천상루의 회원이 되실 자격이 있지요.”



“그럼 가입시켜 줘.”



여인이 그 순간 오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어느 급의 회원이 되기를 원하시는지요?”“……응? 급이라니?”



“천상루는 어떤 급으로 가입하시느냐에 따라 다른 층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층에 드시기 위해서는 우선 ‘기’급 회원이 되셔야 합니다.”



“……엥? 최상층은?”



“최상층……. 최상층에 들고자 하시는 건가요?”



“응.”



여인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그러시군요. 최상층에 오르시기 위해서는 ‘갑’ 회원이 되셔야 합니다.”



“그럼 갑급으로 하면 되겠네. 그걸로 해 줘.”



“사실, 저희 천상루의 회원이 되시려면 그에 걸맞은 가입비를 내셔야 합니다.”



“가입비? 돈?”



“예, 적절한…….”



파앗.그 순간 청명이 던진 전낭이 여인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여인은 엉겁결에 그 돈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거기 있는 걸로 처리하고 남는 건 거슬러 줘. 됐지?”



여인은 전낭 안의 돈을 곁눈질로 빠르게 헤아리고는 빙그레 웃었다.



“손님. 이 금액으로는 병급(兵級) 회원권밖에 구매하실 수 없습니다. 괜찮으신지요.”



“알았어. 한 냥 가져가서 밥 사 먹……. 뭐?”



청명의 눈이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 휘둥그레졌다. 저 안에 든 돈이 얼만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벼, 병급? 을도 아니고 병?”



“그렇습니다.”



“갑급 회원권이 얼만데?”



“황금 일백만 냥입니다.”



“……얼마?”



“백만 냥입니다.”



“……얼마라고?”



“백만…….”



청명의 눈이 숫제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경악, 당혹으로 이어지던 감정은 재빠르게 치솟아 분노에까지 도달했다.



“아니, 이 미친놈들이 사기를 쳐도 유분수지! 뭔 놈의 회원권이 백만 냥이야! 백만 냥이 뉘집 개새끼 이름인 줄 아나?”



“지, 진정해라, 인마!”



“여기서 사고 치면 안 된다!”



“와, 나도 어디서 양심 팔아먹은 놈이란 소리는 수도 없이 들어 봤지만 이 나이 먹도록 이런 미친놈들은 처음 본다! 너희 오늘 우리 호구 잡으려는 모양인데, 이거 어쩌나? 너희 사람 잘못 만났어! 당장 주인 나오라고 해!”



청명이 악을 썼다. 하지만 여인은 되레 침착하게 미소 지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손님.”



“곤란해? 곤란하면 어쩔 건데? 꼬우면 때려 보시든가? 내가 힘으로 올라가겠다면 너희가 뭘 어쩔 건데?”



“어쩔 수 없지요. 관군을 부르겠습니다.”



“그래. 와 보……. 어?”



청명의 고개가 옆으로 톡 꺾였다.



“누굴…… 부른다고?”



“관군이요. 관청.”



“……어?”



이건 전혀 예상도 못 했던 답이라는 듯 청명은 얼이 빠졌다.



“아니……. 이 사람이 관무불가침도 모르시나? 상도의 없게 여기서 관이 왜 나와요?”



“물론 압니다. 그런데 여기는 무가가 아니라, 장사를 하는 주루입니다. 당연히 문제가 생기면 관을 불러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상황을 살피던 백천이 조심스레 걸어 나와 청명의 귓가에 속삭였다.



“야, 지금까지는 반쯤 농담이었거든?”



“응?”



“근데 관이랑 문제 생기잖아? 진짜로 껍데기가 벗겨진다. 장문인이 우리 머리 가죽에 대고 새로 간 한철검 성능을 확인해 보실 거야.”



두 사람이 속닥거리기만 하자 여인이 웃으며 물었다.



“어떻게, 더 행패를 부릴 생각이신지요?”



“하. 하하하핫. 하핫.”



청명의 두 눈에서 살기가 치솟았다. 화들짝 놀란 화산의 제자들이 본능적으로 그를 잡으려 달려드는 순간, 청명의 모습이 그 자리에 퍽 꺼진 듯 사라졌다.



‘아 안……!’



“실례했습니다.”



달려들었던 이들은 청명이 사라진 자리에 우르르 엎어져 버렸고, 정작 청명은 뒤로 훌쩍 물러나 있었다. 허리를 직각으로 공손히 꺾은 모습이 아주 반듯했다.



“어…….”



“어어?”



“안녕히 계십시오. 자, 다들 돌아가자.”



청명이 휘휘 손짓했다.



“거기 주저앉아서 다들 뭐 해? 안 가고. 관군 온다잖아!”



……와. 이 새끼도 안 되는 게 있구나. 허허…….



“빨리 가, 빨리!”



“가, 간다고.”



화산의 제자들이 허탈하게 몸을 돌려 주루 밖으로 나가려는 바로 그때였다.



위 층으로 통하는 화려한 계단에서 누군가가 다급히 종종걸음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아미를 찌푸리고 있는 여인의 귓가에 작게 무어라 속삭였다.



여인의 입이 열렸다.



“잠깐.”



“응?”



터덜터덜 밖으로 나서던 청명이 획 돌아보았다.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천녀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에엥?”



갑자기 이건 또 뭔 소리지?



깊게 고개 숙인 여인의 입에선 더없이 정중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조금 전의 소요는 없었던 것처럼.



“천상루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산검협 청명 도장. 지금 바로 최상층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순간 청명의 눈빛이 섬뜩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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