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481화 (1,482/1,567)

1481화. 네가 여기서 갑자기 왜 나와? (1)



“사숙.”



“……말 걸지 마라.”



“아니. 그게 아니고요, 사숙.”



“……믈 글지 믈르그 해따.”



결국 윤종은 하려던 말을 접어두고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나 싫을까?’



백천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뻣뻣했다. 몸에 종남의 의복이 닿는 것조차 꺼리는 게 느껴졌다. 징그러운 벌레로 옷을 짜도 저런 반응까지는 안 보일 텐데.



“……내가…… 내가 어쩌다가…….”



절망하는 백천의 뒷모습을 모두가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보았다.



그래도 한동안은 저런 굴욕을 당할 일이 없었는데…….



“아니, 근데 이렇게 해 놓고 보니 진짜 기가 막히네요. 저쯤 되면 아버지도 못 알아보시겠다. 형제가 어떻게 저리 똑같이 생겼지?”



“……표정이랑 옷 좀 바뀌었다고 사람이 저렇게 재수가 없어지네.”



“우리가 재수 없다고 할 때마다 억울해하시더니, 마음만 먹으면 저렇게까지 재수 없어질 수 있었던 거구나. 많이 참으셨네.”



“……아가리 드믈르그…….”



백천이 핏발 선 눈으로 뒤를 노려보았다. 모두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해 버렸다.



하지만 한번 나온 간이 도통 배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인간 하나만큼은 그 와중에도 촉새처럼 입을 털고 말았다.



“그런데 사숙. 제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지금 종남 흉내를 내고 계셔서 빡이 치신 겁니까? 아니면 형님 흉내를 내고 계셔……. 컥!”



옆구리로 강하게 파고든 일격에 조걸이 불 위의 오징어처럼 몸을 뒤틀었다.



“……매를 벌어요, 매를!”



당소소가 손을 탈탈 털며 혀를 찼다. 지금 그런 게 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아니…….”



“쉿. 저기 누구 온다.”



순간 모두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행인 중 하나가 그들을 발견하더니 반색하며 다가온 것이다.



“아! 종남의 진 대협이 아니십니까?”



오검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당소소가 빛의 속도로 손을 뻗어 살짝 비틀어진 혜연의 가발을 바로잡아 주었다.



“혹시 저를 기억하십니까? 일전에 섬서에서 한번 뵈었는데. 그때 함께 식사도 했었습니다.”



‘망했다.’



‘엿됐다.’



‘내가 그래서 이거 안 된다고 했잖아, 이 새끼들아.’



모두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심지어 이 모든 일을 주장했던 청명마저도 낭패한 얼굴로 식은땀을 쏟았다.



하지만 정작 백천은 태연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슬쩍 시선만 돌려 다가온 이를 보았다.



“음.”



다가온 이의 위아래를 짧게 살핀 그가 태연하게 입을 뗐다. 하지만 그 상대는 아니라 제 일행 쪽이었다.



“윤평.”



“…….”



“윤평!”



“예? 아……. 예, 사숙!”



윤종이 눈치 좋게 대답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잘 보아 두거라. 이게 강호에서 범하기 쉬운 무례다.”



“……사질이 우둔하여 사숙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둔한 사질을 탓해 주십시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윤종을 한차례 노려본 백천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와 친분이 있든 없든, 강호에서 상대에게 말을 걸 때는 자신의 신분과 명호를 먼저 밝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큰 무례가 된다. 명심해라. 대종남의 제자가 그런 실수를 저지른다면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윤종이 뭔가 더 반응을 짜내려는 순간, 말을 걸어온 상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하, 하남 이화문(李花門)의 고일산입니다! 몇 해 전, 섬서에서 본문의 장문인과 함께 뵈었습니다. 제가 반가운 마음이 앞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대협.”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윽고 백천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지만, 뭔가 보는 사람 입장에선 위장이 살짝 뒤틀리는 그런 웃음이었다.



“제가 말한 건 그저 종남 제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였을 뿐입니다. 타문의 분께 같은 예를 요구할 이유는 없겠지요.”



“…….”



“다만 아쉽게도, 워낙 시간이 지난지라 제가 귀하를 기억하지 못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화문의 문주님이라면 기억이 납니다만…….”



“그, 그럼요. 그 자리에 저도 같이 있었습니다. 그날 대협의 모습이 워낙 인상적이었는데, 이런 곳에서 다시 뵙게 되니 너무 반가워서 그…….”



“저 역시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백천이 상대의 말을 깔끔하게 끊어 버리고는 무감정한 눈으로 고일산를 마주 보았다.



그 차가운 눈빛에서 ‘할 말 다 했으면 썩 꺼질 것이지, 왜 아직 여기에 있지? 조무래기가?’라는 속뜻을 읽어낸 고일산은 어색하게 다시 포권 했다.



“종남이 봉문을 푼 것을 경하드립니다. 그, 그럼 다음에 문주님과 함께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때는 최선을 다해 맞이하겠습니다. 무운을.”



“무, 무운을 빕니다.”



고일산은 비굴하다 싶을 만큼 깊게 고개를 숙이고는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멀어져 갔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들의 입에서 경악 섞인 감탄이 터져 나왔다.



“쩐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완벽해.”



조걸이 몸을 부르르 떨며 속삭였다.



“사, 사숙. 연구를 한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그게 그렇게 갑자기 됩니까? 진짜 재수 없는 게 완벽하게 똑같던데.”



백천이 씁쓸한 얼굴로 먼 하늘을 보았다.



“……수백만 번은 본 것이다.”



“아…….”



많이 힘드셨겠네. 하긴, 그러니 가출했겠지.



잠시 후, 골목 어귀로 접어든 백천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제 옷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에헤이!”



“그거 찢으면 안 됩니다!”



“워워. 사숙. 조금만 더 참읍시다. 자, 착하지. 착하지.”



“사고……. 당과는 아니에요. 그건 좀 과해.”



“……그래?”



말없이 당과를 내밀고 있던 유이설이 슬그머니 손을 회수했다. 백천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어쩌다…….



“사숙. 그런데 아까 그 사람, 정말로 종남이랑 친분이 있어 보이던데 그런 식으로 대해도 됩니까? 분명히 악감정을…….”



“알 게 뭐야. 욕은 금룡이가 먹을 건데.”



……시큰둥한 백천의 대답에 모두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인간도 정상은 아니다.



“거봐! 내가 의심도 못 할 거라고 했지?”



우쭐한 기색이 완연한 목소리에, 백천은 두 눈에 핏발을 세웠다. 원독 실린 시선은 이내 낄낄대는 청명에게로 꽂혀 들었다.



“이…… 사갈 같은 새끼.”



“낄낄낄낄.”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어 저놈의 조동아리에 이 저주받을 옷을 쑤셔 박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저놈이 아니라 화산이 망신을 당할 테니 참을 수밖에.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



“왜 그렇게 부들거려. 옛날에는 매일 입고 다닌 옷이었을 텐데.”



“청명아, 그만해라. 사숙 저러다 뻥 터지시겠다.”



실제로 좀 부풀고 있다.



“그보다,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건 맞냐?”



“잠시만.”



청명이 제 가슴팍을 툭툭 쳤다. 그러자 새하얀 털 뭉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잠깐 졸고 있었던 모양으로 까만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야, 어느 쪽이야?”



청명이 묻자 고개를 쭉 뺀 백아가 코를 빠르게 쫑긋거렸다.



키이!



그러더니 짤따란 손을 뻗어 북동쪽을 가리켰다.



“저쪽이라네.”



“그나마 총단에서 좀 머네.”



“빨리 가자. 솔직히 나도 이 옷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장이 뒤틀린다.”



“네. 가요, 사형.”



“……잠시만요, 시주들. 이거 머리가 자꾸 돌아가는데 어떻게 좀…….”



“그러니까 땀 좀 흘리지 마십시오. 머리가 반질반질하고 미끌미끌하니까 가발이 자꾸 돌잖습니까?”



“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땀을 안 흘립니까?”



“안에 수건 한 장 깔아 봐.”



“그럼 부피가 커져서 어색해진다니까, 인마. 머리만 부풀어서 다니면 그건 안 이상하냐?”



혜연이 두 눈을 감고 연신 불호를 외었다.



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죄를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삶은 고해요, 인생은…….



“뒤에 누가 온다. 빨리 가자.”



“네.”



일행은 다시 그럴싸한 종남 제자를 연기하며 걷기 시작했다. 지나는 이들은 단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오히려 선망의 눈길을 보내왔다.



윤종이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입을 뗐다.



“그런데, 청명아.”



“응?”



“대체 이게 어떻게 통하는 거냐?”



“뭐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게 이렇게 어설픈데 아무도 의심을 안 한다는 게……. 심지어 여기는 개봉이잖아?”



“뭐 뻔한 소리를.”



청명이 피식 웃었다.



“의심하는 놈이야 당연히 있겠지. 그런데 의심하면 지들이 뭘 어쩔 건데?”



“……그게 뭔 이상한 소리냐? 의심이 되면 확인을 하겠지.”



“누구한테?”



“그야…….”



윤종이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도 지금 이해한 것이다.



“뭔가 의심스러워서 확인해 봤는데, 동룡이가 진짜 금룡이면 어떻게 할 건데? 그 미친놈 성격에 자기를 의심한 사람을 그냥 두려고 하겠냐?”



“…….”



“심지어 금룡이는 종남의 차기 장문인이야. 곧 장문인 자리가 넘어갈 거란 소리까지 도는 마당에, 금룡이한테 무례를 저지른다? 이건 종남 전체에 무례를 저지르는 거라고. 그런데 어느 간 큰 거지새끼가 와서 ‘댁 정말 진금룡 맞음?’ 하고 묻겠냐고. 그런 애들은 벌써 다리 밑에 묻혔어.”



“아…….”



모두가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혹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는다고?”



“손 놓기는. 그럴 리가 있나. 벌써 섬서로 전서가 미친 듯이 날아가고 있을 거다. 정말 금룡이가 여기 왔는지 확인하려고 말이야.”



“그, 그렇지?”



“하지만!”



청명이 씨익 사악한 미소를 흘렸다.



“그게 확인될 때쯤엔 우리가 이미 여기에 없을 거다 이거지.”



모두가 동시에 감탄했다. 아, 백천은 빼고.



“이야…….”



“기가 막히네.”



칭찬 속에 청명이 우쭐하며 배를 쭉 내밀었다.



“이게 완전 범죄라는 거다, 완전 범죄.”



“……한 번씩 보면 너 진짜 잔머리는 잘 돌아간다.”



“대단한 건 내 잔머리가 아니라 이걸 계획하게 만들어 준 저 얼굴이지. 이야, 다시 봐도 너무 똑같네. 소름 돋는다.”



“……닥치라고.”



반발하든 말든, 청명은 백천이 부들대는 걸 흐뭇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여하튼 개봉에는 우릴 보고 의심할 이들은 있어도, 우릴 보고 움직일 사람은 없으니까 태연하게 행동해. 크으. 나중에 금룡이 놈이 이 일을 알았을 때 얼마나 발악할지 생각하니 벌써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네. 낄낄낄낄!”



실로 악귀 같은 반응을 보이며 청명이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혀를 차면서도 그 뒤를 따랐고.



“그래. 어쨌든, 뭐…… 안 들키면 장땡이지.”



“빨리 끝내고 튀어야 합니다, 사형. 들키면 이게 무슨 개망신입니까?”



“나는 그 즉시 혀 깨물고 죽을 자신 있다.”



화산의 제자들이 어색한 농을 나누며 모퉁이를 막 도는 순간이었다.



“……어?”



“어?”



“……어어?”



화산의 제자들이 그림처럼 그 자리에 정지했다.



그들이 맞닥뜨린 건 한눈에 봐도 무위가 범상치 않은 거지들이었다.



물론 이런 건 별문제도 아니다. 개봉에 강한 거지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까.



문제는 거지 떼가 아니라, 그 무리와 함께 있는 한 사람이었다.



“어…….”



구름 문양이 새겨진 새하얀 무복.



은백색 구름 문양의 관으로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에, 앞으로 늘어뜨린 백색 머리 끈.그리고 당황한 듯 크게 뜨인 눈.



화산의 제자들에게 무척 익숙한 모습이었다. 모두가 찬물이라도 맞은 듯 얼어 버린 순간, 그가 앞에 선 백천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사……형? 어?”



그때, 벽에 박힌 목각인형처럼 한껏 굳어 있던 청명의 입에서 진심으로 당황한 목소리가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이, 이……송……백.”



“…….”



하하. 하하하하…….



네가 여기서 갑자기 왜 나와?



미치겠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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