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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79화 (1,480/1,567)

1479화 계획은 그럴듯했어. (4)

“한 푼만 줍쇼!”

“아이고, 나으리. 아이가 참 귀엽네요. 복을 베푸시면 아이가 복을 돌려받는 법입니다.”

“그 만두 하나만 적선하시면, 배곯는 어린 거지가 이틀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부디 대인의 행복을 굶주린 어린 거지에게 나눠 주시지 않으렵니까?”

커다란 성벽으로 둘러싸인 개봉 안 대로변.

수십의 거지들이 머리를 조아린 채 구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가는 개봉 사람들은 그 광경이 퍽 익숙한 모양으로 딱히 거지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높은 성벽 위 한쪽 구석.

“……진짜 사람보다 거지가 더 많네.”

“그러니까요.”

몸을 한껏 낮춘 채 개봉성 내부를 살피던 오검의 입에서 허탈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농담도 과장도 섞이지 않았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보다 구걸하는 거지들이 더 많아 보인다. 심지어 대로변뿐만이 아니다. 좁은 골목마다 자리를 깔고 누운 거지들로 빼곡했다.

“……이쯤 되면 거지들이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할 판 아니야? 저 많은 거지가 이 동네에서 구걸로 먹고살 수는 있나?”

“안 될 것 같은데.”

쑥덕거리는 그들의 귀에 삐딱한 청명의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구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응?”

“내가 말했잖아. 저 거지새끼들, 알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을 수도 있다니까. 밥은 총단 가면 먹고 싶은 만큼 원껏 먹을 수 있을걸?”

윤종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아니, 그럼 왜 저렇게 길에 나와 구걸하고 있는 건데? 돈도 많은 사람들이.”

“난들 알겠냐고. 저 새끼들은 그냥 옛날부터 저랬어.”

“그러니까 그걸 왜…….”

“아미타불.”

그때 혜연이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짧게 불호를 외며 입을 뗐다.

“소승이 듣기로는, 개방의 방도들에게 구걸이란 부유함과 관련 없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일이라 합니다.”

“예? 돈이 있는데도 구걸을 한다고요? 왜요?”

“그게 가장 낮은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엥?”

“소승도 자세히 들은 것은 아니나,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힘든 이들을 돕는다는 문파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모두가 빠짐없이 구걸한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윤종이 살짝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상하기는 하네요. 돈이 많으면 이미 거지가 아닌데, 거지로서 살기 위해 구걸을 한다니.”

“그게 왜 이상합니까, 사형?”

“응? 너는 이상하지 않으냐?”

“당연히 안 이상하죠. 저 새끼도 도산데.”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뭐? 내가 왜?”

이윽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솔직히 뭐, 거지 하는 데 조건이 있나. 사람 대가리 깨고 다니는 인간도 도사 하는데.”

윤종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청명의 존재가 세상의 엄격한 잣대를 조금쯤 느슨하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닌가, 하고.

물론 그런 쓸모없는 생각은 금세 털어 버려야만 했다. 너무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는 반쯤 질린 얼굴로 개봉성을 응시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저길 어떻게 들어갈 건데?”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어떻게든?”

윤종이 드물게 눈을 흘겼다. 눈빛에 멸시가 가득했다.

“야, 이 미친놈아. 저게 ‘어떻게든’이라는 말로 해결될 상황이냐? 거지들이 바글대다 못해 우글거리는데! 차라리 태상노군 눈을 피해서 악행 저지르는 게 쉽겠다.”

“사형. 어쩌면 그건 애초부터 쉬운 일 아니었을까요? 저 새끼도 아직 도산데?”

“어……?”

윤종의 얼굴에 혼란이 밀려들었다. 그가 심각한 도가적 회의에 접어들기 직전에 백천이 얼른 입을 열었다.

“방법을 강구하기는 해야겠다. 안일한 태도로는 불가능해.”

“확실히 그래요, 사숙.”

“동감.”

당소소와 유이설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 사방팔방에 달려 있는 거지들의 감시를 모조리 피하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들이 진입하려는 곳이 개방의 비처라면 접근할수록 감시도 더욱 심해질 것 아닌가?

그때, 조걸이 백아를 번쩍 들어 개봉의 정경을 휘 보여 주었다.

“야, 여기서는 그 새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냐?”

백아가 까만 코를 움찔움찔하다가 작은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아무리 영물이라 해도 이만한 거리에서 냄새의 근원지를 특정하는 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끄응. 안 되는군. 은근히 무쓸모……. 악! 아악! 내가 머리 잡아당기지 말랬지! 나 진짜 중대가리……. 스님, 잘못했습니다. 실언입니다. 일단 주먹은 좀 내리세요. 불광 때문에 들키면 안 되잖아요…….”

혜연이 들어 올렸던 주먹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대머리가 아니라 삭발한 겁니다.”

“결과는 같은 거 아닙니까?”

“다르오!”

결국 혜연이 발끈했다. 아웅다웅하는 둘을 보며 백천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것들은 이 와중에도 장난칠 여력이 있는 모양이다. 조걸이야 그렇다 치고, 저 혜연 스님까지…….

“야, 청명아. 무슨 수가 없겠냐.”

“하핫. 사숙도. 뭐 뻔한 걸 물어.”

“오? 역시…….”

“없지.”

……백천은 저 태연한 얼굴을 난도질해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분노였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참 자주 느꼈었는데…….

“근데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어쨌든 잠입만 하면 되는 거잖아. 방법이야 이제 찾으면 되지!”

“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서가 아니다. 그저 구시렁대 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야간에 잠입하는 건 어떨까요? 그럼 아무래도 감시가 줄어들 텐데.”

“거지들은 밤눈이 더 밝아. 애초에 중요하고 은밀한 정보는 밤에 주로 나오잖아. 그런 것도 몰라?”

“끙.”

청명의 반박에 당소소가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인근의 상행에 도움을 받는 건 어떻겠습니까? 짐 더미에 숨어서 들어가면 눈치채기 어려울 텐데.”

“헤헹! 이번에 상계에서 정보 전파한 것 때문에 상인들이 감시 대상 일 순위로 바뀌었을걸? 바퀴 두 번 구르기도 전에 발각될 거다. 하여튼 생각이 없어요, 생각이!”

“…….”

조걸의 눈가가 푸들푸들 떨렸다.

“그럼……. 음.”

백천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변복을 해 보는 건 어떻겠느냐? 저 사람들이 우리를 못 알아보기만 하면 다니는 데는 문제가 없을 듯한데.”

“그건 아니죠.”

“그게 되겠습니까?”

“어휴, 진짜 사숙.”

“기각.”

백천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새끼들, 지들끼리 말할 때는 별 등신 같은 말도 들어는 주더니…… 왜 나만…….

“사숙.”

“응?”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저 구석에 박혀 있어.”

“……미안하다.”

백천이 쭈그러들었다. 청명은 혀를 끌끌 찼다.

“뭐 나름대로 생각해서 한 말이겠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다들 알지?”

“알지. 변복해 봐야 어차피 무인이라는 사실은 숨기기 어려워. 거지들 사이에 기라성 같은 고수가 줄줄이 숨어 있을 텐데, 변복한 무인이 개봉에 들어선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거지들이 수십은 따라붙을걸?”

“그럼 무인으로 변복하면 되지 않을까?”

“안 될 거예요.”

이번엔 당소소가 고개를 내저었다.

“도가의 기운이야 어떻게든 숨길 수 있다고 쳐도, 화산쯤 되는 문파에 몸담은 사람들에게선 웅장한 기운이 흘러요. 이건 평범한 무인들이 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더 눈에 띌 거예요.”

“그, 그래?”

“네. 사형들이야 애초에 화산 사람이니 잘 모르겠지만, 저는 예전에 당가에 있을 때도 구파일방 사람들은 귀신같이 구별했거든요. 거지들은 아마 더하겠죠.”

“끄응. 그럼 뾰족한 방법이 없단 건데…….”

윤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애초에 이건 말이 안 된다. 개방 놈들은 평생 사람을 감시하는 일을 해 왔다. 그런 그들의 본단에 들키지 않고 진입한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린가?

차라리 마교 본단에 들어가서 천마랑 차 한 잔 마시고 돌아오는 게 쉬울 판이다.

“청명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안 되겠다. 다른 길을 찾아보자.”

“다른 길은 없어. 꼭 가야 해.”

“방법이 없다니까? 이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 아니냐.”

“방법이 왜 없어? 있지! 그게 뭐냐면…….”

“내 미리 말하건대, 그냥 닥치고 쳐들어가서 거지새끼들 다 두들겨 패고 원하는 곳에 도착하면 된다는 그런 개소리는 하지 마라. 그건 안 된다.”

“……어……. 안 돼?”

“말이라고 하냐! 우리가 그런 일을 벌이면 장문인과 태상장문인이 우리 껍데기를 벗겨 버리려 하실 거다. 꿈도 꾸지 마!”

“에이. 그게 제일 쉬운데.”

정말로 아쉬운 듯 청명이 입맛을 다셨다. 윤종은 순간 혈압이 치솟아 억, 하며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아니, 이 새끼 머리는 대체 뭐 어떻게…….

그때 턱을 긁적인 청명이 말했다.

“최선이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차선을 써야지.”

“응? 차선이 있다고?”

“어. 뭐 어쨌든 저길 들어가도 우리가 화산 놈들이라는 것만 안 들키면 되는 거잖아.”

“안 들킬 방법이 없다니까요? 우리는 무인, 그것도 대문파 특유의 기운을 흘리는 무인이에요. 게다가 여기는 하남이라고요. 입을 열자마자 섬서 사투리 때문에 들통날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안 들켜요?”

“그래, 그렇지. 바로 그거야.”

“……네?”

당소소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청명을 보았다. 그러다 문득 청명의 미소를 보고 움찔 몸을 떨었다.

“뭐, 뭔 짓을 하려는 건데요, 사형?”

“네 말대로. 그래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 되면 되잖아. 어디 보자……. 굳이 성안에는 안 들어가도 면포 정도야 구할 수 있겠지. 그리고 다들 바느질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못해.”

“천은 자를 수 있다.”

유이설, 조걸의 대답에 청명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들은 무인이 안 되었으면 대체 뭘로 먹고살았을까?

“그래서 뭘 만들면 되는 건데요?”

“어, 그건 내가 알려 주는 게 아니야.”

“응? 그건 또 뭔 소리래?”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저 양반일 테니까, 저기다 물어봐. 아마 소매 길이까지도 기억하고 있을걸?”

“……저 양반?”

청명의 턱짓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쭈구리 백천이 여전히 양 무릎을 모은 채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응? 나?”

인생이란 무엇인가 깊게 고뇌하던 그는 모두의 시선에 놀라 청명을 보았다.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사숙. 바로 너.”

“너보다 내가 잘 아는 의복이라니, 그게 무슨……. 난 딱히 의복 같은 걸 신경 써 본 적이…….”

그 순간 백천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휘둥그레졌다.

“너, 너……. 너 설마 이 미친 새끼, 설마?”

백천의 얼굴이 참혹할 만큼 확 일그러졌다.

“오? 이해한 모양이네.”

“화산의 제자라는 놈이! 그게 화산의 자랑스러운 제자라는 놈이 할 수 있는 발상이냐? 나는 못 한다! 나는 죽어도 내 몸에 다시 그 더러운 걸 걸칠 수 없어! 나는 안 해! 차라리 살가죽을 뜯어내는 게 낫지!”

백천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발악했다. 청명은 빙그레 웃으며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솔직히 한 번쯤은 다시 입어 보고 싶었잖아?”

“죽어, 이 미친놈아!”

“워, 미친. 진짜 칼 뽑네.”

“저 양반 말려, 빨리!”

내공으로 새어 나가는 소리를 차단하던 혜연이 문득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미타불.”

해남까지 다녀와도 이 인간들은 변한 게 없다.

그때 조걸이 진지하게 말했다.

“스님, 빛이 반사돼 눈이 부십니다. 옆으로 조금만 가십쇼.”

“……콱 뒈지십시오, 조걸 도장.”

그리고 그건 혜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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