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7화 계획은 그럴듯했어. (2)
“……어디로 가고 있다고?”
들판에 세워졌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천막. 그 천막 가장 깊은 곳에 놓인 커다란 의자에 앉은 장일소의 눈이 절로 찌푸려진다.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 앞에 선 호가명이 드물게도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뒷말을 이었다.
“호북의 양민들이 줄을 지어 섬서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섬서?”
“예. 그리고 사천 북쪽의 일부 양민들도 섬서로…….”
호가명이 잠시 머뭇댔다.
‘피난’이라는 단어도, ‘도주’라는 단어도 적절하지 않다. 적어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이주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장일소의 두 눈에 의문이 떠오른다. 들고 있던 술잔을 옆의 다탁에 내려놓은 장일소가 한 손을 들어 제 턱 부근을 가볍게 문질렀다.
“섬서로 가고 있다고?”
“예.”
“어째서?”
“…….”
너무도 간단한 질문. 하지만 호가명은 그 간단한 질문에 대한 답을 쉽사리 내어놓을 수 없었다. 이 일만은 그의 머리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명아.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니?”
“장가계입니다.”
“그래. 그렇지. 우린 장가계에 있단다. 마음만 먹으면 호북이든 섬서든 공격할 수 있는 위치지. 그렇지 않니?”
“그렇습니다. 련주님.”
“그런데……. 호북 놈들이 기껏 짐을 싸서 피난 가는 곳이 하남도, 하북도 아니라 섬서라고?”
“…….”
“끄응.”
장일소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땅만 파고 사는 것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멍청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생각 자체가 우리와 달라서 그러는 건지.”
장일소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양민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현 상황에서 딱히 중요하다 볼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구파일방과 천우맹의 동향이니까. 그저 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조금 기분이 나쁠 뿐.
“그래서. 그 천우맹 놈들은 어찌하고 있다니? 제 놈들도 갑자기 양민들이 몰려오니 당황했을 텐데. 지금까지 떠들어 댄 것이 있으니 밀어내지도 못할 것 아니더냐?”
“그게…….”
“음?”
호가명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장일소가 미간을 좁혔다.
“……천우맹 놈들은 화음에 대량의 전각을 만들어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
장일소가 황망한 얼굴로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수용하고 있다고?”
“예. 아마도 미리 준비해 둔 것 같은…….”
말을 얼버무린 호가명이 슬쩍 장일소의 눈치를 살폈다. 장일소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칼도 휘두르지 못하는 무지렁이들. 그런 이들을 수용해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건가?
피난민을 받는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곡식과 재물이 소모된다. 전쟁을 앞둔 이들이라면 절대 선택할 수 없는, 선택해서는 안 되는 길이다.
그런데 지금 천우맹은 그 손해밖에 없는 짓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었다. 마치 단체로 미쳐 버리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설사 ‘협의’라는 두 글자에 눈이 멀어 버린 누군가가 이 일을 강력히 주장했다 한들 천우맹의 문주들이 다들 바보는 아닐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황당한 일에 동조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 그렇기에 오히려 이 상황이 어떻게 해서 벌어진 것인지는 확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흐음.”
장일소가 의자에 살짝 늘어진다. 더없이 나른한 자세지만, 그의 두 눈만은 더없이 음울한 빛을 흘려 내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
장일소의 새빨간 입술이 고혹적으로 비틀렸다.
“아무래도 그자가 천우맹을 완전히 제 손 위에 올린 모양이로군.”
호가명의 고개가 살짝 숙여진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리 판단하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해석할 도리가 없다.
“여하튼 곤란하다니까.”
장일소가 쿡쿡대며 웃었다.
“손도 발도 못 쓰게 짓밟아 놨더니 등을 찔러 오지를 않나. 아무리 날뛰어 봐야 일개 삼대제자의 수준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비웃어 줬더니 떡하니 권력을 손에 쥐어 버리지를 않나.”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호가명은, 호가명만은 알 수 있었다. 장일소의 목소리에 어린 웃음이, 말을 이어갈수록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렇다면 놈이 이 상황을 미리 예측…….”
장일소가 말을 멈춘다. 그의 눈빛이 깊게, 더 깊게 가라앉았다.
“아니지……. 아니야. 예측이 아니겠지. 예측하고 대비한 것이 아니라. 이리되도록 유도했겠지.”
“…….”
뭔가 생각을 하는 듯하던 장일소가 이내 손을 뻗어 다탁 위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한결 느긋해진 표정으로 술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머금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가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련주님.”
“말하렴.”
“련주님께서는 혹여 짐작 가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놈들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호가명이 자꾸만 흘러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억눌렀다.
저 매화검귀가 끔찍한 이유는 놈이 미친놈이기 때문이 아니다. 저놈이 끔찍한 진짜 이유는 놈이 ‘내버려 둘 수 없는 미친놈’이기 때문이었다.
“흐음.”
호가명의 질문에 장일소가 호가명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순간 담담하던 그의 두 눈이 그믐의 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진다.
“가명아.”
“예. 련주님.”
“굳이 우리가 그걸 고민할 필요가 있겠니?”
“……예?”
그 황당한 질문에 반사적으로 반문하고 만 호가명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살짝 숙인다. 그 모습을 본 장일소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로서는 이 모든 게 그저 재미있는 일일 뿐이지만,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놈들도 있지 않니.”
“아…….”
구파일방.
확실히 지금의 흐름에 가장 당황할 이들은 바로 그들일 것이다.
사패련에게는 호북의 양민들이 섬서로 이동하는 일에 불과하지만, 구파일방에게는 자신들이 보호하던 이들이 그 보호를 이탈해 천우맹의 비호를 받으러 가는 것이니까.
저 구파일방, 소림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큰 치욕이 있겠는가?
“아마 지금쯤 놈들이 갖은 애를 쓰고 있을 테니, 적당히 사람이나 풀어놓거라. 놈들이 알아내는 것이나 확인해 보자꾸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련주님.”
호가명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가 보렴.”
“예. 그럼.”
호가명이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천막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간 천막에 홀로 남겨진 장일소가 가만히 시선을 내려 제 술잔 위에 뜬 형상을 바라본다. 광대처럼 분장한 하얀 얼굴의 남자가 조롱하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엽게도. 여전히 모르는 모양이구나. 아니, 알고도 외면하는 거니?”
장일소가 고개가 위로 젖혀진다. 살짝 몽롱해진 그의 눈이 무늬 없는 천막의 천정을 멍하니 응시했다.
“세상은 그리 좋은 곳이 아니란다. 그리 베풀어 봐야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거늘.”
그에게는 좋은 일이다. 분명.
상대가 저지르는 실수는 그에게 더없는 이득이니까. 그의 머리가 말하는 대로라면 그는 쾌재를 불러야 마땅하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러지 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갑갑함이 그의 가슴을 천천히 조여 오는 기분이다.
“……골치가 아프군. 술을 더 가져오너라.”
“예!”
시비들이 빠르게 술을 들고 온다.
내민 술병을 잡아드는 장일소의 손길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거칠어져 있었다.
❀ ❀ ❀
“어,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방장. 이제는 그 무지렁……. 가난한 이들만이 아닙니다. 호북에서 적당히 행세하는 이들도 하나둘 섬서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
“방장. 이러고 계실 게 아니라, 무슨 수를.”
“그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예?”
“그럼 제 발로 떠난다는 이들 앞에 창칼이라도 들이밀고, 이곳에 남으라 겁박이라도 해야 하겠습니까?”
종리형이 조개처럼 입을 닫았다.
팽엽의 말이 옳았다. 그들은 관도 아니고, 황궁도 아니다. 양민들의 발을 막을 명분도 권한도 없다. 하지만 종리형도 그걸 몰라서 이리 말하고 있는 게 아니잖은가?
“저는 딱히 나쁜 상황이라 보지 않습니다.”
“팽가주님. 그게 무슨……?”
“어차피 전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을 천우맹이 떠맡아 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형식적으로라도 지키기는 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저들이 없으면 우리가 운신할 수 있는 폭도 확연히 넓어질 것입니다. 지금 중요한 건 칼도 휘두를 줄 모르는 양민들이 아니라, 중소문파들을 확실히 규합하는 것입니다.”
종리형이 입을 닫았다.
그도 안다. 팽엽의 말이 틀린 게 없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이 그들에게 오직 이득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그는 답답함을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이게 그리 볼 수 있는 상황일까?’
양민들이 그들을 떠난다. 아니, 양민들이 그들을 버리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이상한 상황인지 정말 모른다는 말인가?
정파란 힘없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무학을 익히는 이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지켜야 할 그 힘없는 이들이 지금 되레 그들의 보호를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이 주객이 뒤바뀌어 버린 상황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여겨도 되는 것일까?
“아미타불.”
그 순간, 법정에게서 담담한 불호가 들려온다.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양민들이 구파일방보다 천우맹을 더 믿는 게 어찌 좋은 일이겠습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하지만.”
법정이 담담한 눈으로 종리형을 마주 보았다.
“지금은 전시입니다. 기분이 아니라 실리를 따져야 할 때지요.”
“…….”
“팽가주님의 말대로 실리만 생각한다면 그리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 말에 종리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멍청해서 정말 이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것일까?
“우선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두 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떠나는 이들을 설득해 보라 하십시오. 섬서보다 이곳이 더 안전하다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어려운 이가 있으면, 비축해 둔 군량을 조금 풀어 도웁시다. 그만한 성의는 보여야 할 테니까.”
“그건…….”
“좋은 생각이십니다! 방장!”
“아미타불.”
법정이 종리형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팽엽은 살짝 불만 어린 얼굴이었지만, 굳이 법정의 말에 반발하지는 않았다.
“여하튼 생각하기에 따라서 꼭 나쁜 소식은 아닙니다. 오히려 냉정하게 보자면 꽤 좋은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예? 방장,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저들이 천우맹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해 못 할 발언에 종리형이 눈을 찌푸린다. 그 표정을 본 법정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시다시피 천우맹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이들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정확하게는 천우맹이 아니라. 화산검협 청명이 그렇다.
“저 역시 이 상황을 처음 보았을 때는 놀라고 당황했지만, 지금은 차라리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난민들이 아니었다면 천우맹은 분명 무언가 이상한 짓을 벌였을 것입니다. 이번에 사천을 습격한 일이나, 일전에 해남으로 갔던 일처럼 말입니다.”
“아…….”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난민들을 감당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그리 생각하면 저들이 섬서에 발이 묶여 있는 지금이 대처하기에 낫지 않습니까?”
“으음. 확실히…….”
종리형과 팽엽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벌어지고 있는 일 자체는 굉장히 기이하지만, 여하튼 덕분에 천우맹이 가진 불확실성이 확연히 해소되었다.
두 사람이 자신의 뜻을 이해했다 여긴 법정이 반장을 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진한 것이 있다면, 전쟁에서 이긴 뒤에 수습하면 됩니다. 모자란 것이 있다면 그때 고민해 채우도록 하고, 지금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십시다.”
“예, 방장. 그리하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을 들은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섬서가 있을 북서쪽을 향했다.
‘화산검협.’
법정의 두 눈이 깊이 가라앉는다.
‘그 양민들로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인가?’
그러나 법정은 몰랐다.
이미 청명은 섬서의 양민들과 함께 있지 않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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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
“야! 청명아! 저 새 너무 빠르다!”
“저걸 어떻게 쫓아가? 이게 말이나 되냐?”
“여기 어디야? 여기 아직 하남인가? 나 벌써 토할 것 같은데?”
악을 써 대는 사형제들을 보며 청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린다.
“이것들이 피죽만 퍼먹었나? 헛소리하지 말고 따라붙어! 뒤처지는 새끼는 내가 손수 발목 분질러 준다!”
“피죽이라도 주고 말해!”
“아니 이 미친놈아! 사람이 새를 무슨 수로 따라가!”
“달려어어어어어어어!”
해가 떠오르는 곳.
먼 동쪽의 하늘을 향해 청명을 대동한 오검들이 섬전이 되어 나아갔다.
세상 모든 이들의 시선을 저 멀리 섬서에 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