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6화 계획은 그럴듯했어. (1)
파아아앗!
새벽 어스름을 헤치며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을 향해 몇몇 인영이 세차게 달려 나갔다.
“아! 좀 떨어지라고, 인마!”
키이이이이이이!
“내려! 무겁다고! 나도 힘들다고!”
키이이이이이이!
조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백아가 그의 팔에 필사적으로 달라붙어 있었다.
족제비 주제에 ‘난 이제 죽어도 내 발로는 못 달린다’를 얼굴로 표현하는 재주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아무리 영물이라도 그렇지.
“사형!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이 새끼 좀 떼 주십쇼.”
“……그냥 네가 좀 참아라, 걸아.”
“아니…….”
“솔직히 네가 걔 입장이어도 다시 달리기는 싫을 게 아니냐. 해남까지 두 번을 달려갔다 온 거나 마찬가진데, 족제비가 아니라 말이라도 드러눕지.”
“확실히 그건 사실이지.”
“불쌍하긴 해.”
그 말에 조걸이 다시 백아를 흘끗 보았다. 까만 두 눈에 커다란 눈물방울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이놈을 떼어 내려던 그 자신이 답도 없이 나쁜 놈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건 아는데…… 그걸 내가 시킨 것도 아니잖습니까? 왜 나한테 들러붙냐고요! 원래 청명이 놈한테 붙잖습니까.”
“덥대.”
“…….”
“백아가 발 뻗을 데는 구분하는 거지. 덥다는 놈한테 더 달라붙었다가는 진짜 목도리 되겠다 싶었겠지.”
조걸이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휴. 앓느니 죽어야지.”
한숨을 푹 내쉰 조걸은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을 응시했다.
“그래서 어디까지 갈 거랍니까? 하남은 한참 전에 접어들었는데.”
“난들 아느냐? 저놈이 정하겠지.”
청명은 여전히 선두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 옆의 백천도 마찬가지였다.
“후욱.”
작은 개천을 뛰어넘은 백천이 짧게 숨을 골랐다.
“왜? 숨차?”
옆에서 시큰둥한 청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천이 슬쩍 청명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또 무슨 악담을 하려고?”
“아니, 뭐 딱히 대단하게 달린 것 같지도 않은데 숨이 차신 것 같길래. 어디 아프신가 하고?”
“고양이 쥐 생각해 주시네. 네 걱정이나 해라.”
“예이, 예이.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제 걱정만 합지요.”
능글맞은 대답에 백천이 이를 갈아붙였다.
“어디까지 갈 셈이냐?”
“응?”
“이미 하남에 접어들었잖느냐? 목적지가 어딘지를 묻는 거다.”
“글쎄.”
청명은 명확히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응?”
“대충은 아는데 아직 정확하지는 않거든.”
도무지 영문 모를 대답이었다. 하지만 백천은 청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가 현명해서가 아니라, 저 의뭉스러운 청명의 말투를 질리도록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달리고 있으면 네가 가려는 곳이 모습을 드러낸단 소리냐?”
“머리가 나빠진 건 아닌 모양이네. 진맥까지는 받을 필요 없겠어.”
“…….”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이 질주가 영 의미 없는 건 아니라는 걸 이해했으니 그걸로 됐다.
“화음은 괜찮은 거냐? 제대로 말도 안 하고 떠나왔는데.”
물론 아예 말을 안 한 건 아니다. 하기는 했다.
우르르 달려가 하남에 다녀올 거라고 장문인께 통보하고, 얼이 빠져 입도 열지 못하는 운암을 내버려 둔 채 도망치듯 여기까지 온 거니까.
백천의 표정에 드러난 우려를 읽은 청명이 피식 웃었다.
“내려놓으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 대더니, 막상 일에서 손을 떼니까 걱정부터 되시는 모양이네.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인마!”
“신경 쓸 것 없어. 다들 그 정도는 단련되어 있으니까.”
백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확실히 그 말도 맞다. 갑자기 사패련이 총공을 해 오는 상황만 아니라면, 화음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자잘한 문제야 숱하게 벌어지겠지만, 화음에는 당군악과 임소병이 있고, 현종과 황종의가 있다.
화음을 도시로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인물들끼리 모여 그만한 일 하나 처리하지 못할 거란 우려는 안 들었다.
“단련이라…….”
능력에 대한 신뢰와는 조금 다르다. 이건 그들이 겪었던 경험에 대한 신뢰였다.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이겨 내지 않았나.
“돌이켜 보니 참 지독하게도 버텨 왔군.”
“새삼스럽게.”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구절절한 말보다 ‘단련’이라는 말에 확실히 납득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단련해서 강해졌다. 그러니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다는 건가?”
“뭐 그런 셈이지.”
“그러지 못한 이들은?”
백천이 물었다. 청명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백천은 뭐 그리 심각한 의미로 물은 건 아니라는 듯 속도를 올렸다.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건 딱히 고민해 본 적이 없는데?”
“……너다운 대답이네.”
“사숙, 그거 욕이지?”
백천이 쓰게 웃었다.
“그래서 계속 달리면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거냐?”
“와, 욕해 놓고 갑자기 말 돌리는 거야? 동룡이도 꽤 능글맞아졌네. 이제 장가보내도 되겠어.”
“개소리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 뭘 노리는 거냐?”
“간단하지. 거꾸로 생각해 보자고.”
“거꾸로?”
“그래, 거꾸로. 사숙도 알다시피 이제 우리는 꽤 유명해졌잖아? 안 그래?”
“…….”
“저 푼수 같은 조걸 사형도 별호가 생길 정도니까 시간문제일 뿐, 이제 다른 사람들도 다 별호가 붙을걸? 사숙의 그……. 그 뭐더라? 화산병검이었나?”
“정검이야, 이 새끼야!”
“그래, 그거. 하여튼 그 괴상한 별호도 슬슬 바뀔 거야. 보통은 그렇게 되더라고.”
백천이 숨을 몰아쉬느라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그게 이거랑 뭔 상관이냐?”
“말했잖아, 거꾸로 생각해 보자고.”
청명이 씨익 웃었다.
“유명해진다는 건 시선을 끈다는 거고,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거지. 그리고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주목하는 이들이 늘어난다는 거고.”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니까, 거꾸로라니까?”
청명이 앞쪽을 향해 턱짓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성벽이 있었다.
“낙양?”
하남에 있는 거대한 도시 낙양. 그 낙양의 성벽이 아침햇살과 함께 백천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가 일을 벌이는 게 아니야.”
청명이 씨익 웃었다.
“놈들이 벌이게 만드는 거지.”
그리고 눈을 빛내며 단숨에 낙양의 열린 성문을 향해 박차 나아갔다.
❀ ❀ ❀
“흐음.”
얼마 전 개방의 낙양 분타에 분타주로 부임한 원평(元平)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앓는 소리를 흘렸다. 움막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눈을 찔렀다.
“쯧.”
딱히 할 일 없는 나른한 일상. 거지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을 꿈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원평에게는 이 모든 것이 불만이었다.
“빌어먹을, 내가 왜 여기서…….”
그가 맡은 임무는 단순했다. 화음에서 멀지 않은 이곳 낙양에서 화음의 동태를 살피는 것. 정확히는 화음에 거하는 천우맹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성에 차지 않는 임무였다. 그와 비슷한 급의 거지들은 하나같이 저 사패련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맡은 일은 사파도 아닌 천우맹을 감시하는 일 아닌가?
필요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즐거운 일은 아니다. 정의로운 일이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아무리 공을 세운다 해도 내세워 자랑하기 힘든 임무. 그런 임무에 누가 즐거움을 느끼겠는가?
“빌어먹을. 본단 거지들도 다들 노망이 들어서.”
한숨만 푹푹 나왔다.
언제부턴가 개방이 영 개방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는 개방이라면 사패련이 준동하는 이런 상황에서 반쯤 엉덩이를 빼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방주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연신 투덜거리던 그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아침부터 술을 퍼먹을 수는 없으니, 어디 가까운 주루 주방에라도 들러서 남는 밥 좀 얻어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부, 분타주! 분타주님!”
그가 거하는 움막 문이 벌컥 열렸다. 겨우 이어 놓은 경첩이 뚜둑 부러지며 낡아 빠진 문이 쿵 나자빠졌다.
“야, 이……! 저걸 어떻게 고친 건데!”
“그럴 때가 아닙니다, 분타주! 큰일입니다!”
짜증을 터트리려던 원평은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거지의 얼굴을 보며 멈칫했다. 낯빛이 그야말로 사색이었다.
“뭐냐? 천우맹이 움직이기라도 했냐?”
“그, 그렇습니다, 천우맹! 아니, 천우맹이 아니라! 그 천우맹……!”
“뭐라는 거야? 똑바로 말하지 못해?”
“그 천우맹의 오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오검이 오다니?”
“천우맹의 오검이 지금 낙양에 왔단 말입니다!”
원평이 찢어지도록 눈을 부릅떴다.
“오, 오검? 화산오검 말이냐?”
“예! 소림의 혜연도 같이 있습니다!”
“그놈들이 대관절 여긴 왜 왔단 말이냐? 어제까지는 분명히 섬서에 있었는데?”
“그야 저도 모르지요! 놈들이 조금 전에 낙양 성문 안으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원평의 얼굴도 보고한 이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공격인가?”
“말 같은 소리를 하십시오! 오검이 우리를 왜 공격합니까?”
“그, 그렇지?”
구파와 천우맹의 관계가 살얼음판으로 변했다지만, 그래도 천우맹이 구파일방을 공격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갑자기 왜 낙양에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자, 잠깐! 그 오검 중에 혹시 화…산검협도 있느냐?”
“있습니다! 화산검협도 왔습니다!”
“히이이이이이익!”
원평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화산검협 청명의 움직임에 관한 보고는 개방 전체에서 사패련주 장일소의 움직임과 더불어 특급 중 특급으로 취급된다. 그 중요도가 얼마나 큰지, 화산검협이 오늘 재채기를 연달아 두 번 했다는 사항조차 특급으로 분류해야 할 지경이었다.
“당장 총단에 보고해라! 당장!”
“뭐, 뭘 보고 해야 합니까!”
“빌어먹을, 일단 아는 건 모조리 쓰란 말이다! 당장 전서를 보내!”
“예, 예!”
“총단뿐만 아니라 인근 분타에도 모조리 전달해! 놈들이 이곳을 지나쳐 움직일 수도 있으니 거지새끼들 모조리 배치해서 감시하라고!”
“예!”
명령을 하달받은 거지가 다급하게 뛰쳐나갔다. 잠시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원평이 몸을 획 돌렸다.
‘설마 이리 빨리 사용하게 될 줄이야.’
그는 더러운 책상에 대충 놓인 종이에 다급하게 글을 휘갈겼다. 그리고 옆쪽에 드리운 장막을 확 젖혔다. 새장이 드러났다.
찌르르.
참새처럼 작은 새가 울음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크기와 모습은 참새와 다를 바 없지만, 깃털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범상치 않은 새라는 걸 알 수 있다.
거지는 새를 꺼내어 그 다리에 묶인 통 안으로 종이를 말아 넣었다. 화산검협 청명이 영문 모를 일을 벌일 때를 대비하여 지급받은 금(金)급 전서구다. 이 전서구가 어디로 가는지는 그조차 몰랐다.
“됐다.”
통을 잘 봉인한 원평이 창을 열어젖혔다. 푸른 하늘을 한번 바라본 황금빛 참새가 원평의 손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 ❀ ❀
“……와.”
“뭐가 이렇게 날아 대냐? 매라도 떴나?”
“……저거 전서구잖아, 인마. 그냥 비둘기가 아니고.”
“그건 저도 압니다, 사형. 제 말은, 갑자기 뭔 놈의 전서구들이 저렇게 미친 듯이 날아 대냐고요.”
“그러게.”
낙양에 진입하기 무섭게 사방으로 날아오르는 비둘기들을 보며 오검은 헛웃음을 흘려 댔다.
어느 정도 경계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도를 넘지 않았는가? 뭔가 기분이 좋으면서도 묘하게 더러웠다.
“근데 우린 왜 멈춘 거야?”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저 새끼가 갑자기 섰으니까 선 거지.”
윤종과 조걸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그는 대로 한가운데에 멈추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로 날아오르는 새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흐음. 저건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뭘 찾는 거냐?”
“저것도 아닌데.”
“야! 뭘 찾는 거냐고!”
“아니, 뭘 딱히 알아서 찾는 건 아니고.”
“응?”
낙양 하늘 가득 날아오른 전서구들을 보며 청명이 히죽 웃었다.
“뭐 하나쯤은 있을 것 같지 않아? 전서구는 전서구인데 딱 봐도 뭔가 대단해 보이고, 비슷하지만 남다른? 그런 느낌적인 느낌을 주는 대단한 전서구?”
“……청명아. 돌아가면 진맥부터 받자.”
“끄응. 분명히 있을 텐데.”
“전서구가 다 같은 전서구지, 인마! 애먼 데 힘 빼……. 저, 저기! 청명아! 저거!”
말을 하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뜬 백천이 황급히 하늘 한쪽을 가리켰다.
“네가 말하는 게 저런 거 아니냐? 저 누런 거!”
“오?”
백천이 가리킨 곳을 본 청명이 탄성을 내질렀다.
“이야! 동룡이도 개똥에 쓸데가 있다더니!”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야!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저걸 따라가면 되냐?”
“말해 뭐 해. 척 하면 착이지!”
씨익 웃은 청명이 멀어져 가는 황금빛 새를 주시했다.
“천리청구도 아닌 것 같고, 한 급 정도는 더 높으려나? 굳이 이름 붙이면 만리금구(萬里金鳩)쯤?”
“비둘기가 아니라 참새 같은데?”
“……대충 합시다, 대충.”
백천에게 얼굴을 얄밉게 찡그려 보인 청명은 날아오른 참새를 가리켰다.
“자, 가 보자고. 저 귀해 보이는 새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러!”
청명이 강하게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