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5화. 해 놓은 일들이 결과가 되어. (5)
“거기 줄 서십시오, 줄!”
“곡식은 충분히 있습니다!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곡식을 받으신 분은 이쪽으로 와서 생활용품을 받아 가시면 됩니다! 이쪽 먼저 오지 마시고, 저쪽으로 줄을 서세요!”
대로에 산처럼 쌓인 곡식들이 몰려든 이들에게 차근차근 분배되었다.
“……세상에, 진짜 곡식을 주네.”
손에 목패를 꼭 쥔 채 배급소에 온 이들은 황당함에 눈을 끔뻑였다. 얼핏 보아도 나눠 주는 곡식의 양이 적지 않았다.
“그뿐인가. 당장 필요한 물품까지 준다지 않은가?”
“집도 주고 밥도 주는데 뭐가 더 필요하다고?”
“섬서는 호북보다 윗지방이라 많이 춥다지 않은가? 건강 상하지 말라고 의복도 나눠 준다고 하네.”
“허……. 허허. 이거 원…….”
그들이 피난민인지 섬서를 방문한 손님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당연히 생기는 의문이 있었다.
“아니, 대체 우리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건가?”
몰려든 피난민이 칼이라도 휘두를 줄 알면 이해가 간다. 지금 세상은 분명 무인이 우대받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니까.
하지만 지금 줄지어 배급받는 이들은 대부분이 휘두를 줄 아는 것이라고는 쟁기밖에 없는 농민들이다.
“뭐, 모르지. 우리야 주는 거 받으면 그만이니까.”
“……참 천우맹, 천우맹 하더니…….”
“그러지 말고 얼른 가세. 이러고 꾸물대다 곡식이 우리 앞에서 떨어지면 어쩌는가?”
“그래야지.”말을 나누던 이들이 잰걸음으로 줄에 합류했다.
* * *
“곡식이 모자랍니다!”
“낙양으로 보낸 이들은 뭘 하고 있는가?”
“나, 낙양이 어디 앞 동네도 아니고, 돌아오려면 한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가! 쉴 생각 하지 말고 빨리 가져오라고 연통을 보내게!”
“면포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서안에서 면포를 구입한 이들이 곧 도착할 것일세! 지급을 못 받은 이들은 명부를 따로 작성해 두었다가 추후에 지급하도록 하게! 일단 지금 남은 면포는 모조리 아이들 옷으로 돌리고!”
“물이 없습니다! 우물이 차는 속도보다 줄어드는 속도가 더 빠릅니다. 지금 이럴 게 아니라 어디에서 물부터 공수해 와야 합니다!”
황종의가 고개를 획 돌리며 총관에게 외쳤다.
“아까 인력을 따로 배치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따로 배치했습니다. 다만 인력으로 물을 퍼 나르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더 붙이게, 더! 사람이 모자라면 더 붙여야지! 자네는 뭔가? 뭐가 또 문제인가?”
“먼 길을 쉼 없이 오느라 앓아눕는 이들이 많습니다. 화음의 의원으로는 일손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지금 당장 다른 곳에서 의원을 모셔 와야 합니다.”
“으, 으음. 그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지시를 내리던 황종의가 순간 멈칫했다. 그러더니 오만상을 찌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집무실 뒤에 마련된 그의 간이 침상에는 아까부터 누군가가 삐딱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사과를 맛있게도 와삭와삭 씹어먹던 그는 황종의의 시선을 느끼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응? 왜요?”
황종의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물론 지금 저 인간이 딱히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의복이 젖을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데, 하필 그 뒤에서…….
“총사……. 그, 의원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의원은 저희가 모셔 오고 싶다고 함부로 모셔 올 수 있는 분들이 아닙니다.”
“의원을 모셔 와요? 왜요? 여기 제일 남아도는 게 의원인데?”
“……예?”
“흐음. 보자……. 거기.”
“예? 옙!”
황종의에게 보고하던 이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아프다는 사람들 명단 쫙 작성해서 주세요. 진짜로 급한 이들은 따로 분류해서 말해 주고, 하루 정도는 괜찮다 싶은 사람들은 오늘 밤에 의원이 댁으로 방문할 거라고 해 주시면 돼요.”
“바, 밤에 말입니까? 왜 굳이 밤입니까?”
“의원들이 밤에만 손이 비거든요. 낮에는 집 지어야지.”
……아, 당가구나.
그래. 당가 사람들의 의술이 뛰어나지. 그런데…….
‘낮에는 기어이 목수로 부려 먹고, 밤에는 쉴 틈도 없이 환자를 봐야 한다고?’
이쯤 되면 당가가 사패련에 붙지 않는 게 더 이상할 판 아닌가?
“그럼 그건 해결된 것 같고. 또 무슨 문제 있어요?”
“그…….”
황종의는 묘하게 안절부절못했다.
“너희는 다 나가라!”
“예!”
“총관은 남고!”
“아, 예. 상단주님.”
북적거리던 자리가 순식간에 조용하게 비워졌다. 황종의가 청명을 붙들고 사정하듯 말했다.
“총사님. 피난민을 얼마나 더 받을 생각이십니까? 이대로는 저희가 못 버팁니다.”
“사해상회 사람들도 이제 도착하는 것 같던데, 뭐 그리 엄살이에요. 나 때는, 어?”
“아, 그놈의 ‘나 때는’ 좀 작작 하십시오! 인력이 문제가 아니라 재정이 못 버팁니다! 근성으로 없는 돈을 당장 만들 순 없지 않습니까! 저 양반들한테 대체 얼마나 퍼부을 생각이십니까?”
“흐응?”
청명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황종의는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일전에 주신 자금은 벌써 다 떨어졌습니다. 지금은 저희 상단의 재산으로 틀어막고 있단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곧 바닥을 드러낼 판입니다.”
“이미 준 돈이 얼만데, 누가 상인 아니랄까 봐 벌써 우는 소리를 하시네요.”
“아이고, 총사님! 어디 저 사람들이 하루 이틀 머물다가 돌아간답니까? 최소 몇 달은 먹여 살려야 하는데, 곡식값은 폭등하고 물류비는 한도 끝도 없고……. 제가 단순히 상단 걱정에 이러는 게 아닙니다. 이러다가는 천우맹도 박살이 나고 말 겁니다.”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천우맹 돈 많아요. 내가 갈취……. 아니, 상납……. 어……. 여하튼 각 문파에서 차출한 돈이 있으니까.”
“총사!”
황종의가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돈이 있다고 다가 아닙니다! 총사께서는 회계가 낯설어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돈은 필요할 때 쓸 수 없으면 종잇조각입니다. 당장 저 안휘에 있는 전각을 곡식과 교환해 줄 이들을 이 근방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눈으로 확인하는 데만 족히 몇 달은 걸릴 텐데요?”
“……그건 그렇죠.”
“장부에 적힌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당장 곡식이나 물품으로 바꿀 수 있는 현물…….”
“어, 현물.”
촤르르르륵!
그 순간 청명이 들어 올린 궤짝에서 무언가가 우르르 쏟아지며 황종의의 앞에 흩어졌다.
금, 금, 금……. 그리고 또 금. 무수한 금자였다. 황종의는 순간 당황하여 말을 잃고 말았다.
“어……?”
“여기요. 현물.”
누렇게 빛나는 금자를 보며 눈만 끔뻑이던 황종의가 서서히 입을 벌렸다. 이게 다 진짜 금자면 대체 돈이 얼마인가?
“……이, 이게 다 어디서 나신…….”
“뭐 그런 것까진 알 것 없고.”
청명이 히죽히죽 웃었다.
“이거면 일단은 되죠? 부족하면 이만큼 더 드릴까?”
“그, 그렇죠. 되죠. 되고말고……. 예? 또 있다고요?”
황종의의 낯빛이 순간 시퍼레졌다.
아무리 봐도 이건 출처가 없는 돈 같은데, 대체 어떻게 이만큼이나 모아 뒀단 말인가? 그것도 전표나 땅도 아닌, 황금으로.
“대, 대체 이건…….”
“일단 급한 건 이걸로 틀어막으세요.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아, 아니, 이 돈을 저들에게……. 저는 솔직히 너무 아깝습니다. 이럴 바에야…….”
“거 참. 이래서 상인이라는 양반들은!”
청명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말을 끊고 눈을 부라렸다.
“거 창고에 돈 쌓아 두면 지들끼리 불어나나?”
“…….”
“상단주께서 상인이라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돈이란 건 필요한 데 안 쓸 거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돈은 제때 써야 한단 말이죠!”
황종의가 움찔했다. 지금 청명이 한 말은 과거 그의 아버지였던 황문약 역시 종종 하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도사는 도사라는 건가?’
워낙 도사 같지 않아서 자주 잊기는 하지만, 어쨌든 청명은 화산의 가르침을 받은 정통 도사다. 사소한 물욕 따위는…….
“그래야 두 배! 세 배! 돌아온다니까? 어? 그때는 황금을 갈퀴로 막 이렇게! 쓸어 모을 수 있다고!”
청명의 눈깔이 욕망으로 희번덕거렸다. 황종의가 흐뭇하게 웃었다.
네가 그럼 그렇지.
“어쨌든 그러니까 일단 이거 쓰시고, 돈 아끼지 말고 베푸세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잘 세서 장부에 따로 적어 두세요. 나중에 이자 쳐서 다시 받을 테니까.”
……황종의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은 그런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럼 대충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시겠죠?”
“물론입니다. 그런데…… 뭔가 다른 걸 할 생각이십니까?”
“제가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서요.”
“아, 화음을 비우시려고요? 무엇 때문에 가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수확하러요.”
“……수확이요?”
청명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씨를 양민들에게만 뿌려 둔 건 아니거든요. 내친김에 모조리 쓸어 와야죠.”
영문을 모르는 황종의는 그런 그를 멍하니 보기만 했다.
* * *
“하남?”
“이 와중에 하남을 간다고?”
오검의 얼굴에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이 떠올랐다. 그럴 만도 했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피난민 때문에 손 하나가 아쉬운 판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청명이 화음을 비운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예전이면 모를까, 청명은 이제 천우맹의 총사다. 중책을 맡은 이가 이런 중요한 시점에 발을 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이 미친놈아. 또 뭔 일을 벌이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여기가 정리가 된 다음에…….”
“사형.”
청명이 조걸의 말을 끊으며 윤종을 돌아보았다.
“요새 조걸 사형 말이 너무 많아진 것 같지 않아?”
“이해하거라. 별호가 생기지 않았느냐.”
“아아, 그래서구나.”
“아니야, 이 새끼야! 아니 그리고 사형도 뭔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조걸이 억울해하며 외쳤다. 청명이 혀를 찼다.
“뭐 같이 가기 싫으면 말고. 나 혼자라도 간다.”
“아니……. 사숙! 가만히 계시지만 말고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십시오!”
“……두거라. 저러다 죽게.”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백천이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잠시 후에야 느리게 고개를 들었는데, 얼굴에 세상의 모든 고통이 다 뒤섞인 듯했다. 그가 물었다.
“……그런데 진짜로 하남은 왜 가는데. 이유라도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안 듣고 뭐 했어? 말했잖아. 수확하러 간다니까?”
“거기 뭐가 있는데! 대체 뭐가 있냐고, 이 미친놈아! 설마 하남에 있는 양민들도 끌고 올 셈이냐?”
“오? 이야, 동룡이.”
백천이 뻔하다는 듯 청명을 마주 보았다.
“진짜구나. 그래, 이제 네 생각 정도는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요새 진짜 좀 멍청해진 것 같은데? 당 가주님한테 진맥 한번 해 달라고 해.”
“…….”
백천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종남이 봉문을 풀었는데, 지금이라도 가면 받아 주지 않을까?
그런 백천의 생각을 눈치챈 윤종이 다가와 조용히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젠 늦었습니다, 사숙.”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르대.”
“그냥 늦었습니다. 인정하십시오.”
백천이 말없이 눈가를 훔쳤다. 청명은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눈길로 보다 말했다.
“사람은 됐어. 이제는 다른 걸 회수해야지. 거기가 지금 핵심이거든.”
“응? 핵심이라니?”
청명이 씨익 웃었다.
“가 보면 알아. 어쩌면 그 양반들도 지금 우리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거야.”
“아니…….”
청명은 더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됐고! 그래서 가, 안 가?”
오검이 일제히 고개를 푹 떨구었다.
“……난 쟤 진짜 죽었으면 좋겠어.”
이 말이 유이설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도 이제는 놀랍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