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4화. 해 놓은 일들이 결과가 되어.(4)
“여, 여기가 숙소란 말입니까?”
“일단 들어가십시오."
“예?”
“밖에 그렇게 나와 계시면 다른 분들 숙소를 배정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일단 들어가서 짐부터 푸십시오. 다른 설명은 이따 한꺼번에 해 드릴 겁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순간에도 뒤로 새로운 이들이 연신 밀려들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저들의 표정이 조금 전 그가 지었던 것과 같으리라.
“이, 일단 들어가지."
"예."
마른침을 삼킨 이들이 앞쪽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리고 건물의 내부를 본 이들의 입이 절로 쩍 벌어졌다.
“......이게 뭔.”
겉이 그럴싸하긴 하나, 솔직히 내부는 창고쯤이나 되어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건물 안도 꽤 그럴듯하게 꾸며져 있었다.
허울 좋은 아름다운 장식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구색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다. 가벽으로 방을 적절히 나누었고, 벽 쪽에는 이불만 올리면 사람이 쉴 수 있는 침상까지 설치되어 있다.
“세상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부인의 어깨를 떨리는 손으로 잡으며 안내해 준 이를 돌아보았다.
“죄, 죄송합니다만……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 착오요?"
“예. 저희는 여기 손님으로 온 게 아니라 피난을 온 겁니다. 뭔가……"
사내가 송구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럴싸한 집을 봤는데 머물고 싶은 심정이야 왜 없겠는가? 아이도 지칠 대로 지쳤으니 일단은 아무 생각도 없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항상 빼앗기며 살아온 이들은 알기 때문이다. 손에 들어왔다고 여기던 걸 다시 빼앗길 때가 애초에 쥔 게 없을 때보다 배는 절망적이라는 걸.
이곳에서 살 줄로만 알았는데 다시 허름한 천막으로 쫓겨나게 된다면 그 실망을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우려에 대한 대답은 무척 간결했다.
"여기가 여러분...... 음. 채씨라고 하는군."
문패의 이름을 슬쩍 확인한 이가 태연하게 말했다.
“여기가 채 형 가족분들의 숙소고, 바뀔 일 따윈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십쇼. 다른 분들도 같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채씨 사내가 눈을 끔뻑였다. 확실히 뒤따라 들어온 이들의 행색도 딱히 그들 가족과 다를 바 없는데, 그들의 옆 숙소를 배정받고 있었다.
“그, 그럼 이걸 정말 써도 되는 겁니까? 그런데 여기에 온 이들은 다들……”
“집이 부족하지 않은 한은 그렇게 될 겁니다. 그 뒤는......”
말을 하던 이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아니요...... 그렇게 될 겁니다. 집이 모자라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 될 테니까."
영문 모를 말이었다. 채씨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일단 여기에 짐 풀고 쉬십시오. 지금은 바빠서 설명하기 어렵지만, 곧 맹에서
사람이 나와 앞으로 하실 일과 여러 가지를 알려 드릴 겁니다. 그럼."
"자, 잠시만!"
"예?"
몸을 돌리던 사내가 슬쩍 채씨를 돌아보았다.
“하, 한 가지만 더 여쭤도 되겠습니까?”
"예. 무엇입니까?"
“같이 온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 사람은 중간에 다른 곳으로 가던데."
“혼자 오신 분은 이곳 말고 다른 숙소를 배정받습니다. 한 사람에게 같은 크기의 집을
내어 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 그렇지요. 그럼?"
"예. 공동 숙소로 가셨을 겁니다."
“아…… 그럼 가족으로 온 사람들은 다들 이런...…?”
"아닙니다."
"예?"
사내가 슬슬 마음이 급한 듯 앞쪽을 한번 살피더니 빠르게 대꾸했다.
“이 숙소를 배정받은 분들은 어린아이가 있으신 분들입니다. 가족이라 해도 다들 한 채를 내어 드리지는 않습니다."
“아…..."
사내는 채씨의 등에 업힌 아이를 흘끗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며 애를 돌보기는 어려우니까요. 여하튼 다른 부분도 곧 다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럼."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빠르게 멀어져 갔다. 채씨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다 주어진 숙소를 돌아보았다.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여, 여보. 이럴 게 아니라……”
"그, 그렇지!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갑시다."
"그게 아니라요!"
"응?"
짐을 바리바리 들고 있던 부인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호북에 어떻게든 연락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형님네는 같이 안 왔잖아요."
“아, 그렇지. 섬서나 거기나 다를 것 없다고."
“여기가 이런 줄 알았으면 오셨을 것 아니에요? 보아하니 앞으로도 사람이 한참은 더 올 것 같은데요.”
"그렇……”
채씨가 순간 멈칫했다.
"그렇지만 기껏 우리가 불러서 왔는데 집이 모자라기라도 하면......"
"거기 비키십시오!"
“엑?”
채씨는 화들짝 놀랐다. 그들이 선 길을 따라 목재를 산더미처럼 쌓은 수레가 과격하게 질주해 오고 있었다.
"옆으로 비키시라니까!"
황급히 비켜서자 그들의 앞으로 수레가 쏜살처럼 지나갔다. 성인 남성 키의 두 배가량으로 쌓아 올린 목재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휘청거렸다.
쿠르르릉! 쿠르르릉! 쿠르르르릉!
그런 수레가 연이어 열 대가 지나갔다. 멍하니 먼지를 마시며 서 있던 채씨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은 안 모자라겠네."
“어떻게든 연락할 방법을 찾아봐요.”
“그래. 일단은 들어가세."
들어가기 전, 그는 문 옆에 박힌 문패를 보았다. 이름자 적힌 문패. 그는 이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
화산 중턱에 오른 청명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화음의 정경을 굽어보았다. 저 멀리서부터 줄을 지어 몰려온 이들이 화음에 차곡차곡 수납(?)되고 있었다.
"흐음, 많이 늦지는 않았네."
청명의 말에 조걸이 화들짝 놀라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야…… 너 이럴 줄 알고 있었던 거냐?"
"뭐가?"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올 줄 알았냐고. 그래서 이렇게 건물을 많이 올린 거냐?"
“그럼 뭐 때문에 집을 저렇게 많이 짓는 줄 알았는데?"
"그야...... 넌 뭘 해도 좀 과하니까 그냥 기세 타고 계속 짓는 줄 알았…… 청명아. 그래도 내가 사형인데 그런 눈으로 보는 거 아니다. 적어도 사람 보는 눈으로는 봐 줘야지."
“사람 같은 소릴 해야 사람으로 봐 주지.”
울컥한 조걸이 제 좌우를 가리켰다.
“나만 그리 생각했을 것 같냐? 뭐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지었을 것 같아? 사숙, 말 좀 해 보십쇼."
백천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나도.”
“저도요."
“아미타불. 뻔한 것을."
조걸은 할 말을 잃었다. 사형제들을 원망하는 눈빛이 흡사 나라 팔아먹은 간신배들 보는 듯했다.
“이 배신자들……"
"그러게 왜 먼저 말을 꺼내느냐.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고."
윤종의 위로 아닌 위로에 조걸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피식 웃은 백천이 다시금 청명을 바라봤다.
'정말 신기한 놈이라니까.'
다른 이들은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 무인들을 최대한 끌어모아 사패련을 상대할 것인지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다.
하지만 청명은 애초에 다른 곳을 보았다.
섬서에 돌아오자마자 그가 한 모든 일은, 따지고 보면 다 피난민들을 받기 위한 준비였다.
“얼마나 더 올 것 같으냐?"
"응?"
"피난민들 말이다. 적어도 두 배는 더 오겠지?"
백천의 물음에 청명이 뚱한 눈으로 흘겼다.
“그래도 애가 한때는 좀 영민한 맛이 있었는데."
그 순간 백천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그냥 대답만 하라고! 대답하기 전에 추임새 하나씩 넣지 말고."
“두 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제 시작이야."
청명이 피식 웃었다.
“섬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던 이들에게 소문이 퍼질 테니까. 아니, 소문은 이미 퍼지고 있어. 저들이 전하는 소식은 그 소문을 확인시켜 줄 뿐이지."
"......"
"굳이 피난 갈 필요 없는 지역 사람들이 아니라면, 첫 번째로 이곳을 고려하겠지. 그중 삼분지 일만 오더라도…… 흐음."
거기까지 말한 청명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렇네. 그럼 지금으로도 좀 부족한데 저쪽 산을 더 깎아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걸이 백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왜!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미안하다."
나도 저럴 줄 몰랐지. 근데 이 새끼야 내가 그래도 사숙인데……
조걸의 손을 털어낸 백천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물었다.
“네가 노리는 건 그 핑계로 함께 오는 다른 문파들인 거겠지. 내심으로는 천우맹이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대놓고 구파를 벗어나긴 어려울 테니까.”
“반은 맞아."
“하지만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너도 알다시피 저 많은 이들을 먹여 살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잖으냐? 화산이 지금껏 모은……”
"응? 먹여 살려? 내가? 저 사람들을?"
청명이 '그게 뭔 개소리냐?'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백천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시선에 정말 의아한 기색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럼 뭐 어쩌려고? 굶겨 죽이기라도 하려고? 어쨌건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면 돌아갈 때까지는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느냐.”
"돌아가다니? 어디로?"
그 순간 백천은 보았다.
청명의 얼굴에 그가 알던...... 정말로 익히 알던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이제 여기가 집인데 그게 뭔 소리야? 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지."
"......"
"어디 보자, 저기 지은 집에 세도 좀 받아야 하고, 이거저거 다 하려면 할 일이 좀 많겠네."
“세, 세를 받아? 야 인마! 저 사람들은 피난민이야!"
“……사숙.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저 양반들은 피난을 온 사람들이야.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아니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글......쎄?"
“당장 보름 전까지만 해도 맨손으로 먹을거리를 구하고, 자식을 키우던 일꾼들이라는 거지."
청명의 두 눈이 사특하게 물들었다.
“그냥 그 사람들이 호북에서 섬서로 이주한 것뿐이야. 여기에서 일할 데가 있으면 뭐 하러 굳이 호북까지 꾸역꾸역 돌아가겠어?"
“아니, 청명아. 네가 고향이 없어서 모르나 본데…..."
"와, 지금?"
“세상에, 저 양반 말하는 본새 보소."
“지금 청명이가 고아 출신이라고 까신 겁니까? 인간의 마음은 강남에 두고 오셨어?”
“아, 아니 그 말이 아니라!"
벌겋게 달아오른 백천이 빽 소리쳤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그 소리 하는 거잖아. 이
승냥이 떼들아!"
"변명 보소."
"인성도 보십시오, 아미타불."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청명이 피식 웃었다.
"아, 있지. 그렇지,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
“그러니까……”
“근데 사숙. 농사는 한번 시작하면 적어도 일 년은 걸려 안 그래?"
"응?"
청명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비틀렸다.
“땅에다 쟁기질 한번 하고 나서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너......"
“좋은 마음이야, 좋은 마음."
경악한 백천을 보며 청명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 사람들이야 일할 데가 있어서 좋고, 우리는 돈…… 아니, 땅 빌려주고 적당히 세
받아서 좋고. 그 와중에 화음도 발전시키고.”
“너, 전에는 분명히 그랬잖아. 화음은 지형이 안 좋아서 그리 클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어, 그랬지. 그 지형이 지금 어떤데?”
“그 지형? 어..….”
백천이 눈을 끔뻑였다. 이젠 눈앞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다시 봐도 쩔어."
“사람이 이걸 하네."
“수양제도 이걸 보면 미쳤다고 할 거야. 차라리 운하 파는 게 쉽지."
“어, 말 잘했네. 안 그래도 그거 할 거야."
"응? 그거라니?"
"운하."
순간 화산 제자들의 고개가 덜컥대며 한곳으로 돌아갔다. 저 멀리 도도히 흐르는 강 쪽으로.
“설마……”
"이게, 우물을 아무리 파도 답이 없더라고. 도시 근처에 강 하나 흐르면 대충 해결되지 않겠어?"
"......"
"그럼 농사짓기도 편해질 거고, 저 양반들한테 나눠 줄 농지도 더 확보되겠지."
"...... 네가 말하는 그 강이 혹시, 저기 위하(渭河)를 말하는 건 아니지?"
"여기 강이 또 있어?"
정적이 흘렀다. 백천은 가까스로 입을 떼었다. 묻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걸...... 누가 파는데?"
"......"
“청명아?"
돌아오는 대답 따윈 없었다. 청명의 등을 바라보는 백천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죽여라, 그냥 차라리 죽여.'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살기 위해 호북으로 피난을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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