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3화. 해 놓은 일들이 결과가 되어.(3)
"......후우."
얼굴에 노곤함이 가득 담긴 사내가 고개를 들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 넓지 않은 산길을 따라 사람들이 저마다 짐을 메고, 수레를 끌며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지?”
“저기 화산 안 보이십니까? 거의 다 도착했수다. 조금만 더 힘내십시오. 형님.”
옆에서 들려온 말에 사내가 고개를 든다.
그들이 오르고 있는 작은 산 뒤로 삐죽하게 솟아 있는 드높은 산이 보였다. 아직은 꽤 멀어 보이는 산. 하지만 산의 거친 형세만으로도 저 산이 오악 중 하나인 화산(華山)임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 말은 아까도 들은 것 같은데.”
“애는 괜찮수? 그래도 뭘 좀 먹여야……”
“내버려 두게. 잠이 더 보약일 때도 있는 거지."
사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 제 등에 업힌 아이를 바라보았다. 채 다섯이나 되었을까 싶은 작은 아이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 잔잔한 정이 담뿍 묻어난다.
“손에 든 짐이나 이리 넘기슈.”
“됐네. 내 짐을 자네가 다 들 셈인가? 벌써 가져간 짐이 애보다 더 무겁네.”
"나야 아직 형님보다는 젊잖소."
“비리비리한 놈이 입만 살아서는. 십 년은 끄떡없어."
“고집하고는. 그럼 형수님이 든 짐이라도......"
“됐다니까. 자네나 무리하지 말게. 나야 쓰러져도 챙겨 줄 사람이 있다지만, 자네는 없지 않은가?"
“...…그거 걱정해 주는 건 맞수?"
"그럼."
"......"
짐을 달라고 보채던 젊은 사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가 막 한마디 쏘아붙이려고 할 때였다.
"그런데 여보.”
"음?”
아이를 업고 있던 이가 고개를 돌려 제 아내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봇짐을 머리에 인 여인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물었다.
"......정말 섬서로 가는 게 맞을까요?"
"......"
"당신과 이 사람의 말을 듣고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저는 아무래도 불안해요. 그 멀고
낯선 곳으로 가서 우리가 정말 잘 살 수 있을지..….”
사내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 젊은 사내가 먼저 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 형수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잘 살고 못 살고는 나중 일이죠. 일단 목숨을 붙여 놓고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섬서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라고 하던데."
“그래도 섬서에는 천우맹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살던 데도 소림이 와 있다고……”
"아이고. 형수님.”
젊은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쳤다.
“소림이요? 언제 그 소림이 우리한테 눈길이나 준 적이 있었습니까? 구파니, 뭐니 하는 것들이 우리 살기 어려울 때 쌀 한 톨이라도 가져다준 적 있었냐 이겁니다.”
여인이 그 말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봤습니다. 그놈들이 호북을 지켜 줄 거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해 대는 걸. 그런데 그놈들이 지킨다는 호북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다 죽어 나가도 땅덩어리를 지키고 나면 잘했다고 자화자찬할 놈들 아닙니까.”
“그렇지."
아이를 업은 이가 추임새를 넣었다.
"물론 천우맹이 사천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건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천우맹을 어디 구파와 같은 곳으로 두겠습니까? 우리가 어려울 때, 누가 도왔습니까? 그 화산이, 당가가 장강으로 와서 곡식을 나눠 주고, 수적 놈들을 물리쳐 주었던 건 다 잊으셨습니까?"
"당연히 기억하지요. 저도 사람인데.”
천우맹의 구휼에 가장 큰 도움을 받은 이들은 누가 뭐라 해도 장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를 의미 있게 지켜본 것은 장강 사람들만이 아니다. 장강과 닿아 있는 호북 전역의 양민들이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구파 놈들이야 한 해에 한 번 정도 슬그머니 와서 생색이나 내고 돌아갔지. 뭘 해 줬습니까? 그런데 저 당가는 사천에서 떠나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도왔단 말입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저 당가가 사천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어디 사파 놈들이 범접이나 했겠습니까?"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커지자 주위를 걷던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부정하더라도, 천우맹이 그들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만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천우맹이 우릴 지킬 수 있을지야 모르지요.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도 둘 중 하나를 믿어야 한다면 천우맹을 믿어야지요. 입만 산 놈들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맞지."
“그렇지. 당연히 천우맹을 믿어야지!"
좌우에서 갑자기 격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애초에 이들은 천우맹에 자신을 의탁하기 위해 먼 거리를 갈 각오를 한 이들. 호의적인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내 생각도 같아."
"여보."
“힘든 거야 참으면 그만이지.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어?"
사내가 다시금 고개를 돌려 제 등에 업힌 아이를 바라본다.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는 돌아갈 날도 오겠지. 그러니 우리 참아 보자고. 응?"
제 남편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시선도 남편의 등에 업힌 아이에게로 향했다. 저 아이를 위해서라면 천 리 길이라고 마다하겠는가?
“박대나 안 당했으면 좋겠는데."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알고 있다. 천우맹이 그들을 반길 리가 없다는 것을. 이런 전시에 가장 짐짝 취급받는 이들이 바로 싸울 줄 모르고 식량이나 축내는 양민들이다.
진짜 전쟁이라면 사내들을 징집해 쓰기라도 하겠지만, 무인의 전쟁에는 그들과 같은 이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래도 설마 명색이 천우맹인데, 먼 길 온 사람들을 쫓아내기야 하겠는가? 처마 밑에 자리라도 깔아 주겠지.”
"......"
“어떻게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버텨 보세. 그러면 길이 있을 것이야.”
"......예."
사내가 굳은 다짐을 할 때였다.
“다 왔소이다! 저기만 넘으면 화음이오!"
그들을 호위하겠답시고 따라붙은 천양문(千陽門)의 사람이 크게 고함을 쳤다. 그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힘을 짜내어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어어?"
"......허어?"
산 정상에 오른 이들이 크게 눈을 끔뻑였다.
"……화음은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라 하지 않았던가?"
“저,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그들이 화음으로 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화음은 화산이 있는 곳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섬서의 최대 도시인 서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화음을 지나야 한다는 점이다.
혹여 화산이 있는 화음이 너무 작아서 기거할 곳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다 해도 서안으로 가 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에 펼쳐진 화음은 듣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곳이었다. 그들이 듣던 작은 마을은 온데간데없고, 바둑판처럼 건물이 늘어선 커다란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규, 균현보다 큰 것 같은데?”
"에이. 설마 균현보다야 크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아니. 그건 과하다 해도, 이게 작은 건 아니잖은가?”
"......그러게요?"
정상에 오른 이들이 산을 오른 피로조차 잊고 눈을 끔뻑였다.
"여기가…… 원래 이랬던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 종명이 ! 자네 얼마 전에 이 근처에 다녀왔다 하지 않았는가? 그때도 이랬는가?"
“내, 내가 왔던 이 년 전에는 진짜 작은 마을이었는데?"
"그래?"
사내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도시를 다시 바라본다.
“그렇다는 건 불과 몇 해 사이에 이걸 지었다는 건데...... 그럼 천우맹이 세상이 말하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곳인 모양이군. 그게 아니면 화산이 대단하던가."
그 말에 몇몇 이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곳에 천우맹의 총단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보이는군.”
"가시죠. 뒤에 사람 몰립니다."
“그러지."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발을 뗐다.
여전히 홀린 듯이 도시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작은 희망이 생겨 난다.
'이만한 도시를 만들 정도라면 매몰차게 박대는 하지 않겠지.'
아이를 업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이쪽으로!"
"에헤이! 거기 앞에! 짐 떨어졌소!"
"수레 조심하시오! 수레! 거, 거! 사람 부딪히잖소!"
화음으로 접어드는 그리 크지 않은 길에 사람들이 수도 없이 몰려들어 있었다.
"뒤쪽으로 가시고, 다음!"
아이를 업은 사내가 마른침을 삼키고 마을 진입로에 길을 막아서듯 줄지어 놓여 있는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저..…. 뭘 해야 하는......"
모두가 알아서 줄을 서길래 엉겁결에 줄을 서긴 했지만, 줄을 선 그도 여기서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차례가 되어 앞으로 왔을 뿐이다.
그 말에 앉아 있던 이가 고개를 획 들어 사내를 바라본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예? 저, 저희는 호북에서……”
"호북. 몇 명입니까?"
“.…..저와 안사람. 그리고 어린 자식 하나입니다."
“남자 하나, 여자 하나, 아이 하나.”
세필로 재빠르게 명부를 작성한 이가 준비된 나무 목패에 뭔가를 죽죽 쓰고 인장을 쾅 하고 박더니 사내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예? 이게 무엇인지……?"
“피난 오신 분들이라는 걸 증명하는 패입니다. 그게 있어야 배급을 받을 수 있으니,
잃어버리지 말고 잘 챙기십시오. 혹여 분실하면 은하상단으로 오시고."
“……예? 배급요? 배급이라니?"
사내의 물음에 앉아 있던 이가 머리를 긁적인다.
“안에 들어가면 아시게 될 겁니다. 기다리는 분들이 많으니 일단 들어가십시오."
"네? 아, 예!"
"이거 하나 더 받아 가시고 여기! 일가족 3인!"
앉아 있던 이가 외치기 무섭게 뒤쪽에서 대기하던 이 중 하나가 뛰쳐 다가온다.
"공동입니까?"
“가족에 애가 있잖아! 별채로!"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 예!"
사내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앞서가는 이를 따라나선다. 그러면서도 한 손으로는 제 안사람의 손을 꼭 잡았다.
"여보.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겁먹지 말자고, 나쁜 의도는 아닌 것 같으니."
“..….그래요.”
마을에 접어들면 대충 적당한 곳에 자리를 깔고 쉴 마음이었던 이들이다 보니, 연이어 벌어지는 일에 당황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당황스러운 마음은 가면 갈수록 조금 더 심해졌다.
'길이......'
석재를 빠짐없이 깔아 포장한 도로는 그가 생전 처음 볼 정도로 잘 닦여 있었고, 그
대로의 좌우로 커다란 전각들이 즐비해 있다.
칠도 하지 않고, 장식도 없는 전각이다 보니 그 모습이 더없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여기가 화음…...'
사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결심할 때였다.
“여기로, 이쪽으로 오십시오."
“예.”
앞서가던 이가 방향을 꺾어 대로보다 조금 작은 길로 들어섰다. 이 길의 좌우에는 조금 전 보던 커다란 전각이 아닌 조금 작은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보았던 건물에 비해 조금 작다 뿐이지. 그들의 눈에 대단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저기…… 저희를 어디로."
“여기입니다!"
“예?”
사내가 도착한 곳에는 가족으로 보이는 몇몇 무리가 먼저 와 있었다.
"어디 보자. 지금 순서가 어...... 아! 여기네요. 이 집입니다."
"예? 집이요?"
"예. 여기 아래층을 쓰시면 됩니다. 들어가 계시면 곧 사람이 가서 안내를 드릴 테니, 일단은 쉬고 계십시오."
"자, 잠시만요. 아래층이라니 그게 무슨?”
“목패 받은 것 주십시오."
"예? 여, 여기."
“이거 말고 하나 더 받으셨을 텐데?"
"그건 여기 있습니다.”
내민 큰 목패를 받아든 이가 앞쪽으로 가더니 숙소의 문 앞에 그 목패를 쿡 박아 넣는다.
“이제 여기가 여러분의 숙소입니다. 일단은 쉬고 계십시오."
“여. 여기……가?"
사내가 입을 쩌억 벌리고 그들의 앞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삼층으로 지어진 목재 건물.
“세……상에…...”
비바람을 맞으며 굴을 파고 살 각오까지 했던 그들에게 뚝 떨어진 웅장한 숙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