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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72화 (1,473/1,567)

1472화. 해 놓은 일들이 결과가 되어. (2)

“백검보(白劍堡)가 합류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청해문(靑海門)에서도 연통이 왔습니다. 문도들을 이끌고 이미 이곳으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법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파일방에 합류하겠다는 문파들의 연락은 오늘도 끊이지 않고 있었다.

“좋은 소식들입니다. 방장."

하지만 법계의 말에도 법정은 가타부타 대꾸하는 대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보고한 이를 슬쩍 보았다.

“혜도(慧度).”

“예, 방장."

"금일 합류 의사를 밝혀 온 문파가 몇이나 되더냐?"

"……서른 하고도 둘입니다.”

서른둘.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번에도 법정은 기뻐하기는커녕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직감한 법계가 조심스레 물었다.

“방장, 무슨 문제라도……"

하지만 법정은 대답하는 대신 혜도를 다그쳤다.

"연통을 보내지 않고 합류한 문파도 있지 않으냐? 그 수는 얼마나 되더냐?"

"오...늘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 그게 열여섯 정도……”

“열여섯이라 했느냐?"

“예, 방장."

"열여섯이 확실하더냐?"

“.…..그, 그렇습니다."

"어제는?"

“예?”

"어제는 몇이나 되는 문파가 왔더냐? 미리 연통을 넣지 않은 이들이 말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스물 정도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다시 확인해 보겠......"

"스물?"

하지만 혜도는 움직일 수 없었다. 스물이라는 말을 되뇌는 법정의 얼굴이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합류한 문파가 고작 쉰도 되지 않는다는 소리더냐?"

혜도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저 보고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이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법계."

“예, 방장.”

“당장 상황을 다시 확인해 보거라.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

“우리가 생각한 대로라면 지금쯤 이보다 두 배 가까이 되는 문파가 구파의 문을 두드렸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 수가 확연히 적지 않으냐? 무슨 사달이 나도 난 것이다."

“방장…… 쉰이라는 수가 그리 적은 수는 아닙니다.”

"확인하라고 하는 말이 안 들리느냐!”

법정이 날카롭게 노기를 드러내자 법계가 움찔했다. 그때 법정의 눈치를 연신 살피던 혜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본 것이 방장께서 생각하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법정의 고개가 그에게로 획 돌아갔다.

"무엇을 보았더냐?"

“그…… 제가 느끼기에는 오히려 가까운 호북과 하남의 문파들이 쉬이 합류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뭐라?"

법정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혜도를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 상황에 가장 마음이 급할 건 그들일 터인데.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엇을 고민하느라 지체한단 말이냐?"

"그게......"

그때 법계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혹 그들이 천우맹과 구파 사이에서 아직 결정을 저어하고 있는 건 아닐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법정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부인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방장, 하지만……”

"자존심을 내세우느라 하는 말이 아니니라. 이미 상황은 단순한 세력 싸움을 넘어섰다. 이미 호북은 우리가 지키는 곳이 되었고 섬서는 저들이 지키는 땅이 되지 않았느냐?”

“그러하……기는 합니다. 방장.”

“그런데 저들이 무슨 수로 섬서에 합류한단 말이더냐?"

“……물론 방장의 말씀이 맞긴 합니다. 하지만 섬서가 조금 더 안전하다 느끼는 이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법정은 여전히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

“섬서가 더 안전할 리도 없지만, 안전하다 해서 그곳까지 달아날 수 있겠느냐? 저들은 소림이 아니다. 그리고 무당도 아니지. 위험하다 해서 먼 섬서로 떠났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올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으음."

“정말 목이 달아날 상황이라면 또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결국은 발붙이고 살아가던 땅에서 익숙한 이들의 눈치를 보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거라. 정파라는 것들이 위험에 처한 제 지역의 양민들을 두고 발을 뺐다가 돌아온다면, 누가 그들을 환영해 주겠느냐?"

구파일방 같은 거대 문파들은 나름의 사업체를 통해 자금을 수급할 수 있다. 하지만 작은 중소 문파는 결국 그 문파에 적을 두고 무학을 배우는 이들이 내는 돈으로 문파를 굴려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 지역에 문파가 하나뿐일 리는 없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 발을 빼 버린 문파에 누가 적을 두려 하겠는가? 다른 곳도 얼마든지 있는데.

그렇기에 저들의 운신은 생각보다 자유롭지 않았다.

“하, 하지만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방장?"

“무슨 다른 연유가 있을 것이다. 그걸 빨리 파악해야……”

"저......"

그때 혜도가 법정의 눈치를 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짐작 가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만……”

"짐작? 무엇이더냐?"

"확실한 건 아니라…… 일단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혜도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법정의 시선이 그를 따라갔다.

잠시 후, 법정이 혜도를 따라 도착한 곳은 호북의 커다란 번화가를 벗어난 평범한 촌락이었다. 법정이 조금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이게?”

열을 지어 가는 짐수레들과 등에 큰 봇짐을 짊어진 이들이 보였다. 혜도가 조심스레 말했다.

"피난민들입니다.”

"피난?"

혜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이곳이 곧 전장이 될 판이니 떠나는 이들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더냐? 우리가 지켜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미 천하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고 전했거늘!"

“예, 그렇습니다만……”

혜도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인들에게야 그게 맞는 말일 테지만, 양민들에게 어디 그 말이 들리겠습니까?”

법정의 눈이 살짝 떨렸다.

“방장의 말씀이 다 맞습니다. 떠나는 것은 어렵고, 다시 돌아오는 건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곳에 지킬 것이 있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제 몸 외엔 지킬 게 없는 이들은……”

순간 법정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혜도의 말을 이해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이런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법정이라고 무인이 아닌 이들에게 관심을 안 두었던 게 아니다.

그 역시 호북의 민심을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고, 실제로 종종 전각을 벗어나 세인들을 살피기도 했다.

'충분히 안정되었다고 여겼거늘.'

하지만 이런 곳까지 와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니 새삼 알게 된 것이다. 그가 거하는 전각이 있는 곳은 이 호북에서도 가장 부유한 이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것을. 그 지역의 부유한 이들과, 지금 피난을 가고 있는 저들의 생각이 같을 리 없다는 것을.

이를 놓친 건 분명 법정의 실수였다. 하지만……

“그런데 이들이 피난을 가는 것이 너의 짐작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저기 보이지 않으십니까?"

혜도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끝에 놓인 건 검을 찬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피난을 떠나는 이들을 도와 수레에 짐을 싣고 있었다.

"뭘 하는 것이더냐?"

“저도 지나가다 얼핏 본 광경이라…… 지금까지는 그저 피난 가는 이들의 준비를 돕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피난을 떠나는 이들을 호위까지 하는 모양입니다."

“호위?”

법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호위라니! 위험한 곳에서 안전한 곳으로 가는 이들에게 호위가 왜……"

하지만 그는 이내 말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호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동의를 구하듯 혜도를 바라보자 그가 난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어디더냐?"

"......"

“저들이 지금 어디로 피난을 가는 것이더냐?"

혜도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법정이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짐을 짊어지고 길을 나서는 이들 쪽으로 다가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미타불, 말씀 좀 묻겠습니다."

힘겹고 고단한 얼굴로 걸음을 떼던 이들이 법정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스님,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가 도움은 드리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가진 것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법정을 보고도 소림이 아닌 평범한 불가를 떠올리는 이들이다. 이 호북에 소림이 와 있다는 말조차도 그저 지나가는 소리로만 들릴 뿐, 머리로는 생각할 여력이 없는 이들.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질문을 들은 이가 헛헛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피난을 가는 것이지요. 여기에 곧 사파 놈들이 쳐들어와 전쟁터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피난이라면, 어디로?"

"그야 뻔한 말씀을. 당연히 섬서로 갑니다."

소매 안에 감춰진 법정의 손이 순간 움찔했다.

"어째서 섬서입니까? 소승은 섬서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들었습니다만."

“예, 그렇다고들 합니다만…… 그래도 섬서가 낫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천우맹이 있으니."

"......이곳에도 구파가 있지 않습니까?"

"예?"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이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법정을 보았다. 영문을 모르겠으며, 여기서 구파일방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 자체를 이해 못 하겠다는 듯한 눈빛이 법정을 당황케 했다.

법정이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구파일방도 이곳을 지키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제야 이해를 하겠다는 듯 작게 탄성을 흘린 이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법정은 보았다. 그의 눈이 품은 감정이 승려에 대한 배려에서 경계심으로 또렷하게 변해 가는 것을 말이다.

“그렇지요. 그렇긴 한데…… 저희는 그저……”

알 수밖에 없다. 아무리 미세하다고는 하나 소림의 방장인 그가 무학도 익히지 못한 양민의 움직임을 놓칠 리는 없으니.

그때 뒤쪽에서 법계와 혜도까지 다가오니 그의 몸은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저희는 그저…… 그냥 누군가가 하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예…… 저희 같은 무지렁이가 뭘 알겠습니까?"

“그저 그...... 섬서로 가는 것이 좋다고 하니까......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법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눈앞의 겁에 질린 양민을 보며 입을 열었다.

"혜도."

"예, 방장."

그의 뜻을 이해한 혜도가 품 안에서 작은 돈주머니를 꺼내 조심스레 법정에게 내밀었다.

“아미타불 가시는 길에 보태 쓰십시오."

“아, 아닙니다, 스님. 저희는 이런 걸....."

“받으십시오.”

법정이 극구 돈을 꼭 쥐여 주자 사내는 몇 번이고 굽실거리고는 몸을 돌렸다. 여비까지 보태 주었음에도 몸짓에서 법정에 대한 두려움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이들을 빤히 바라보던 법정이 헛웃음을 흘렸다.

"......섬서. 화산이로구나.”

"......"

“저들은 화산으로 향하고, 저런 저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문파가 이곳에서 발을 빼고 있다. 이 말이더냐?"

“방장‥….”

"어째서냐?"

법정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천우맹에게 저들을 지킬 힘이 없음은 이미 천하에 알려지고도 남았거늘. 사천이 사패련의 손에 떨어진 순간, 우리만이 힘이 있음을 천하 만민이 이해했을 터인데."

"......"

“그런데도 어째서 아직 천우맹에 매달린다는 말이더냐? 어째서?"

분노도 허탈함도, 그렇다 해서 실망이나 경멸도 아니었다. 법정의 목소리에 실린 것은 그저 당혹감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보고도 이해할 수 없는 것.

완벽했던 법정의 계산을 뒤튼 것은 그가 단 한 번도 세상을 움직이리라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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