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1화. 해 놓은 일들이 결과가 되어.(1)
"...... 솔직히 이건 대단한 거지."
“인정한다."
“말이 되는 짓인가 했었는데 말이죠.”
조걸, 윤종, 당소소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무모한 짓을 벌이는 데는 이골이 나 있다. 그렇기에 화음의 산을 밀어 버리고, 거기에 본단을 세운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어떻게든 되겠거니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그런 그들의 비범해진 상식조차 초월하고 있었다.
"...... 굴리면 뭐든 되는구나."
“보통은 이렇게 안 되죠. 보통은요. 이게 어디……"
“화산 놈들이 천 명이어도 이렇게는 못 했을 겁니다. 뭔가 다양하게 써먹을 인간이 넘쳐난다는 게 주요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
누구도 말하지 못했다.
물론 그 사실도 주요하긴 했지만, 이 비정상적인 공사 기간 단축의 가장 큰 원인은 각 문의 문주들이 노예처럼 굴려지고 있어서라는 걸.
사람은 누구나 요령을 부리게 되어 있다. 일을 더 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란 하늘 아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령 그게 체력 좋은 무인이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앞에서 문주가 돌 나르고 못 박는데 무슨 수로 요령을 부리지?'
심지어 개중 무력이 부족한 설소백마저 큰 돌을 얼려서 깨뜨리는 발파조에 합류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판이다. 눈치가 뭔지 아는 인간이라면 감히 놀고먹을 생각 따윈 하지 못할 것이다.
"의도한 걸까요?"
조걸의 물음에 윤종이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설마……”
“했음. 분명히."
유이설의 단호하고 단정적인 어조에 윤종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도 사실 내심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던 중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놈한테 총사 자리 같은 건 주면 안 된다니까.'
문주들도 몰랐을 것이다. 그 하나의 선택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은.
“뭐...… 어쨌든 간에 결과가 좋으면 됐지.”
유야무야 넘어가는 윤종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조걸만은 뭔가 걸리는지 께름칙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은 맞는데요, 사형."
"응?"
“근데 이거 좀…..."
조걸이 저 먼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과장 조금 보태어 지평선까지 뻗을 기세로 지어진 도시를.
"...... 과한 것 아닙니까?"
"......"
“진짜 도시라도 만들 셈인가? 저 미친놈이?"
***
“아, 말귀를 진짜 못 알아 처먹네! 지붕 좀 뒤틀린 건 상관이 없다니까? 이해가 안 돼?"
"끄응...... 총사님. 이게 이렇게 뒤틀리면 결국 나중엔 비가 샙니다. 그럼 전각이 썩게 되고, 사는 사람이 불편……”
"불펴어어어언?"
청명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이것들이 배가 처 불러서는! 어? 나 때는 들판에 누워 자다가 비가 쏟아져도 그냥 처맞고 잤는데! 뭐? 비가 새서 불편해?"
“…… 대체 그때가 언젭니까."
"시끄럽고! 구멍 난 데는 대충 판자 덧대든가, 진흙 발라 가면서 쓰고 그때그때 수리하면 돼! 지금 지어야 할 집이 몇 갠데 거기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 오늘 내로 백 채는 더 올려야 하는데."
“배, 백 채나 더 말입니까? 그 그건 어렵습니다. 벌써 해가 지고 있......”
“해가 지면 뭐? 무인이란 것들이 해 좀 떨어졌다고 일을 못 해?"
“잠......도 자야 하고."
"괜찮아 괜찮아. 한 닷새 안 잔다고 안 죽어. 내가 다 해 봤어."
전각에 달라붙어 있던 이들의 먼지투성이 뺨 위로 뿌연 눈물이 길을 내며 흘러내렸다.
처음 청명이 당가의 장인들을 중심으로 본단을 세운다고 했을 때만 해도 기꺼운 마음이 가득했는데……
“여, 여기에는 마당이 들어가야 합니다. 총사님! 이러면 할 수 있는 게 없......”
"필요 없어. 그냥 집만 지어."
"그, 그럼 집을 조금 더 크게 지어야 하지 않습니까? 마당도 없는데, 이걸 이렇게 붙여 지으면…… 아니면 적어도 담이라도……”
"담? 다아암? 그런 게 사람 사이 나누고 그러는 거야! 얼마나 정겹고 좋아?"
"아니......."
목재를 나르던 이가 지어지고 있는 집을 바라보았다.
당가 전각의 반도 되지 않는 크기, 그런 집들이 층층이 올려져 줄줄이 생겨나고 있다.
'다른 문파들은 원래 이렇게 사나?'
그럴 리가 없는데? 실제로 화산의 전각을 수리한 것도 당가가 아니던가? 그때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아니, 뭐 이건 그럴 수 있다 치자. 상황이 급한 와중에 살 사람의 편의까지 모조리 봐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천우맹도들을 수용할 만한 집은 이미 다 올렸는데, 왜 계속 집을 늘려 나간단 말인가?
“머리 굴리는 소리 들리지?"
"히, 히익!"
“사람이 일할 때는 잡념이 없어야 하는 거야! 수련할 때도 마찬가지고! 생각을 싹 비우고 일을 하란 말이야!"
귀신은 뭐 하나, 저 인간 안 잡아가고, 애먼 귀신만 벌써 수십 수백 차례나 머리채를 잡혔다.
청명이 핏발선 눈으로 주위를 획 돌아보았다.
“여하튼 장인이고, 문주들이고 다 마음에 안 들어! 하나같이 느려 터져서는! 뭔 일을 이따위……"
“청명아."
"뭐요?"
날카롭게 반응하며 획 돌아본 청명이 순간 움찔했다. 그러더니 얼른 공손하게 양손을
모았다.
“헤헤. 부르셨습니까, 장문인?"
그 모습을 본 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쩍 벌렸다.
'저 가증스러운 인간.'
'세상에, 방금 표정 바뀌는 것 봤어?'
'황궁에 보냈으면 역사에 남을 간신이 되었을 텐데.'
청명의 공손한 예의를 받으며 운암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 잠시…… 괜찮겠느냐?"
"예, 그럼요! 당연하죠!"
“...... 그럼 잠깐 걷자꾸나."
"예!"
운암이 청명을 데리고 가자 모두의 입에서 일제히 한숨이 터져 나왔다.
“..….우리 앞으로도 계속 이 꼴을 겪어야 하는 건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냥 금분세수하고 양민으로 살까?"
“그건 괜찮은데, 그 집도 형님이 지어야 할 거요."
"......제길."
한편, 뒷짐을 지고 걷던 운암은 어색한 헛기침을 흘렸다.
"그…… 나도 뭔가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에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람들 관리하고, 일이 잘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요?"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다. 청명이 미친놈처럼 산발하고 뛰어다니며 운암이 해야 할 일을 다 해 버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무래도 나 역시 장문인으로서……"
"에이. 화산 장문인이 체면이 있지, 어디 하찮은 일을 하시……”
“나무 정을 더 가져와라! 말한 지가 언젠데 아직 안 오느냐!"
옆쪽에서 마침 들려오는 당군악의 목소리에 운암이 뚱하게 청명을 바라보았다.
“......려고."
말끝을 얼버무리듯이 맺은 청명이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운암이 한숨을 쉬었다.
“네가 나를 배려해 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나는 저들과 같이하고 싶구나."
청명이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는데요. 장문인은 이미 충분히 일하고 계세요."
“그건 무슨 말이더냐?"
"지금 제일 불안할 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화음의 원래 주민들이거든요."
이 말에는 운암도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음 사람들 입장에선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던 동네가 실시간으로 천지개벽하고 있으니 동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화음 사람들은 저기에 칼 찬 무인들이 잔뜩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렇지. 그리고 맞는 말 아니냐?"
“무서울 거예요, 당연히."
운암은 순간 청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부분은 그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지금껏 화산 사람들과 화음의 사람들이 너무도 잘 어울려 왔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장문인께서는 여유를 보여 주시는 게 중요해요. 실제로야 어떻든, 화산이 지금부터 들어올 무인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줘야 저들도 마음이 편해질 거예요."
"으음.”
"무인은 무인일 뿐이에요. 우린 혼자서는 농사도 못 짓는 인간들이죠. 화음 사람들의 협조가 없다면 화려하게 잘 지어 놓은 총단도 무용지물이 될 뿐이잖아요?"
운암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 왜 그러세요?"
“글쎄. 왜 그럴까?"
운암은 현종과는 다르다. 그는 청명이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자신이 그리 대단할 게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새삼스러웠다. 옆에서 그저 지켜보는 청명과, 장문인이 되어 겪는 청명은 확연히 달랐다.
“알겠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뒷짐이나 지고 이들을 감시하는 듯 돌아다니는 게 낫다는 말이로구나. 내가 무능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럼요! 당연하죠. 에이, 무능이라니. 그런 건 생각도 안 해 봤어요."
“그래. 그렇구나.”
운암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물론 그 역할을 더 잘하실 수 있는 태상장문인께서는 지금도 혹사당하고 계시지만 말이다?"
“어…… 그런가?"
청명이 딴청을 부렸다. 운암이 고개를 내저었다.
청명이 정도 되는 아이가 단지 그것만 노렸을 리는 없다. 아마 이 모든 과정이 화음 사람들에게, 그리고 다른 문파 사람들에게 이제 화산의 장문인은 현종이 아니라 운암임을 확실히 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에 관해 몇 마디를 더 해 볼까 고민했던 운암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저 두면 된다. 이 녀석이 하고자 하는 대로. 그 뜻을 이해하여 도우려 하는 것조차도 때로는 방해가 될 수 있으니까.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느냐?"
“에이, 하나뿐이겠어요? 백 개도 더 물으셔도 돼요.”
"그런 것치고는 엉덩이가 들썩대는 꼴이 영 바빠 보이는데?"
“아, 설마요. 수련하다 좀 다쳐서."
천연덕스러운 청명의 대답에 운암이 피식 웃었다.
“내가 보아하니 이미 지어진 전각이 충분한 것 같더구나."
“아직 부족하죠.”
“네가 그리 대답할 줄은 알았다마는...... 그런 것치고는 이미 각 문파가 쓸 구역마저 다 지어진 것 같던데?"
......그 말에는 청명도 부정하지 않고 어색하게 웃었다.
"보셨어요?"
“내가 너보다 뛰어나진 못해도 멍청하진 않다. 스승님은 외부의 기색을 살피는 데 평생을 보내셨지만, 나는 안의 눈치를 살피는 데 평생을 쓴 사람이다."
"무엇을 하려는 것이더냐? 아무리 봐도 이곳은 평범한 총단으로 느껴지지 않는구나. 급히 짓다 보니 요새 형태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총단의 기본은 있을 터인데...... 내 아무리 봐도 이곳은 진짜 도시 같구나. 그것도 아직 배는 더 뻗어 나갈 도시 말이다."
청명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맞아요, 장문인.”
그 태연한 인정에 운암이 미간을 슬그머니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이곳에 도시를 지어서 어쩌려고? 너도 알다시피 여기는 도시가 발전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이곳을 서안처럼 만들려는 건……”
“에이, 그게 아니죠."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도시라는 게 대뜸 짓고 싶다고 지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저도 알아요.”
“……음? 그런데?"
그런데 왜 이런 일을 벌이냐는 것이었다.
"뭐......"
청명이 제 머리를 긁적였다.
“없는 사람을 오라고 할 수는 없죠. 도시를 지어 놓고 사람을 강제로 데려오는 건 이상하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오는 사람은 받아야죠."
"......응?"
운암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청명을 빤히 보았다.
그 와중에 그들의 발길은 어느새 화음의 끝자락에 도달해 있었다. 다른 지역과 이어진
길이 뻗어 있다. 화산의 사람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그곳.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그게 무슨……”
“아, 역시, 저기 오네요.”
“응?”
운암이 청명이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획 돌렸다.
‘뭐가 온다는……"
그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저, 저건......”
멀리 보이는 지평선. 희미하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는 게 보였다.
운암은 느꼈다. 지금 다가오고 있는 저들에게 조금의 적의도 없음을, 아니, 적의 따위를 따지기 이전에...... 무인조차 아님을 말이다.
청명이 히죽 웃었다.
“저쪽도 머리를 굴린 것 같긴 한데요. 그렇게 머리 한번 굴린다고 얻을 수 있는 거였으면, 이런 개고생은 안 했죠. 이제 올 거예요. 우리가 해 놓은 일들이 결과가 되어."
...…그 말을 들은 운암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