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0화. 역사 한번 만들어 보죠. (5)
"조, 조심해, 거기!"
“잘못하면 사고 난다니까!"
과장 조금 보태어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를 지고 옮기는 이들의 입에선 연신 죽는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이거 너무 큰 거 아니……”
“더는 못 자른다잖아."
“그, 그럼 자기들이 쳐들고 옮기든...... 끄으으.”
"어어! 넘어간다아아아아!"
십여 명이 억지로 지고 옮기던 바윗덩어리가 순간 기우뚱 옆으로 넘어갔다. 사색이 된 이들이 일단 사방으로 몸을 날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
"......으응?"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조심스레 눈을 뜨자, 그 바위를 지탱하고 있는 솥뚜껑만 한 손이 보였다.
"구, 궁주님?"
"쯧쯧.”
넘어가려던 바위를 한 손으로 받친 야수궁주 맹소가 버럭 소리쳤다.
“야수궁도라는 것들이 고작 이런 바위도 제대로 옮기지 못해 쩔쩔맨단 말이냐!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고!"
그 말을 들은 이들이 찔끔하여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몇몇 이들은 슬그머니 불만이
치솟는 모양이었다.
“인간적으로 너무 크지 않습니까? 사람이라도 더 붙여 주셔……”
"뭐야!"
그 순간 맹소의 입에서 벽력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사람이 더 필요해? 너희가 더 강해지면 되지! 강해지기를 마다하고 머릿수로 메꾸겠다는 거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모자란 놈들 같으니! 비켜라!"
맹소가 양손을 뻗어 바위를 콱 움켜잡았다.
“우라차아!"
그러더니 제 몸보다 열 배는 클 것 같은 바위를 단숨에 들어 올려 어깨에 짊어졌다.
"히, 히익."
“세상에……"
각자의 일을 하던 다른 문파 사람들은 물론이고, 맹소에게 익숙한 야수궁도들조차 눈이 튀어나오도록 놀랐다. 그 정도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정작 맹소는 이 정도야 당연하다는 듯 태연히 바위를 짊어진 채 성큼성큼 나아갔다.
"어디로 옮기면 되는 것이냐?"
"이, 이쪽입니다. 궁주님!"
“앞장서라.”
"예!”
사람을 앞세우고 걸어가는 맹소를 보며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저건 단순히 내력이 강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천생의 신력이 남다른 이여야 손이라도 대 볼 수준이 아닌가?
“뭐 하느냐! 어서 남은 것들도 들고 오너라!"
"예! 예! 궁주님!”
야수궁도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의욕적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지켜보던 누군가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장난 아니네 진짜."
“참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든 되기는 하네."
"그러게나 말이야."
사람들이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인들을 동원했다지만, 그래도 이만한 속도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상식을
초월한 속도의 비결 중 하나는 누가 뭐라 해도 문주들과 장로들이었다.
“세상 신기한 광경이 아닌가. 일문의 문주 정도 되는 양반이 바윗덩어리를 지고 나르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어디 야수궁주님뿐이야? 당가주님은 전각에 못질하고 계시더구먼."
"마, 망치를 들고?"
"뭔 헛소린가? 나무 정을 귀신같이 날려서 한 번에 수십 개씩 박아 버리시던데? 웬만한 목수가 반나절 내내 해야 할 일을 숨 한 번 쉴 때 끝내시더군."
"허허…… 거참."
무학이 절정에 오른 문주들이 거들면 일당백이 아니라 일당천도 할 수 있음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천하의 누구도 문주에게 감히 그런 부탁을 꺼내지 않는다. 한 문파의 문주, 그것도 오대세가나 새외오궁의 문주쯤 되는 이들은 그런 잡스러운 일을 할 사람들이 아니니까.
당가의 가주가 목수 일을 하고, 야수궁의 궁주가 짐을 나른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일침을 놓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곳에선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목재에에에에에에에!"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도위가 새로 만들어진 화음의 대로를 질주했다.
“목재! 목재가 부족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이렇게 느린 겁니까?"
“그, 아까 화산 분들이 석재가 모자라니까 빨리 바위부터 옮기라고 하셔서……”
“목재는 당장에 집을 올릴 때 필요한 건데 일에 선후가 있지!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목재부터 옮긴다고 하십쇼."
"소, 소가주님. 그게……”
"그거 이리 내십시오!"
남궁도위는 더 말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야수궁도가 끌고 있던 수레를 반쯤 강제로 탈취했다.
"아, 아니, 이건 저희가......"
"빌어먹을, 오늘 해 지기 전에 일 못 끝내면 총사가 날 죽이려고 할 거란 말입니다! 대신 맞아 주실 겁니까?"
눈에 핏발을 세우고 거세게 몰아세우는 남궁도위의 모습에 야수궁도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바빠 죽겠는데! 빨리 나르십시오. 다음 수레!"
남궁도위가 올 때 그랬듯이 먼지구름을 날리며 길을 질주해 갔다.
"으악!"
“살살 달려요! 사고 납니다!"
길을 오가던 이들이 폭주하는 수레를 피해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멍하니 바라보던 이들의 입에서 넋 나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꿈이라도 꾸는 건가?"
"그러게나 말일세."
“거참…… 아, 그런데 보고 있자니 남궁세가 분이나 야수궁주님, 당가주님은 보이는데 다른 문주님들은 잘 보이지 않는군."
말을 꺼낸 이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살짝 우쭐하는 표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화산 장문인께서 저들 중에 제일 힘이 세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닐까? 그분은 적어도 짐은 안 나르시지 않는가?"
물론 화음 사람들은 천우맹에 대한 애정이 큰 편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화산에 대한 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다른 문파의 문주들이 개고생하는 와중에 화산 장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은근히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 자네. 설마 못 들었나?"
"뭘?"
"...... 아닐세.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장문인께서 뭘 하고 계시길래?"
“장문인이 아니라 태상장문인 말일세."
"응?"
말을 꺼낸 사내의 안타까운 시선이 멀리 있는 전각으로 향했다.
터억!
새로이 쌓인 장부를 마주하자 현종의 눈에선 삽시간에 영혼이 빠져나갔다.
"이, 이걸 더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태상장문인."
"그, 그렇지요?"
“이것만 하는 게 아니라, 오늘 내로 해야 할 일이 세 배쯤 더 남았습니다.”
이를 악물자 현종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이 외에도 서안에서 구매할 물품 목록을 점검하셔야 하고, 사방에서 날아들고 있는 문파들의 인명록을 재작성해서 인원 파악을 해 주셔야 합니다. 아! 그리고 이 장부에는 지금 이 시점까지 화음에 새로 지어진 전각을 기록해 두었으니 각 문파를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이걸......"
“그, 그만…… 그만……”
현종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누, 눈이 너무 아픈데 조금 쉬었다가……”
“아이고, 태상장문인 화산의 태상장문인이 장부 좀 보셨다고 눈이 아프다니요. 세상 사람들이 다 웃을 것입니다. 농담도 잘하십니다."
진짠데? 진짜 지금 눈알 빠질 것 같은데? 내 나이가 몇인지는 아시오?
현종은 주먹을 꽉 쥐었다. 보는 눈이 없었다면 이미 머리를 몇 차례나 쥐어뜯었을 것이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도 현종은 차마 이 일을 못 하겠다고 외치지 않았다. 아니, 외치지 못했다.
그의 주변에서 펼쳐지고 있는 지옥도 때문이었다.
"숫자가 안 맞잖습니까, 숫자가!"
“열 번은 다시 확인했는데, 그게 안 맞을 리가 있나?”
“지금 여기 안 보입니까? 눈깔이 옹이구멍이십니까?"
“그, 그게 왜 또 틀렸지?”
이번엔 현종의 눈이 반대쪽으로 돌아간다.
"여기 장부에 적힌 내용이랑 창고에 있는 실수량이 다르잖아! 어느 잡놈이 해 먹은
거냐?"
"예? 어디 봅시다. 아아, 이거 지난달에 낙양의 백령표국에 빌려줬잖습니까?"
“그걸 왜 장부에 안 적어 놔 이 미친놈아! 내가 이걸 몇 번 다시 본 줄 아느냐!"
두 눈 아래로 음영이 턱 끝까지 내려온 이들이 거의 발악하듯 장부를 뒤지고 있었다. 현종이 살짝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총관."
"예?”
“상단이라는 게 원래 일이 이렇게 많은 겁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거의 도시 하나를 새로 짓는 일입니다. 거기에 필요한 물품은 일반적인 상단이 일 년 동안 옮길 물품보다 많을 겁니다."
"......"
“그나마 저 사천 분들, 어…… 이름이……?”
“사해상회.”
“예, 예! 사해상회 분들이 와 주셔서 다행이었습니다. 저분들 아니었다면 저희 상단주님도 복면 쓰고 화음에서 탈출하셨을 겁니다.”
순간 현종의 뇌리에 황문약의 얼굴이 떠올랐다.
“…… 아까 보니 밖에서 구경이나 다니는 것 같던데.”
“아, 모르셨습니까?"
"뭘 말이오?"
“상단주님은 조금 뒤에 현영 장로님과 낙양으로 가십니다. 거기 있는 상단에서 물품을 구매한다고 하시더군요."
"......"
"구매 내역 장부만 거의 한 수레 수준이니, 한 상단에서는 다 구하지 못하겠지요. 아마 낙양과 서안의 상단들이 전부 달려들어야 할 수준일 겁니다."
"현영이는 왜 가는가?"
“상단주님이 말씀하기를 살아생전 그렇게 물품 가격 잘 후려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하시더군요. 심지어 돌아가신 선대 상단주께서도 그 정도는 아니셨다고."
현종은 잠깐 말을 잃었다. 상단주들을 모아 놓고 욕을 퍼붓는 현영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하지만 현종은 금세 그 모습을 지워 버렸다. 체면이고 나발이고 그부터 살고 볼 일이었다. 턱짓으로 앞의 장부들을 가리켰다.
"...... 그럼 대체 이건 언제 끝나오?"
"듣자 하니 상행에 나섰던 사해상회 분들도 섬서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사흘 정도 후에 합류할 수 있다고 하니, 아마 그때부터는 여유가 조금 생기지 않겠습니까?"
현종의 얼굴이 순간 붉게 확 달아올랐다.
사흘? 이 짓을 사흘이나 더 하라고? 잠도 안 재워 주면서?
"이, 이건 너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와장창!
현종이 있는 내실의 옆문이 벌컥 열리더니 그 안에서 장부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아이고, 괜찮으십니까? 기절하신 것 같은데.”
“이 양반은 뭐가 이리 약하시지?"
"쉿, 조심하시게. 이분이 그 녹림에서 오신 분이네.”
"엥? 나는 황궁에서 학사분이 오신 줄 알았는데."
현종은 장부 더미와 함께 쏟아진 이를 멍하니 보았다. 낯빛만 보면 그냥 시체라고 부르는 편이 나아 보이는 임소병이 장부를 손에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현종이 봐야 할 것보다 다섯 배는 더 많아 보였다.
“이러다 몸 상하는 것 아닌가? 옮겨야……”
"조용히 하게. 이건 다 화산검협이 따로 지시하신 것들이네. 우리가 빼고 말고 할 게
아냐."
"...... 그럼 해야지."
현종의 눈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설마 그가 화산의 제자가 아닌 산적 놈의 입장에 공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물론 반대편에 있는 화산 제자가 평범한 제자가 아니라 망할 제자 놈이기는 하지만…….
현종이 양심껏 물었다.
"저, 저긴 조금 과하지 않소?"
“좀 그렇기는 하지요."
장부를 또 날라 오던 은하상단의 총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저 양반이 보시는 장부가 인원과 무기에 관련된 것들이라 다른 이들이 보면 안 된다고 하던데…… 아! 태상장문인께서는 천우맹의 맹주시니 당연히 보셔도 되겠군요. 그럼 어떻게 조금 도와주시겠습니까?"
측은한 시선을 보내던 현종이 자리에서 주저 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쓰러진 임소병에게로 다가갔다.
총관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협의와 인정의 화산……
턱! 턱!
그 순간 현종이 쏟아졌던 장부들을 발로 툭툭 차서 건너편 방으로 밀어 넣었다. 경련하는 임소병과 그의 축 늘어진 손까지 안으로 밀어 넣은 현종은 문을 쾅 닫고 걸쇠를 꼭꼭 걸어 잠갔다.
"......"
"하던 거 계속합시다. 아, 그것까지만 하면 된다고 하셨소?"
…… 이건 안 본 걸로 하자. 총관은 조금 전의 광경을 뇌리에서 조용히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