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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68화 (1,469/1,567)

1468화. 역사 한번 만들어 보죠. (3)

"원주님!"

너른 마당으로 뛰어 들어온 이가 황색 가사 차림의 중 앞에 시립했다.

“등용문이 합류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으음. 등용문이……"

법계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등용문은 호북에서 이름깨나 있는 중소 문파다.

합류해 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태천파(泰天派)도 저희를 따르겠다고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이번에는 법계의 반응이 조금 달랐다. 조금 더 상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천파가?”

“예. 그러합니다. 원주님."

법계가 작게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꽤 고무적인 소식이다. 그도 그럴 게, 태천파는 저 북경 너머에 있다. 천하의 모든 곳이 불타지 않는 이상, 사패련의 위협에는 노출되지 않을 만한 문파다.

그런 문파까지 합류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아직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우르르 이곳으로 몰려올 게 분명하다.

“사흘 동안 합류 의사를 밝혀 온 곳이 무려 스무 곳에 달합니다."

예측했던 것보다도 더 빠른 속도였다. 그리고 이는 법정의 지시가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더없이 확연한 증거였다.

"다만 이들이 생각보다 빠르게 합류를 요청하고 있어서, 그 인원을 수용할 공간을 수배하는 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으음, 그렇겠지. 앞으로 더 몰려들 것을 감안한다면, 임시방편으로 적당히 대처할 만한 일이 아니로구나.”

잠시 고민하던 법계가 보고한 이를 향해 말했다.

“알겠다. 그 문제는 내가 방장과 상의해 볼 테니, 새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지체 말고 보고하거라."

"예, 호법님."

"이상입니다."

잠시 후, 법계의 보고가 끝났지만 법정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입을 연 건 팽가의 가주인 팽엽이었다.

"좋은 소식입니다."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방장의 혜안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으음."

드문 팽엽의 칭찬에는 법정도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윽고 입을 열어 겸양의 말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천우맹쪽 상황은 어떠하더냐?"

“그건 아직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사흘간 스물이라고?"

"예, 방장."

법정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모자라군."

"......"

“적어도 서른은 되었어야 할 터인데."

그러자 법계가 굳이 묻지도 않은 말을 읊어 댔다.

“첫날보다 둘째 날 더 많은 문파가 의사를 밝혀 왔고, 오늘은 그보다 더 많은 문파로부터 연통이 왔습니다. 남은 구파일방도 곧 연통을 보내올 것이 확실합니다.”

법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어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건 그저 당연한 일일 뿐이다."

"……방장."

"하지만 이건 당연한 것 이상의 성과를 냈어야 하는 일이지."

그 말에 살짝 떴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법계와 다른 두 문파의 문주들은 법정의 눈치를 살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더는 수가 없을 거라 여겼거늘…… 설마 성도라니. 하여간 그들은 생각대로 움직여

주는 경우가 없습니다."

법정이 담담히 말했다. 종리형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방장. 천우맹이 성도로 쳐들어간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공적처럼 보인다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이건 제대로 된 실속은 하나도 없는 일입니다. 한데 어찌……”

"아미타불."

법정이 종리형의 말을 끊어 내듯, 눈을 감고 불호를 외었다.

“때로는 그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한 것이 중요한 때도 있소이다."

"......"

“특히나 이럴 때는 말이지요.”

종리형이 입을 다물었다. 얼핏 담담하게 들리는 법정의 말속에 묘한 불편함이 실려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뭐지?'

잠시 의아해하던 종리형은 이내 얼굴을 굳혔다.

별다른 실속은 없지만 겉으로는 큰 목소리를 내던 게 누구였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방장…… 저, 저는 그럴 의도로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

“아닙니다. 장문인 저 역시 그럴 의도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아……”

"크흠."

법계가 어색한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법정이 다음 꺼낼 말이 궁해지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눈치 좋게 보인 반응이었다.

그런 법계에게 슬쩍 눈으로 감사를 표한 법정이 말을 이어 갔다.

“어쨌든 천우맹이 벌인 예상치 못한 일 때문에 변수가 생기기는 했지만, 결국 일은 저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팽엽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무엇보다 사패련이 호북의 턱 밑에 비수를 들이밀듯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가능성과 미래를 중점으로 보고 승부를 거는 건 당장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선택지다.

그런데 지금 천하의 문파들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사패련이 그 여유를 빼앗았고, 빠른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얼핏 구파일방이 주변을 흡수해 집결할 수 있도록 사패련이 도와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파 놈들도 도움이 될 때가 있군요."

팽엽의 말에 법정은 굳이 말을 내어놓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나직이 불호를 욀 뿐이었다.

팽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다만, 위치가 조금 거슬리기는 합니다. 하필이면 장가계라니."

"음? 팽가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동 장문인 종리형이 물었다. 팽엽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장가계가 호북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인 건 맞지만, 섬서를 위협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그건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종리형의 말에 팽엽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 말은, 호북에서 벌어지는 일이 섬서에서도 똑같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아……? 아!”

팽엽의 말을 이해한 종리형이 탄성을 흘렸다.

지금 가장 먼저 합류의 의사를 밝힌 곳은 이 호북의 문파였다. 원래는 무당의 영향 아래 있던 곳. 당장 사패련이 쳐들어올 판이니 다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거꾸로 생각해 보면, 사패련의 위치 때문에 섬서의 문파들 역시 화산 아래 집결할 수도 있다.

“냇가에 떨어진 바위 하나가 물살을 반으로 갈라 버리는 것 같습니다. 방장께서는 저 마귀의 의도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법계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장일소의 입장에서는 구파와 천우맹이 균형을 이뤄 주길 원할 것이다. 만일 한쪽이 급격하게 몰락한다면 남은 쪽이 흡수해 세력이 일통되어 버릴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사패련에 승산은 없다.

세상을 주도하는 세 세력이 뜻하는 바가 모두 다르다. 그러니 서로 움직이는 것도 다를 것이다. 그 어지러운 흐름 속에 옳은 길을 찾아낸다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법정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은 뒤틀고자 하지만, 물은 그저 흐를 뿐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법정의 입에서 탈속한 고승 같은 청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물이란, 때로는 크게 휘고, 또 때로는 거칠게 쏟아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가야 할 길로 가지요. 천우맹이 저항하는 패군이 수작을 부리든 이미 흐름은 정해져 있습니다.”

반개한 법정의 두 눈은 앞에 앉은 사람들이 아닌, 먼 곳을 응시했다.

“잠시 그 이름을 떨친다고 해도 천우맹은 이미 빛을 잃었습니다. 앞으로는 점점 더 잃어 가겠지요. 그럼 남은 것은 그저 구파일방뿐.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게 순리고, 그게 흐름이지요."

단언이자 선언이었다. 종리형도 팽엽도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 두 사람이 보기에도 상황은 이미 구파일방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

고작 섬서다. 설령 장일소의 이번 수로 천우맹이 섬서를 완전히 손에 넣게 된다고 해도, 그저 섬서일 뿐이다.

섬서는 거대하지만 천하라는 두 글자 옆에 놓으면 너무도 작다. 강북 전체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구파일방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이번 천우맹의 한 수는 몰락을 잠시 늦춘 것일 뿐, 극적인 반전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테다.

그때 법계가 입을 뗐다.

“방장께서 말씀하신 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건 저 역시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려가 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무엇이 말이더냐?”

“저 천우맹에는 화산검협이 있지 않습니까?"

화산검협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법정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제 천우맹이라는 말은 그에게 딱히 감흥을 주지 못하지만, 화산검협이라는 별호는 여전히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그 역시 흐름을 알고 있을 터, 상황이 그리 흐르도록 좌시하겠습니까?"

"하면 어쩌겠는가?"

"......예?"

"그래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냐는 말이네."

“저야..….”

법정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만약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면 무언가를 할 수 있겠지. 그들이 단독으로 사패련을 노릴 힘이 있다면 무언가 시도해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 저들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그저 제 주변이나 점검하고 함께 싸워 달라고 외치는 정도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는 대단한 자지. 하지만 이건 그가 아니라 천하의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네. 이해하겠는가? 그 대단한 공명도 결국 제 나라를 이기게 만들지 못했고, 군신이라는 악의도 혼자서는 한 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했네."

법정이 담담히 말을 끝냈다.

"흐름이란 그런 것이네. 사람의 힘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지."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법정이 가만히 불호를 외었다.

오래 살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나서서 바꾸는 것보다 그저 때를 기다리는 게 나을 때가 있단 것이 그중 하나다.

그렇기에 법정은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장일소라는 걸물과 청명이라는 괴물이 제멋대로 날뛰는 동안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거친 흐름은 지금 다름 아닌 법정과 소림, 구파일방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화산검협 역시 이미 알고 있을 걸세.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법정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했다.

"보고 싶군. 활달한 겉모습으로 위장하는 그가 지금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말이네."

***

청명은 줄곧 먼 산을 보았다. 백천은 그런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저 녀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는 알고 있다. 늘 몰아붙이듯 지시를 내리는 청명이 때때로 모두에게서 시선을 돌린다는 사실을. 다른 곳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백천은 알고 있다. 등을 돌린 청명이 얼마나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우려하고 있는지.

하지만 그는 이럴 때는 청명을 도울 수 없다.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후우.”

무겁게 한숨을 내쉰 백천이 청명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청명아."

청명이 움찔하더니 백천을 돌아보았다.

“아, 놀래라.”

백천이 바로 등 뒤까지 오도록 눈치채지 못하다니, 얼마나 고민에 잠겨 있었단 뜻이겠는가.

“여긴 끝났다. 다른 곳을 도우면 되겠느냐?"

“벌써 끝났어?"

“우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우린 화산이다."

“아, 그렇지. 땅 파는 데는 이제 이골이……”

"이놈의 봉우리 언젠가는 죄 무너뜨려 버리겠단 생각만 적어도 십 년씩 한 놈들이다. 산 부수는 건 중원에서 제일 잘할 자신이 있다."

......그거 설득력이 있네.

그때 백천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고민이 깊은 건 안다."

"응?"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네가 내린 결정은 완벽하게 수행해 줄 테니 부담 없이 말해라."

백천의 시선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 단단하고 굳건한 시선에 청명이 살짝 멍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사숙......”

이내 청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 말해 줘서 고마워. 안 그래도 고민했는데."

“그래. 네 마음 다 안다."

백천은 그런 청명의 어깨를 두드려 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

"아무래도 여기까지면 좀 부족하지."

"응?"

백천이 움찔했다. 청명이 손을 뻗어 저 앞쪽을 가리켰다.

“여기는 좀 더 까야 할 것 같거든? 괜히 일만 하고 안 쓰게 될까 봐 고민 중이었어. 그런데 사숙이 그렇게 말해 주면 고민할 필요가 없지. 일단 까 놓고 생각하면 되지 뭐."

"......네?"

“저 앞에 제일 높은 봉우리 보이지? 거기까지만 더 까자."

“저, 저기면 지금까지 한 거리의 두 배는 넘는데요?"

“산 까는 건 제일 자신 있다며?"

......그 순간 백천은 느꼈다.

사패련을 상대할 때도, 마교를 상대할 때도 느껴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살기가 등을 찔러 오는 것을.

사형제들이 지금 어떤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을지 알 것 같다. 고개를 돌리면 안 된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마비로 죽게 될 것이다.

“그럼 잘 부탁해. 내일까진 끝내 줘."

"어, 청명아, 어…… 잠깐. 야, 야, 이 새끼야! 야!"

백천을 두고 홀가분하게 걸어 나온 청명은 그새 드넓어진 땅들을 훑어보았다.

"흐으으으음.”

방장이 천하에 방을 붙이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천우맹이 상계를 통해 퍼뜨리고 있는 소식이 생각보다 빨리 퍼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안다.

여기까지만 보면 분명 이번 일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본 게 천우맹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장일소와 법정이 마음먹고 천우맹을 궁지로 밀어 넣으면 아무리 청명이라 해도 도리가 없다.

하지만.

“글쎄, 다들 머리는 열심히 굴리는 것 같지만.….."

청명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부터 내가 뭔가 할 거라 생각했으면 이미 늦은 거지."

일은 이미 벌여 뒀다. 한참 전부터. 이제는 그가 뿌려 놓은 씨앗이 맺은 열매를 회수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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