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466화 (1,467/1,567)

1466화. 역사 한번 만들어 보죠. (1)

화음에 들어선 수레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에이! 아침까지 도착하라니까! 더럽게 느리네!”

“도, 도장께서 짐이 상하지 않게 속도를 조절하라고 하시지 않았소!”

청명이 하는 말이라면 물로 고기를 튀기라고 해도 일단 한 번은 생각해 보는 남궁도위조차 참지 못하고 항변했다. 하지만 그 저항에 돌아온 대답은 남궁도위를 먼 곳으로 보내기에 충분했다.

“쯧쯧. 하나를 시키면 하나밖에 못 하니까 문제다, 문제야. 알아서 짐도 안 상하게 하면서 제시간에 도착했어야지!”

“…….”

“무능해 빠져서는!”

“어억…….”

얼이 빠져 있는 남궁도위의 어깨를 조걸이 가만히 다독여 주었다.“이젠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걸요?”

“익숙해집니다, 곧.”

조걸이 남궁도위를 위로하는 동안 청명이 짐수레 위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화음의 상황을 찬찬히 살폈다.

“흐음. 영…….”

못마땅하고 뾰로통한 시선에 움찔한 황종의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우, 우선 무사히 귀환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도장.”

“네네. 상단주님도 잘 지내셨어요?”

“예! 도장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하기야 후방에서 짐이나 가끔 보내 가면서 놀았는데, 잘 지내지 못할 것도 없죠. 아, 부럽다.”

반가움으로 넘실거리던 황종의의 얼굴이 순간 와그작 일그러졌다. 저게 후방에서 시킨 일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지냈던 이에게 할 말이란 말인가?

“저희도 나름 바빴…….”

“그런 것치고는 얼굴색이 너무 좋으신데? 뭐 좋은 것 좀 드시나 보네요?”

……기억났다. 이 양반, 원래 이런 인간이었지. 한동안 못 보다 보니 머릿속에서 자체적으로 미화 과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아, 각설하고. 지금 한창 바쁘실 텐데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아, 그렇잖아도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이분들을 서안에 수용하는 문제를 태상장문인과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네?”

“아무래도 화음은 기반 시설이 부족하다 보니 이분들을 모시기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무인 분들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아시다시피 이곳에는 당가 분들도…….”

“서안?”

“예, 서안…….”

“서아아아아아아안?”

황종의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저 망할 도사 놈이 흰자위를 번들거리는 걸 보니 그가 또 뭔가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자주 보던 광경이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감회가 또 새롭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요! 내가 저 양반들 편하게 모실 생각이었으면 진작 서안으로 갔지, 여기로 보냈겠어요?”

“그, 그건 그런데…….”

“그렇게 되면 서안 사람들만 좋은 건데, 왜 내가 내 돈 들여서 남 좋은 일을 시켜요!”

“이, 일단 서안 사람들은 남이 아니고…….”

아니,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는 돈도 네 돈이 아닙니다, 도사님. 조금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개념을 좀 잘 잡으시는 게…….

“기반 시설이 없다고?”

“그,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럼 만들면 되지!”

순간적으로 황종의의 얼굴에서 영혼이 빠져나갔다.

“그게 말처럼 되는 일이…….”

“아아. 다 돼요, 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만들려고 하면 금방 만들어요!”

황종의가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곁에서 안쓰럽게 지켜보던 현종이 따뜻한 손길로 황종의의 어깨를 감쌌다.

“이해하셨소?”

……어쩐지 이 양반이 더 얄미웠다. 한숨을 푹 내쉰 황종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알겠습니다. 확실히 도장의 말대로 이곳에 이분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저들을 먹여 살릴 물류를 확보한다면 화음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곳이 되겠죠.”

물론 섬서 최대의 도시인 서안에야 미칠 수야 있겠냐마는, 섬서의 유력 도시 중 하나로는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장. 현실적으로 그 모든 일을 할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인부라는 건 돈만 준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 거참 아까부터 답답한 소리만 하시네?”

“……예?”

“인부가 부족하긴 왜 부족해요? 저기 남아도는 게 인부인데.”

“……어?”

“당가주님!”

“알겠네.”

뒤쪽에서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당군악이 앞으로 나섰다.

“지도.”

“예? 아! 지, 지도! 예! 당장 지도를 가져오너라! 어서!”

황종의가 외치자 상단원 몇이 부리나케 달려가 돌돌 만 지도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지도를 쫙 펼쳤다. 화산을 중심으로 한 화음의 지형도가 세세히 담겨 있었다.

“흠.”

화음의 지형을 꼼꼼하게 확인한 당군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게 어느 정도인가, 총사?”

“뭐, 일단…….”

청명이 코끝을 살짝 긁적였다.

“지금 있는 이들이야 당연히 수용해야 하고.”

“음.”

“거기에 추가로 올 인원들과 합류하겠다는 중소 문파들도 수용할 만한 곳이 있어야죠.”

“음, 확실히 그 정도는…….”

“거기에 애들 수련시킬 연무장, 무기를 보관할 무기고, 곡식들이나 생필품을 넣을 창고…….”

“…….”

“아! 당가 사람들 살 집도 있어야 하고, 그 와중에 산 위에 있는 화산 놈들이 내려와 거할 곳도 만들어야 하고, 새로 온 상단 사람들이나 물류 때문에 오가는 이들이 쉴 수 있는 숙소도 만들어야 하니까…….”

청명이 떠들수록 황종의의 낯빛은 점점 더 새하얗게 질려 갔다. 이쯤이면 거의 도시 하나를 새로 만들겠다는 게 아닌가?

“그것만 하면 되는가?”

“에이, 무슨 소리세요. 이제 시작이죠.”

“……음?”

“사람이 그만큼 많으면 당연히 물도 필요하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우물도 새로 열댓 개는 만들어야 할 거예요. 아, 적당한 대로도 하나 만들어서 포장도 해야겠네요. 뭐, 그 외에도 자잘하게 할 일이 많을 거예요.”

당군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이해했네. 하지만 그러자면 문제가 조금 있네.”

“뭐가요?”

“보다시피 화음은 등 뒤에 화산을 두고 있네, 그러니 도시가 앞으로 뻗어 갈 수밖에 없지.”

“그렇죠.”

“그런데 화산의 지형 때문인지 앞쪽도 전체적으로 작은 구릉들이 많네. 이대로 전각을 지으면 도시 자체가 구불구불해지게 되네. 방어에는 이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도시가 뻗는 데는 한계가 되지.”

황종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지금까지 화음이 큰 도시가 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도시라는 건 단순히 좋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커지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그곳에 거하는 이들이 편히 집을 짓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화산이라는 험준한 산 아래에 있는 화음은 그 지형 때문에라도 결코 큰 도시가 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반쪽짜리 도시가 될 수밖에 없을 걸세. 자네가 그걸 감수하겠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말이네.”

그 말을 들은 청명이 흐뭇하게 웃었다.

“에이. 쉽게 말씀을 드렸는데도 아직 이해를 못 하시네요.”

“응?”

“애초에 평지라는 게 뭔데요? 굴곡이 없는 땅을 말하는 거잖아요.”

“그렇지. 이곳에는 그런 평지가…….”

“그럼 만들면 되죠.”

내내 담담하고 냉정하던 당군악이 처음으로 눈썹을 움찔 떨었다.

“이걸……?”

“네.”

“이걸…… 다?”

“네!”

당군악도 할 말을 잃자 청명이 더욱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가주님. 상황에 맞춰 완벽하게 일을 하면 성과가 되죠?”

“……그렇지.”

“하지만 상황을 뛰어넘어 완벽 이상으로 일을 하면 역사가 되는 겁니다.”

“…….”

“어디…….”

청명이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화음에 울퉁불퉁 솟은 수많은 작은 산들이 보였다.

“이 기회에 역사 한번 만들어 보죠.”

“…….”

“자, 자! 바빠요. 움직이자고요! 어서!”

당군악의 입에서 혼백이 빠져나갔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

“깐다.”

양손에 농기구를 든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얼빠진 얼굴로 청명이 가리킨 지도만 보았다.‘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는 거지?’

‘섬서는 지도 읽는 법이 안휘랑 다른가?’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분명히 그럴 리는 없었다. 아무리 중원이 땅덩어리가 넓어 지역마다 사는 법이 다르다지만 지도 읽는 법이야 어디든 대동소이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이 의문을 가지는 이유는 하나였다.

“저, 저기, 화산검협?”

“왜?”

“그…… 말씀하신 대로라면, 그게 이 앞의 산들을 까서 평평하게 만들라는 거잖습니까?”

“응. 잘 알아들었네.”

“그,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알겠는데, 그 여기까지가 어디인지 잘…….”

청명이 얼굴을 구기며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아니, 뻔히 여기 그려져 있잖아. 이게 뭐냐, 이게?”

“그…… 강이요?”

“아니. 저 굵기면 냇물이지.”

“어쨌든 흐르는 물이잖아.”

“그래! 냇물. 저기 있잖아! 저기!”

저들끼리 웅성거리던 남궁세가 무인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어디……?”

“아오! 진짜 다들 눈 삐었어? 저기 있잖아. 저기 산 사이에!”

언덕이라 부르기에는 크고,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민망한 구릉이 수없이 중첩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너무 멀어서 아주 희미해 보이는 물줄기가 보였다.

흰 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냇가를 보며 모두가 조용히 웃었다.

‘아니겠지.’

‘아니지.’

‘아니어야지. 절대 아니어야 해!’

그럼에도 물을 엄두는 나지 않는다. 괜히 입을 떼는 순간 운명이 결정 나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사람이 많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그 사이에 꼭 눈치 없는 이가 하나 정도는 끼어 있기 마련이다.

“호, 혹시 말씀하신 냇가라는 게, 저기 저겁니까?”

“저 개새…….”

남궁세가 무인들이 기겁하며 말을 한 이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그러나 늦었다. 이미 그 말을 들어 버린 청명이 감탄했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크으, 역시 남궁세가쯤 되니까 척하면 착이구만. 너희 답답한 소가주보다는 너희들이 훨씬 낫다.”

“…….”

“맞아. 거기까지만 까면 돼. 쉽지? 다 끝나면 좀 쉬고.”

“……쉬어요?”

저걸 다 까고 쉬라고요?

“저, 저기 화산검…….”

“아, 참고로 문파마다 내가 적당히 땅을 배분해 놨거든?”

“예?”

이게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그런데 그러고 나니까 이만한 덩어리가 하나 남더라고? 끄응. 늙으면 죽어야지.”

“…….”

“그래서 말인데.”

순간 청명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지옥의 마귀나 지을 법한 웃음이었다.

“제일 늦게 일 끝내는 문파가 그거도 마저 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쉬엄쉬엄해.”

그 순간 남궁세가 무인들의 시선이 격하게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콰쾅!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화산 놈들과 북해 놈들이 맹렬히 산을 부수고 있는 꼴을 말이다. 모두가 하나같이 눈이 돌아 있었다.

남궁세가 무인들의 발등에 불이 붙었다.

“시, 시작해!”

“움직여, 이 새끼들아!”

“아니, 그런데 문파마다 사람 수가 다르잖아! 이건 불공평…….”

“불공평이고 나발이고 일단 삽 들라고, 이 새끼야!”

“으아아악! 꼴찌만은 안 된다!”

어차피 저 인간에게 말 같은 게 통할 리가 없다.

남궁세가 검수들은 악을 쓰며 앞에 솟은 작은 산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청명이 흐뭇하게 웃었다.

“다들 참 의욕적으로 말을 잘 듣는단 말이야.”

착하기도 해라. 낄낄낄낄!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