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3화. 우리가 본대인데요? (3)
“이⋯⋯.”
천우맹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성도. 소식을 듣고 뒤늦게 달려온 일보일살(一步一殺) 석홍(昔鴻)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 멍청한⋯⋯.”
손끝이 절로 덜덜 떨려 왔다.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 따위는 문제도 아니다. 저런 잡것들은 언제든 충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손에 넣은 성도가 천우맹의 손에 처참하게 유린당했다는 것이다.
“대, 대주님!”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만인방의 생존자들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일보일살 석홍의 두 눈에 살기가 피어났다.
“놈들은 어디에 있느냐?”
“이, 이미 한참 전에⋯⋯.”
“추격은?”
수하들이 대답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석홍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추격대도 꾸리지 않았다는 말이냐? 너희는 대체 뭘 했느냐!”
“추격이⋯⋯ 무의미했습니다. 화, 화산검협 청명을 비롯한 천우맹 소속 문파의 문주들이다 보니 추격한다 한들⋯⋯.”
“이⋯⋯.”
석홍이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뿌드득 새어 나왔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진 이들이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처박았다.
“그래서? 추격도 포기하고,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쥐새끼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는 것이냐? 만인방의 문도라는 것들이?”
“불⋯가항력으로⋯⋯.”
“불가항력?”
“그래도 재물을 많이 잃지는 않았습니다. 놈들의 수가 적다 보니⋯⋯.”
“뭐라 했느냐?”
“⋯⋯예?”
석홍이 굳은 얼굴로 말을 한 이를 노려보았다.
“지금 저들이 성도의 재물마저 털어 갔다는 것이냐?”
“그, 그게⋯⋯.”
“사해상회는? 사해상회 놈들은 어찌 되었느냐? 분명 단주께서 놈들을 철저히 감시하라 하셨다!”
앞에 선 이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대답해라. 사해상회 놈들은 어찌 되었느냐?”
“처, 천우맹 놈들이⋯⋯.”
“뭐?”
“천우맹 놈들이 모두 데려갔⋯⋯.”
파아아앗!
섬전처럼 뻗어 나온 도기가 사람의 몸을 꿰뚫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두 동강이 나 쓰러진 이들의 몸에선 피가 분수처럼 후드득 뿜어져 나왔다.
으드드득.
석홍이 부러지도록 이를 갈아붙였다. 두 눈에 붉은 핏발이 돋아났다.
“이⋯⋯ 개 같은 천우맹 놈들! 으아아아아아!”
분노한 그의 고함이 성도의 거리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 ❀
임시로 마련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호화로운 천막 안.
호피를 씌운 커다란 의자 위의 장일소를 호가명이 응시했다. 두 눈을 감은 장일소의 얼굴은 분명 굳어 있었다. 호가명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미미한 변화가 아니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확연했다.
장일소가 저런 표정을 타인 앞에 내보이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련주님.”
호가명이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우선 동원할 수 있는 이들을 최대한 동원해 성도로 보냈으니 곧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우려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호가명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꽤 우습다고 생각했다. 병력을 모아 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놈들은 호가명이 보낸 증원이 도착하기도 전에 성도를 한껏 유린하고 발을 빼 버릴 게 분명하다.
‘빌어먹을.’
장일소도 호가명도 결코 아둔하지 않다. 공백이 생긴 성도를 적들이 노려 올 가능성을 진즉에 고려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적의 공격이 아니라 공격해 온 이들의 구성원이다. 저 말도 안 되는 소수정예는 천하의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천우맹.’
누군가는 딱히 대단하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저들이 성도를 다시 점령한 것도 아니고,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집에 난입하여 물건이나 깨부순 정도에 불과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호가명은 그리 여기지 않았다.
저들이 성도를 할퀴며 사패련에 새겨 넣은 상흔은 생각 이상으로 크고 치명적이었다.
사패련이 사천을 손에 넣는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사천을 손에 넣는다고 사패련이 더 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패련이 당장 사천의 물자가 필요한 만큼 궁핍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이 천하에 경종을 울리는 이유는 사패련의 힘이 사천을 짓밟고 손에 넣을 만큼 강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실질적인 힘보다 보이는 모습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사패련은 사천을 손에 넣음으로써 아미와 청성, 그리고 점창을 무너뜨린 것 이상의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하지만 지금 천우맹이 둔 수로 인해 공들여 쌓아 올린 탑의 일부가 처참하게 무너진 것이다.
놈들이 성도에서 날뛰는 것을 본 이들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패련이 사천을 짓밟을 힘은 있어도, 그곳을 지킬 힘은 없다고.
“후우.”
호가명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련주님. 정 걱정되신다면 제가 병력을 이끌고 성도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그 순간 장일소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호가명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내보인 장일소의 눈빛은 오랜 세월 함께해 온 그조차 움츠러들 만큼 차가웠다.
“잃은 건 잃은 것이다. 뒈진 사람 붙들고 곡을 해 봐야,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
호가명 역시 그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흐음.”
장일소의 입에서 짧은 비음이 흘러나온다. 언제나처럼 달뜬 비음이 아니라, 듣는 이를 갑갑하게 만드는 무거운 비음이.
“너도 감이 무뎌졌구나, 가명아.”
“⋯⋯예?”
“성도를 공격당하며 잃은 것은 네 생각보다 더 많을 것이다. 구파도 천우맹도 이 사건을 계기로 나름의 할 말이 생겼지. 그리고 놈들은 그 사실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놈들이란다. 한 모금의 물이 뭐 그리 대단하겠냐마는, 그 물을 얻은 이가 말라 죽어 가는 이였다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야.”
호가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장일소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련주님. 우리가⋯⋯.”
“하지만!”
그 순간 장일소의 입에서 강하고 단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절로 등골이 오싹할 만큼 한기 서린 목소리였다.
“잃었다면 다시 찾으면 그만이다.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정말 중요한 건 따로 있지.”
호가명의 두 눈의 의문으로 물들었다. 장일소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뭐가 달라졌을까?”
새하얀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말이지. 예전의 놈들이었다면 절대 성도로 오지 못했을 것이다. 오더라도 있는 놈들, 없는 놈들을 다 끌고 와 눈물이나 줄줄 흘려 댔겠지.”
“⋯⋯.”
“그런데 뭐가 달라졌기에 이런 수를 쓸 수 있는 거지? 내가 천우맹이라는 놈들을 잘못 이해한 건가?”
호가명은 그제야 장일소가 한 말을 이해했다.
너무도 기본적인 것이다.
실패는 뼈아프다. 그 실패를 수습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실패와 손해 따위는 사소한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원인.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파악해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놈들이 당가의 성도를 예상 이상으로 중요히 여긴 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당가의 전각에 미처 알지 못한 것이 숨겨져 있었거나⋯⋯.”
장일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의 장일소는 호가명의 말이 제 생각과 어긋나면 핀잔을 주거나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지금의 장일소는 호가명의 말조차 차갑게 짓밟고 있다.
그건 지금 장일소가 품은 생각과 느끼는 것들이 호가명의 예상 이상으로 거대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이득. 권한. 계략. 성향.”
“⋯⋯.”
“그딴 것들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일까?”
장일소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가명아.”
“예, 련주님.”
“처음이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쇠를 긁어 대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장일소의 입을 뚫고 흘러나왔다.
“누군가가⋯⋯ 내 머리 꼭대기에서 논다는 기분을 느껴 보는 게 말이다.”
“⋯⋯.”
“위장이 뒤틀린다는 건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거군.”
장일소의 얼굴에서 진득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호가명은 도무지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패련은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성도를 공격당한 게 뼈아프다고는 해도, 이 전쟁의 승리자가 사패련이며 장일소임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장일소를 저주할 것이며, 또 칭송할 것이다.
그런데 장일소는 어째서 그 거대한 승리가 아닌 사소한 실수에 목을 매는 것인가?
“하핫.”
으드드득.
그 순간, 장일소가 잡고 있던 의자 팔걸이가 으스러졌다. 동시에 의자를 덮고 있던 호피도 찢겨 휘날렸다.
“참기가 힘들구나, 가명아. 그놈이 나를 이겼다는 사실을 두고 웃어 댈 모습을 생각하니 뱃속을 칼로 할퀴는 것만 같아.”
“련주님⋯⋯.”
뿌드득. 장일소의 꽉 깨문 입술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붉은 입술이 더 검붉게 물드는 순간, 장일소의 기름한 두 눈이 일그러졌다.
“화산검협⋯⋯.”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를 비웃는 화산검협의 얼굴이. 그 조롱 어린 눈빛이.
“화산검협.”
증오 서린 목소리가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 ❀ ❀
“흐흐흐.”
“⋯⋯.”
“흐흐흐흐흐흐.”
“⋯⋯.”
“으히히히히히히히힛!”
수레를 끌던 이들은 영혼 빠진 얼굴로 수레 위에 올라탄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으히히히히힛! 반짝인다! 반짝여! 으헤헤헤헷! 반짝반짝!”
그들과 함께 조심스레 걷던 사해상회 대공자 조웅이 조심스레 동생을 향해 물었다.
“그⋯⋯ 미안하다만, 걸아. 내가 듣긴 들었는데,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묻는 건데⋯⋯ 그러니까 저 사람이?”
“⋯⋯맞다고요.”
“아니⋯⋯.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그게⋯⋯.”
“아니, 그러니까 맞다니까요! 저 인간이⋯⋯ 그 화산 제일고수고.”
그러자 조걸의 곁에 있던 오검이 힘없이 입을 열어 거들었다.
“제일후기지수고.”
“천우맹의 총사고.”
“사패련이 제일 껄끄러워한다는 그⋯⋯.”
조웅의 시선이 다시 돌아갔다. 번쩍이는 재물 꼭대기에 올라앉은 청명은 이제 아예 손에 쥔 금붙이들을 머리 위로 흩뿌리고 있었다.
“으헤헤헤헤헤헷! 돈이다! 돈! 돈이다아아아아아! 이게 웬 떡이냐!”
⋯⋯조웅의 손이 살짝 떨렸다. 저게? 저 인간⋯⋯. 아니, 인간이라고 하기도 살짝 떨떠름한 저 무언가가?
“그 혹시⋯⋯.”
“도사 맞아요.”
“⋯⋯그럼 혹시⋯⋯.”
“네. 원래 그래요. 어디 다치거나 주화입마 온 것도 아니고.”
조웅은 할 말을 잃었다. 심지어 오검은 슬쩍 청명을 올려다보더니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래도 상태가 괜찮은 편이네.”
“말은 안 해도 성도에서 한바탕 휘젓더니 편해진 모양입니다. 조바심 나고 성질 뻗쳤을 때 저만한 돈이 생겼으면 아예 저 안에서 목욕하고 있었을 텐데.”
“그러게.”
조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조걸은 어깨를 으쓱하며 형님에게 말을 건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
“응? 무슨 소리냐?”
조걸이 빙긋 웃었다.
“보기에는 저래도 생각보다 믿을 만한 놈입니다.”
“으헤헤헤헤헤헷!”
“꽤 듬직한 면도 있고, 생각보다 진중하죠.”
“흐하하하하하하하핫!”
“저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충분히 등을 맡겨도 될 만한 사람이니 형님도 눈여겨보십시오.”
“돈이다! 돈! 꽁돈이다아아아아!”
“⋯⋯.”
방긋 웃는 조걸과 발광하는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웅의 눈에는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걸아⋯⋯.”
너는 그동안 대체 어떤 싸움을⋯⋯.동생을 화산에 보낸 것을 처음으로 후회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