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2화. 우리가 본대인데요? (2)
“저, 저건⋯⋯.”
바깥의 소란에도 차마 고개를 내밀지 못하고 숨죽이던 이들.
정파의 하늘에서, 사파의 하늘로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린 세상을 그저 받아들이고 감내할 수밖에 없던 이들이 하나같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심하도록 푸르러 원망할 수밖에 없던 하늘에 붉은 매화가 피어 있다. 성도의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을 만큼 거대하게.
불과 몇 해 전이었다면 그저 놀라기만 했을 광경이지만 이제는 성도의 모두가 알고 있다. 아니, 천하가 알고 있다.
붉은 매화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저 매화를 피워 내는 이들이 누구인지 말이다.
“화, 화산이다!”
“화산파⋯⋯!”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 피었던 매화가 성도의 땅을 향해 흩날리며 쏘아졌다.
콰앙! 콰아아앙!
마치 축포와 같은 폭음이 널리 퍼져 나갔다. 성도 주민들의 눈에 잠시나마 벅찬 희망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 희망은 이내 현실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 빠르게 스러졌다.
그들 역시 아는 것이다. 성도는 이미 사패련이 점령한 땅이고, 그리 쉽게 과거를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화산과 천우맹에게 손쉽게 사패련을 이길 힘이 있었다면, 이곳이 사패련의 수중에 떨어졌을 리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이 광경이 주는 의미는 대단했다.
“나, 나가 봐야겠습니다!”
“야, 이놈아! 어딜 나가느냐! 화산이 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게 있겠느냐? 괜히 목만 달아난다!”
“그래도 눈으로 봐야 할 것 아닙니까!”
말리는 이들을 뿌리친 어떤 이가 격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이윽고,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검은 무복을 입고 길게 자라난 머리를 뒤로 높이 질끈 묶었다. 녹빛 머리 끈과 그 가슴에 새겨진 매화 문양까지.
문을 열고도 넋 놓고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보던 사내는 앓듯이 중얼거렸다.
“화산검⋯⋯협.”
타악!
청명이 땅에 내려섰다. 동시에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몸을 띄워 올려 매화를 피워 내고 다시 땅에 내려서기까지는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하지만 주변 광경은 그사이 많이 달라졌다.
사패련과 만인방이 두려워 궁금증을 억누르며 집 안에서 숨죽이던 이들이 어느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또는 높은 담벼락 위로. 차마 몸은 내밀지 못해도 그 시선만은 확연히 청명에게 향해 있었다.
수많은 감정을 실은 눈빛이 쏟아진다.
청명은 알고 있다. 때때로 감사나 선망의 눈빛이 쏟아지긴 하지만, 대부분은 원망을 실은 채 보고 있다는 것을. 태반은 의무를 다하지 못한 청명을 질책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청명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 했다. 누군가가 앞을 막아서며 청명 대신 입을 열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당 가주님?”
“사정상, 지금 모두를 데리고 갈 수는 없소.”
당군악이 전면에 선 순간, 사람들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하나 내 이름⋯⋯. 아니, 천우맹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오. 우리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오. 그때 우리의 잘못을 빌겠소. 그러니!”
당군악이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잠시만 참고 버텨 주시오.”
그가 머리를 숙였다. 한바탕 전투가 벌어졌던 성도의 한가운데에서 보이기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성도에는 짧은 고요가 내려앉았다.
“가주님. 내가⋯⋯.”
청명이 나서려는데, 어느새 온 맹소가 어깨를 잡아끌며 만류했다.
“기다리게.”
맹소의 손아귀에 들어간 힘이 상당했다. 청명을 진심으로 말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당군악이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앞을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성도의 모습을 눈에 담은 그는 짧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움직이자는 말을 입에 담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놔 보시오!”
쿵!
닫혀 있던 문 하나가 거칠게 열리더니 한 사내가 안쪽에서 뛰어나왔다.
“안 된다지 않습니까!”
“빌어먹을! 안 되긴 뭘 안 돼!”
거칠게 박차고 나온 이는 단숨에 당군악 앞까지 다가왔다. 모두가 일순 안색을 굳혔다. 달려오는 이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당군악이 평범한 양민에게 당할 리는 없다. 하지만 이토록 많은 이들 앞에서 이 사태에 대한 원망을 얻어맞는다면 그 심정이 어떨지 훤하지 않은가.
“당 가주.”
당황한 맹소가 나서려는 순간, 당군악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손을 살짝 들었다. 나서지 말아 달라는 뜻이었다.
“후욱!”
사내가 살짝 핏발이 선 눈으로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당군악 역시 담담한 눈으로 그런 사내를 마주 보았다.
“상황이 이리되어⋯⋯.”
당군악이 민망함과 미안함을 담아 입을 뗐다. 그런데 사내는 다 듣기도 전에 제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불쑥 내밀었다.
옥으로 빚은 불상. 한눈에 보아도 귀하고 값어치가 나가 보이는 물건이었다.
냉정을 유지하는 데는 누구보다 뛰어난 당군악이지만, 그도 이 순간만큼은 당황했다. 왜 갑자기 옥불상을 내민다는 말인가?
“이건⋯⋯.”
“가져가십시오.”
사내가 급하다는 듯 불상을 흔들며 당군악을 재촉했다.
“팔아치워서 군자금이든 뭐로든 쓰시란 말입니다!”
“아, 아버지. 그건 우리 집 가보입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말에 사내가 뒤를 획 노려보며 역정을 냈다.
“이 멍청한 놈아! 가보면 뭐? 보름만 지나도 저 사파 놈들이 모조리 뺏어 갈 것 아니냐? 어차피 빼앗길 거라면 이 양반들이 쓰는 게 나을 것 아니냐!”
“그, 그런⋯⋯.”
아들의 입을 막아 버린 사내는 다시 당군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집안의 가보입니다. 가져가서 써 주십시오. 대신!”
사내의 이글거리는 두 눈에 간절함이 어렸다.
“꼭 돌아오십시오. 어떻게든 버틸 테니까.”
당군악의 입술이 순간 파르르 떨렸다.
가문이 불탔음에도, 수많은 가솔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단 한 번도 사람들 보는 앞에서는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군악의 냉정한 얼굴이 지금은 명백히 흔들렸다.
그는 살짝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받을 수 없습니다. 화가 될지도 모르니 빨리 돌아가십시오.”
“⋯⋯.”
“누군가는 말을 할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누군가가 사패련에 밀고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말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가주님이 아니십니까?”
당군악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사천당가의 가주라는 분이 성도를 그리 모르십니까?”
“⋯⋯무슨⋯⋯.”
사내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곧 그 의미가 밝혀졌으니까.
“비켜라!”
또 하나의 문이 열리며 한 노인이 달려온 것이다.
“가주님! 여기! 이건 저희 집안에서 가장 귀한 것입니다. 이걸 가져가 주십시오!”
“⋯⋯.”
“여기, 이것도 받아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꼭 돌아와 주십시오. 저희는 어떻게든 버텨 내겠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하나하나 열린다.
문 뒤로, 벽 뒤로, 모습을 감추고 있던 이들이 제 발로 뛰쳐나온다. 그들을 가로막고 있던 현실을 부순 건, 천우맹의 힘이 아니다. 성도를 살아가던 이들의 의지였다.
“가주님, 여기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누군가는 당군악의 손을 움켜잡고 눈물을 쏟았다. 다른 누군가는 누가 볼까 두렵다는 듯 들고 온 것을 내려놓기 무섭게 몸을 돌렸다. 또 누군가는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해 담 너머에서 물건을 던져 전달하기도 했다.
방식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당군악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앞에 쌓여 가는 재물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귀한 재보들이다. 몇 되지 않는 그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가장 작고 귀한 것들이 수두룩하게 모였다.
그는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그러니 침을 뱉고 욕을 한다 해도 감내할 생각이었다.
사천당가가 오래도록 성도의 패자일 수 있었던 건, 이곳에 자리한 이들이 사천당가를 인정하고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들을 지켜 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저 참아 달라는 말만 남겨 둔 채 떠나야 하는 처지다.
그럼에도 이들은 당군악을 욕하지 않는다. 그를 버리지 않는다. 그저 간절함만을 보일 뿐이다.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가주님!”
“당가가 돌아올 날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떻게든 버텨 내겠습니다. 그러니 힘내십시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던 당군악은 결국 다시 그만두었다. 차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형!”
“벌써 가져왔다! 수레 맞지?”
“퍼 담아, 빨리!”
“예입!”
오검은 끌던 수레를 놓고 득달같이 달려와 쌓인 재물들을 새 수레에 실었다.
“그, 그건 그렇게 실으면 안 됩니다! 물건이 상하면⋯⋯. 에잇! 비키십시오!”
사해상회 사람들이 재빠르게 타고 있던 곳에서 내려와 오검을 밀쳐내고 신속한 손길로 재물을 실었다.
“뭐 해요! 안 싣고!”
“나, 나도 말인가?”
“그럼? 궁주님은 손 없어요?”
“지, 지금 가고 있지 않은가.”
맹소가 앓는 소리를 내며 솥뚜껑 같은 손으로 재물들을 한 움큼씩 잡아 실었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보고 웃는 이들은 없었다. 수북하게 쌓였던 재물들은 빠르게 정리되어 수레에 쌓였다.
어딘가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보중하십시오!”
“저희를 잊지 마십시오, 가주님!”
당군악은 작은 틈새로 고개 내민 이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눈에 담았다. 그렇게 말없이 서 있던 당군악이 마지막으로 청명을 돌아보았다. 살짝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총사.”
“옙!”
청명이 앞으로 나서서 크게 외쳤다.
“꼭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드높은 함성이 쏟아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가자!”
청명의 외침과 동시에 여러 대의 수레가 일제히 대로를 달렸다. 후방에서 박살 난 사파의 잔당들을 처리하던 이들도 재빨리 달려와 합류했다.
“가주님, 제가⋯⋯!”
“괜찮네.”
수레를 끌던 당군악이 달려오는 혜연을 말렸다. 이 수레만큼은 그가 직접 끌어야 했다. 그가 당가의 가주라도⋯⋯.
아니, 당가의 가주이기에.
순식간에 달려 나간 수레는 커다란 성도의 성문에 도달했다.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뒤로 돌아갔다.
쏟아지는 이 수많은 시선을 잊지 않겠다는 듯 확인한 이들이 다시 앞을 본다.
“가자.”
수레가 성문을 벗어나 밖을 달렸다.
“청명아.”
“괜찮아.”
백천의 마음을 안다는 듯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어떤 말도 무의미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하면 돼.”
“⋯⋯그래. 네 말이 맞다.”
백천의 시선이 다시금 성도로 향했다. 굳건한 문을 눈에 새겨 넣듯 잠시 곱씹었다. 그의 마음에는 이제 단 하나의 결심만이 확고했다.
‘반드시 돌아온다.’
그리고 그때의 천우맹은 지금까지의 천우맹과 분명 달라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