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1화. 우리가 본대인데요? (1)
“끄응.”
“⋯⋯.”
“끄으으응.”
“⋯⋯.”
“끄으으으으으응.”
“그러다가 숨넘어가시겠습니다.”
운암이 혀를 차며 한 말에 현종이 마침 잘 걸렸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아니, 이놈아! 어쩌자고⋯⋯!”
현종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무섭게 좌우에서 칼날 같은 지적이 날아들었다.
“어허, 장문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보는데!”
장로들이 도끼눈으로 쏘아봤다. 찔끔한 현종이 다시 한번 앓는 소리를 흘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끄응⋯⋯. 어쩌자고 아이들을 성도로 보냈느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그러다 사패련 놈들이 그 아이들을 노리기라도 하면!”
“그야 청명이가 알아서 하겠지요.”
“이, 이런 대책 없는 놈을 다 봤나! 야, 이놈아! 그게 장문인이 할 소리냐?”
운암이 어깨를 으쓱했다.
“뭘 어쩌겠습니까? 그 아이가 저보다 머리가 좋은데, 우둔한 제가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뭐, 뭐라⋯⋯. 어억!”
현종이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뻣뻣해진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아이고. 성질 좀 죽이십시오, 사형!”
“⋯⋯어째 나이가 갈수록 사람이 괴팍해지나 그래. 예전에는 그래도 진중한 맛이라도 있었는데.”
“시끄럽다, 이놈들아!”
현종이 부축하려는 장로들을 밀어 내고는 운암에게 외쳤다.
“장문인의 자리가 그러라고 있는 자리더냐!”
“음, 그렇지요.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그러니 생각을 한번 해 주십시오. 저도 영 불편하고 안 맞는 것 같으니, 섬서에 돌아가는 대로 백천이에게 장문인 자리를 넘겨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이⋯⋯.”
“뭐, 이놈아? 이, 이런⋯⋯. 어억!”
“아이고. 이러다 진짜 등선하신다니까.”
“자자, 천천히 심호흡하십시오. 처언천히.”
현상에게 반쯤 안긴 현종이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쳤다. 그 모습을 본 운암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다 몸 상하십니다.”
“이, 이놈. 내가!”
“장문인께 이놈이라니요!”
“안 되겠군. 사제, 끌고 가세.”
“예, 사형.”
“놔, 놔라! 놔라, 이놈들아! 내가 호랑이 새끼를 장문인 자리에 앉혔구나. 놓지 못하겠느⋯⋯. 네 이노오오옴!”
현상과 현영의 손에 붙들려 질질 끌려가는 현종을 보며 운암이 빙그레 웃었다.
“괜찮겠습니까?”
운검이 슬그머니 물어왔다. 운암은 태연히 답했다.
“청명이 녀석이 결정한 일이니 알아서 하지 않겠느냐?”
“그렇긴 합니다만⋯⋯ 태상장문인께서 저리 걱정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장문인,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닌지⋯⋯.”
“그럼 네가 장문인 하거라.”
운검이 멍하니 운암을 바라보았다.
“싫으냐?”
“아, 아니, 장문인. 그게 무슨⋯⋯.”
“그렇다면 그냥 잠자코 내버려 두거라.”
운검이 영 마뜩잖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운암의 말대로 따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저 단호한 말이 운암답지 않다고 여긴 것인지도 모른다.
그 표정을 본 운암이 빙그레 웃었다.
“운검아.”
“예, 장문인.”
“사실 나는 내가 장문인이 되는 것은 딱히 의미가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도 불필요한 과정이라 여겨서 하루빨리 어울리지 않는 장문인 자리를 벗어던지려 했었지.”
“⋯⋯그러셨습니까?”
“그런데 이제 보니 나는 꼭 장문인이 되어야 했던 사람이로구나.”
“예? 그건 또 무슨 말씀⋯⋯.”
“그렇지 않으냐? 내가 아니라 백천이가 지금 장문인이 되어 있다면 태상장문인도, 너도 사사건건 아이들의 판단에 간섭하려 들지 않았겠느냐?”
운검이 입을 꾹 닫았다. 아니라는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저는 그럴 의도가⋯⋯.”
“의도가 좋다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겠지.”
운검이 결국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운암은 자신을 그리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쉬이 상대하기는 어려운 사람이기도 하다.
어쩌면 운암의 말대로, 지금 화산에 가장 필요한 장문은 바로 운암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더니.”
운암이 고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당부했다.
“괜한 걱정 하지 말고, 당가나 잘 지켜보거라.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화음에 도착해야 한다.”
“예, 장문인.”
운암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발이 향하는 곳 반대편, 저 먼 곳에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너무 날뛰진 않으면 좋겠는데.”
“예?”
“아니. 아니다.”
운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겠는가. 설마.
❀ ❀ ❀
“그⋯⋯.”
조웅이 제 머리를 벅벅 긁적였다. 처음 맞닥뜨렸던 당혹감이 사라지자 마음이 안정되는 게 아니라 더 큰 황당함이 밀려왔다.
처음 그를 덮친 의문이 ‘조걸’이 왜 여기 있는가였다면, 지금 그를 덮친 의문은 조걸이 ‘왜’ 여기 있는가였다.
“형님, 빨리 준비하십시오. 식솔들을 데리고 성도를 빠져나갈 겁니다.”
“자, 잠시만.”
“아니, 시간이 없다니까요!”
“시간이고 나발이고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여기가 어딘지 알고!”
그 말에 조걸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흡사 정신 나간 사람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디긴 어딥니까? 성도의 사해상회죠. 어디 머리라도 다치셨습니까?”
“쿨럭.”
조웅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이 양반이 사태 파악이 안 되나?’라고 묻는 듯한 아우의 눈을 보자니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막막하기까지 했다.
“이, 이놈아! 성도가 어딘 줄 알고!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서 네 발로 걸어 들어왔단 말이냐? 내가 너를 그리 가르쳤더냐! 아무리 걱정이 된다 해도 네 개인의 선택으로 문파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되는 일이거늘!”
“위험요?”
“그래!”
“⋯⋯위험?”
그 순간 드높은 사해상회 담장 위로 사파인들이 폭죽처럼 솟구쳤다.
“으하하하하핫! 비키시오, 당가주! 이것들은 내 몫이오!”
“흥!”
당군악이 담장 위를 검은 비조처럼 달리고 있었다. 조웅은 멍하니 그 광경을 보았다.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사파들한테요?”
세상에 상식이라는 건 분명 있지만, 때로는 그 상식이 힘을 잃을 때도 분명 있다.
“⋯⋯아니, 그러니까⋯⋯.”
“됐고요.”
그때 청명이 불쑥 끼어들었다.
“형제 싸움은 나중에 천천히 하시고, 지금은 바쁘니까 일단 움직이죠.”
“청명 도장?”
“정리할게요. 지금 일단 나는 여기에 조걸 사형의 사제이자 화산의 제자인 청명으로 온 게 아니라 천우맹의 총사로서 온 거예요.”
“초, 총사?”
“그러니 사해상회에 계신 분들을 모셔 가는 건 조걸이나 화산이 아니라 천우맹이라는 거죠. 이거 일단 확실하게 해 두고.”
청명이 조웅의 뒤쪽에 있는 이들을 향해 턱짓했다.
“빨리 준비하세요.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하니까.”
조웅은 얼결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들의 말대로 성도를 빠져나가야 한다.
“딱히 준비할 건 없습니다. 지금 내부에 남은 인원이 많지 않아서 보이는 사람들만 가면 됩니다. 하지만 성도를 빠져나가는 게 가능할지⋯⋯.”
“거참,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예?”
“준비하라니까요, 준비?”
“⋯⋯그, 그게 무슨⋯⋯.”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여기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위치로!”
“예, 사숙!”
담장을 넘어 사해상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오검이 급하게 좌우를 둘러보며 내부를 살피더니, 이내 한곳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착! 착! 착!
“⋯⋯으응?”
오검이 결연하게 조웅을 응시했다. 그들의 손에는 장원 한편에 정차되었던 수레가 쥐여 있었다.
“아⋯⋯!”
조웅이 순간적으로 그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급히 끄덕였다.
“모, 모두 수레에 올라라! 저분들이⋯⋯.”
“뭐래?”
“예?”
심드렁하게 흘러나온 청명의 목소리에 조웅이 움찔해 돌아보았다.
“멀쩡한 두 다리 놔두고 뭔 놈의 수레를 타요? 이역만리 상행도 다니는 양반들이.”
“그, 그럼 수레는 왜⋯⋯?”
“하, 진짜⋯⋯. 사형!”
청명이 외치자 조걸이 슬쩍 다가와 조웅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형님.”
“응?”
“사람 시켜서 창고에 돈 될 만한 건 다 실으십시오.”
“⋯⋯.”
“빨리.”
⋯⋯조웅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콰아아아앙!
사해상회의 담장이 말 그대로 터져 나갔다. 그리고 수많은 수레가 줄지어 흙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바퀴가 버티는 게 신기할 정도로 높이 쌓아 올린 재물. 그 위로 올라탄 청명이 검을 뽑아 멋들어지게 앞을 가리켰다.
“가자! 사숙, 사고, 사형!”
“야, 이 미친놈아! 멀쩡한 전각 담장을 왜 무너뜨려! 문 있잖아, 문!”
“아, 이래야 다 나와서 볼 거 아냐! 내가 일일이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해?”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상식적인 지적을 한 대가로 핀잔만 들은 조걸이 핏대를 세우며 청명을 노려보았다. 화산에서야 일상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드높은 재물 탑 꼭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조웅에게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황당함의 연속이었다.
‘이게 대체?’
사해상회 바깥은 난리 그 자체였다.
성도에 개미 떼처럼 깔려 있던 사파 놈들이, 이제는 개미핥기에게 습격이라도 당한 양 초토화되어 있었다.
‘이, 이게 천우맹의 힘인가?’
조웅은 깨달았다. 사패련이 지배하게 된 땅에 천우맹이 돌아올 리 없다는 그의 판단은 잘못되었던 것이다.
“그럼 이, 이제 본대에 합류하는 겁니까?”
“응? 우리가 본대인데요?”
“예? 여기 고작해야 여섯 명 있는데⋯⋯.”
“맞아요. 잘 보셨네.”
조웅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떨렸다.
“그럼, 그, 설마 여기 보이는 사람이 전부란 말입니까?”
“아, 서너 명 더 있기는 해요. 그러고 보니까 이 인간들이 어디 갔지? 근처에 있으라 그랬는데.”
“히, 히이익⋯⋯.”
아니, 이건 그의 판단이 잘못되었단 걸 보여 주는 광경이 아니었다. 이 인간들이 얼마나 미쳤는지를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자, 그럼 챙길 건 챙겼고⋯⋯.”
청명이 여전히 날뛰는 문주들과 빼꼼 열린 인근 전각 대문들을 훑어보았다. 숨죽인 채 실내에만 있다가 못 참고 바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내민 이들의 시선이 모두 청명에게로 향해 있었다.
“마무리만 하면 되려나?”
채앵!
암향매화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으응? 뭐 하려고?”
“잠깐 다녀올게!”
청명이 사형제들을 뒤로하고, 수레를 박차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우우우우웅!
암향매화검이 웅혼한 검명을 터뜨렸다. 성도를 온통 뒤덮은 소란을 뚫고, 더없이 청아하게 퍼져 나갔다.
“응?”
조걸의 시선이 허공으로 솟은 청명에게로 향했다. 청명은 성도 하늘에 뜬 해를 등지고 있었다. 암향매화검이 넘실넘실 붉은 기운을 뿜어냈다.
“저, 저거⋯⋯.”
“와⋯⋯.”
그 순간 성도의 사람들은 분명히 보았다.
이제는 푸르러도 더는 전처럼 아름답지 않을 성도의 하늘, 그 위로 거대한 매화 형상이 선명하게 피어나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