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0화. 고작은 아닐 거예요. (5)
“뒈져!”
청명의 뒤꿈치가 달아나는 사파인의 정수리에 맹렬히 틀어박혔다.
콰아아아앙!
“히, 히이이익!”
사람 하나가 말 그대로 못처럼 박혀 버리는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대로변을 채운 사파인들이 혼비백산해 비명을 질렀다.
“화, 화산검협이다아아아아!”
“매화검귀! 매화검귀가 왔다아아아!”
명성이란 참 기이하다.
명성이 드높아진다고 해서 사람의 실력이 덩달아 높아지는 건 아니다. 해남행을 통해 청명의 명성이 과히 높아졌다고 해서 그의 실력이 그새 명성만큼 급등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만 지금 청명을 마주하는 사파인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으, 으아아아!”
청명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손써 볼 도리도 없을 만큼 거대한 공포가 피어났다.
하지만 굳이 달아나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그들의 머리에 ‘도주’라는 두 글자가 떠오르기도 전에 청명이 쇄도해 왔으니까.
“으라아아아압!”
콰아아앙!
청명이 엉덩이를 빼고 있는 사파인들을 단숨에 쳐서 날렸다. 검에 얻어맞은 이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이 새끼들!”
아예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만인방의 정예들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청명을 이곳에 모인 어중이떠중이들이 어찌 막아 내겠는가.
한 손으로 적당히 검을 휘두르기만 해도 이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갈 게 분명하다. 하지만 청명이 휘두르는 검에는 상대에 비해 과분할 만큼 강력한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설소백이 알겠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역시 도장님! 범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너희 이 개자식들 강남에서 왔지! 그때는 잘도 기분 냈겠다! 모조리 쳐 죽여 준다! 으아아아아압!”
“⋯⋯다하는 법⋯⋯.”
청명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굶주린 이리처럼 날뛰었다. 연약한(?) 사파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다. 미묘한 무언가를 느낀 듯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설소백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가, 같이 갑시다, 도장님!”
“죽인다아아아아!”
묘하게 힘이 빠진 설소백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청명이 검을 내리쳤다. 그의 두 눈에는 차마 마주 보기 두려울 만큼 기괴한 광기가 번뜩였다.
“⋯⋯아주 신나셨네.”
달아나는 사파 놈들의 뒤통수를 힘껏 걷어차는 청명을 보며 임소병이 혀를 찼다. 하기야⋯⋯.
‘여태 화병이 안 난 게 이상할 정도지.’
애초에 그리 참을성이 대단한 양반도 아닌데, 해남부터 여기까지 토끼몰이를 당했으니 얼마나 속이 뒤틀렸겠는가? 지금 맞고 있는 저들의 잘못이랄 게 있다면, 하필 그런 청명의 손에 걸렸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녹림왕!”
“흠?”
임소병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내력을 쥐어짠 대가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남궁도위가 서 있었다. 그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지, 지금 이렇게 마음 놓고 날뛰어도 되는 겁니까? 빨리 할 일만 하고 성도를 빠져나가는 게 맞지 않습니까? 이러다가 만인방 놈들이 오기라도 하면⋯⋯.”
임소병이 남궁도위를 빤히 바라보다가 짧게 혀를 찼다.
“진짜 답답한 건 따로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혹시 지금 욕한 겁니까?”
“오. 머리는 나빠도 감은 좋으시군요. 역시 남궁인가?”
“이 양반이?”
남궁도위가 이를 갈아붙이려는 순간 임소병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지원은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성도에서 충분히 날뛰고 돌아갈 때까지는 말입니다.”
“예?”
“그러니까 지금 만인방은 여길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못해도 사흘 정도는 더 발이 묶여 있을 겁니다. 저 어디 동쪽에서 말이죠.”
남궁도위는 ‘이 산적 새끼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라는 눈으로 임소병을 빤히 보았다. 임소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여하튼 뭐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그렇게 대충 넘기지 말고 설명을 해 주십시오, 설명을.”
“아, 설명이요?”
임소병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냥 까십시오.”
“예?”
“총사의 명인데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까라면 까야지. 쯧쯧.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
“흐으음. 진짜 편하군요, 이거. 입도 안 아프고 말이죠.”
“⋯⋯근데 이 산적 놈이?”
“총사! 총사아아아아! 여기 남궁 소가주가 놀고 있습니다아아아!”
“빌어먹을! 간다고, 가!”
남궁도위가 남궁이라는 고아한 성에 걸맞지 않게 욕지거리를 한바탕 쏟아내며 달려갔다. 임소병은 그 뒷모습을 보며 깔깔 웃었다. 그리고 청명을 흘끗 보았다.
‘여하튼 대단한 양반이라니까.’
상황상 성도가 취약해진다는 건 임소병도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장일소가 바보도 아니고, 그 역시 비울 만하니 성도를 비운 것이다.
천우맹에게 성도는 이제 와 굳이 다시 먹기에 얻을 게 없고 위험이 가득한 계륵이 된 지 오래였다. 자칫 섣부르게 점령을 시도하다가는 사패련에 포위당할 위험마저 있다.
그러니 보통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발을 뺄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당장 당가 사람들을 이끌고 화음으로 가는 일도 급하지 않은가?
“⋯⋯그게 일반적인 사고방식일 텐데 말이지.”
그런데 저 인간은 그걸 거꾸로 뒤집어 버렸다.
점령해 얻을 게 없다면 점령하지 않으면 된다. 성도로 진입했다가 포위당할 위험이 있다면, 포위당하지 않을 소수만 끌고 오면 된다. 소수로 성도를 방어하는 이들을 다 상대하기 어렵다면, 힘만큼은 소수가 아닌 소수를 끌고 오면 된다.
그 결과? 지금 저들이 몸으로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달아나지 마라! 달아나는 놈은 련주님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물러서는 놈은 죽인다! 죽인다고 하지 않았느냐!”
사파 무리 사이사이에 끼어든 만인방이 악을 썼다.
하지만 완전히 공포에 질려 버린 이들은 그들의 발악 같은 위협에도 멈추지 않고 필사의 도주를 감행했다. 담벼락을 넘고, 뒤쪽의 동료를 타 넘어서라도 말이다.
“이⋯⋯ 이 버러지 같은 놈들!”
사파는 결국 사파다.
기세를 탔을 때는 세상 그 무엇보다 무서운 존재이나, 한번 기세를 잃으면 모래알과 다름없는 것이 또 사파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들에겐 흩어지기 시작한 모래알을 다시 뭉치게 만들 힘이 없었다.
“부, 부대주! 무너집니다! 놈들이 옵니다!”
“이, 이런⋯⋯.”
부대주라 불린 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 개 같은 놈들! 왜 저놈들이 여기로 온단 말이냐! 왜!”
머릿수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저 인원에 저만한 힘이라면 웬만한 문파 몇 개 정도는 하룻밤 새에 개미 새끼 하나 남기지 않고 쓸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듣도 보도 못 했다. 저만한 문파의 수장들이 수하들을 내버려 두고 한곳에 모여 싸운다는 건.
세상에는 최소한의 상식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펼쳐지는 광경은 상식을 모조리 파괴하고 있다.
“지, 지원을 요청해라, 당장!”
“어디에 요청을 합니까? 련주께서는 지금⋯⋯.”
“어디든 요청하란 말이다! 빌어먹을, 뭐라도!”
“대, 대주님! 아, 앞! 앞에!”
“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보았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새하얀 날붙이를. 그리고 그 날붙이에 어린 붉디붉은 기운까지 말이다.
‘빌어먹⋯⋯.’
파아아아아아앙!
파공음과 함께 하나의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단숨에 한 사람의 목을 날려 버린 청명이 검을 손안에서 돌려 피를 털어 내고는 목을 한차례 꺾었다.
“지원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으⋯⋯.”
“뭐 다른 사파 잡졸 새끼들이야 솔직히 까라면 까는 놈들이니 굳이 등에 칼을 꽂을 것까진 없지만⋯⋯.”
청명이 환하게 웃었다.
“너흰 아니잖아. 그렇지?”
“으⋯⋯.”
만인방도들이 청명에게서 주춤주춤 물러났다. 몸에 걸친 만인방의 무복이 이토록 저주스럽게 느껴진 적이 또 있었을까?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아, 걱정할 것 없어. 사실 뭐 내 원한이야 풀어놓자면 사흘 밤낮은 읊어 댈 수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여기서 너희한테 원한이 있는 게 나뿐만은 아니거든.”
“으음?”
“살살해, 살살. 너무 과하면 사람들이 겁낸다.”
만인방도들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그리고 이내, 그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파아아앗!
두 눈에서 새파란 살기를 뿜는 이들이 청명의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만인방도들은 그 손에 들린 검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체를 파악했다.
“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성도 하늘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청명이 히죽 웃었다.
“쯧. 하여튼 말은 더럽게 안 들어 처먹는다니까.”
“이리 오십시오, 대공자님!”
“아, 아니 지금 밖에⋯⋯!”
“거기 있으면 다치십니다!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저런 데 잘못 휩쓸리면 뼈도 못 추리는 걸 모르십니까?”
“⋯⋯예, 압니다. 하지만⋯⋯.”
조웅은 몸을 물리면서도 미련이 잔뜩 남은 얼굴로 자꾸만 문 쪽을 돌아보았다. 바깥에 뭔가 큰일이 났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지만, 무학을 익히지 않은 그는 긴 거리를 뚫고 상황을 파악할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 전투가 벌어지고 있단 말입니다. 혹여⋯⋯.”
“아이고, 대공자님! 조금 전까지 저한테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럴 일은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이럴 때 괜히 고개 내밀었다가 잘못 찍히기라도 하면 대공자님뿐 아니라 모두가 죽습니다! 정말 모르십니까?”
조웅이 입을 꾹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이럴 때는 숨을 죽이고 있는 게 최선이었다.
“다들 뭐 하느냐! 기웃거리지 말고 당장 안으로 들어가라! 어서!”
“예, 예! 총관님!”
혹시나 하는 기대에 주춤거리던 이들이 아쉬움을 뒤로 하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아앙!
이미 한차례 부서져 겨우 수습이나 해 놓은 대문이 다시 한번 터져 나갔다. 그 당황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목을 움츠리고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누, 누구⋯⋯.’
치솟은 흙먼지가 밀려 나가며 한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제 어깨에 걸친 검수가 서 있었다. 눈빛이 서늘했다.
“다, 당신⋯⋯.”
검수의 차가운 눈이 냉정하게 그들을 훑었다. 무감정해 보이던 그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 옆으로 살짝 꺾었다.
“어⋯⋯. 이 집이 아니던가?”
“맞아! 이 미친놈아! 왜 남의 집 대문은 부수고 지랄이야!”
“이미 부서져 있더구만! 왜 나한테 그래!”
입구에서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멍하니 있던 사람들의 입이 열렸다.
“청⋯명 도장?”
“거, 걸아!”
조웅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 저 미친놈이 왜 여기에⋯⋯?
“형님!”
조걸이 조웅을 보며 외쳤다.
“하핫! 구하러 왔습니다!”
그야말로 감격스럽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다. 절망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던 가슴속에 다른 열기와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 감정에 몸을 맡기려던 조웅의 귓가에, 순간 쀼루퉁한 총관의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계산이 빨라서 안 올 거라면서요.”
“⋯⋯.”
“예?”
“하하⋯⋯.”
조웅이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멍청한가 보죠, 뭐.”
“예? 형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