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8화. 고작은 아닐 거예요. (3)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이 눈으로 스며든다. 부관들은 따끔거리는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차게 식어 가는 동료의 시신이 앞에 놓여 있어서다.
고작 한마디. 그 한마디를 가장 먼저 했기 때문에 운명이 갈렸다.
살아남은 부관들은 지옥에 발을 담갔다가 가까스로 돌아온 셈이다. 전신이 땀으로 축축이 젖어 들었다.
호가명은 장일소의 곁에 공손히 자리하고 있었다.
“보급은?”
“본단에서 끌어올 것입니다. 비축은 충분히 해 두었으니 별문제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영 성미에도 안 맞는 노숙을 하게 생겼잖니.”
“길어 봐야 열흘입니다. 감내하셔야 합니다.”
“끄응⋯⋯. 말은 쉽구나, 말은.”
장일소가 구겨진 제 미간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나른함이 얼굴에서 묻어났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분위기, 그리고 평소와 다르지 않은 대화.
하지만 이곳까지 장일소를 보좌해 온 적호에게는 그 모든 광경이 기이하게만 느껴졌다.
‘대체⋯⋯.’
당가에 대한 추적을 섬서에서 포기했던 장일소는 당연하다는 듯 동쪽으로 이동했다. 기껏 점령한 사천을 내버려 두고 말이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사천으로 향했을 게 분명한 호가명도 미리 짠 듯 바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던가?
‘그럴 리가.’
적호는 섬서 인근에서부터 이곳까지 단 한시도 장일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장일소를 지켜야 했으니 말이다. 그 과정에서, 맹세컨대 장일소는 그 누구에게도 연락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던 이들이 대체 어떻게 서로가 갈 곳을 알고 이리 자연스레 조우했단 말인가?
적호는 스스로 우둔하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결국 자신이 칼을 휘두르는 무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같은 눈으로 같은 곳을 바라본다 해도 이들이 보는 세상과 그가 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입술을 살짝 짓깨물며 두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결과적으로 이득이 되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대놓고 장일소를 속이려 했던 호가명을 처벌하는 문제. 아직 완전히 평정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사천 지역의 관리 문제. 북쪽으로 이동한 당가를 추적하는 문제⋯⋯. 그리고 그 외에도 숱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하지만 그 많은 고민 중 결국 그의 입을 뚫고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의문이었다.
“⋯⋯련주님. 어째서 이런 곳에 진을 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적호의 질문은 무척이나 합당했다.
상식적으로 판단했을 때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점창으로 간 하오문주를 돕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오문주에게 내주었던 하오문과 혈교에 대한 명령권을 되찾아 오는 것이다.
그 후에는 무주공산이 된 사천의 평정을 논해 볼 수 있다.
두 가지 문제 모두 시급을 다투어도 모자란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단 말인가?
“쯧.”
그때 장일소가 짧게 혀를 찼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호가명이 대신 귀찮은 일을 떠맡아 주었다.
“지금은 이곳에 자리하는 게 옳기 때문이지.”
“⋯⋯어째서?”
적호는 저도 모르게 한결 부담이 덜어진 얼굴로 호가명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호가명의 존재가 왜 중요한지를 체감하고 말았다.
적호쯤 되는 이도 장일소에게 의문을 표하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상대가 군사라면 말이 다르지 않은가?
“그래야 놈이 움직이는 게 한결 수월해질 테니까.”
“⋯⋯놈이라면?”
“법정. 소림 방장 말이오.”
선문답 같은 대답에 적호의 얼굴이 멍해졌다. 여기서 갑자기 소림 방장이 왜 튀어나온다는 말인가?
혹시⋯⋯.
“그들이 우릴 공격해 올 거란 소리요? 그래서 이곳을 막은 것이오?”
만약 구파가 사천으로 쳐들어온다는 인식을 련주와 군사가 공유하고 있고, 그 방어에 적합한 곳으로 장가계를 선택했다면 나름 납득이 간다. 하지만⋯⋯.
“천만에. 그럴 일은 없소. 놈들에겐 그만한 여력이 없지.”
호가명은 그런 적호의 추측을 여지없이 잘라 버렸다.
“그럼 대체 왜⋯⋯.”
“거꾸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린 지금 구파를 견제하는 게 아니오. 되레 도와주고 있는 거지.”
적호가 멍한 얼굴로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린가? 그들이 왜 구파를 돕는단 말인가? 사패련에게 구파일방은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데.
“대체 왜?”
“그래야 놈들이 제 휘하에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기가 수월할 테니까.”
그 말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히 되지 않으리라 느꼈는지, 짧게 숨을 들이쉰 호가명이 담담히 부연했다.
“이곳은 장가계. 원한다면 섬서로도, 호북으로도, 그리고 사천으로도 갈 수 있는 위치요. 저 강북에서 호의호식하던 놈들이 우리가 이곳에 진을 친 것을 알면 어찌 생각하겠소?”
“그야⋯⋯.”
제 턱 아래 칼끝이 겨눠졌다 생각하겠지. 사천과 운남을 짓밟은 사패련이 이젠 호북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고 여길 테니까.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엉덩이를 빼고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도 청성과 아미의 멸문을 보고 기겁하여 일어났을 것이다.
그럼 그들이 어찌하겠는가?
“구파 아래로 집결하게 만든다는 거요?”
“그렇소.”
“어째서?”
“뻔한 소리를. 그래야 놈들이 더욱 선명하게 경계를 나누고 벽을 세울 테니까. 다시는 허물 수 없을 만큼 견고한 벽을.”
적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천우맹과 구파⋯⋯.’
지금 호가명은 이곳에서 강북을 향해 칼을 겨눔으로 천우맹과 구파를 완전히 갈라 치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게 정말 가능하⋯⋯.”
“하아⋯⋯.”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장일소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끄응. 설명해도 못 알아들을 걸 뭐 하러 자꾸 물어 댈까?”
“⋯⋯죄송합니다, 련주님.”
“생각해 보렴. 몇 해 전만 하더라도 네가 흑귀보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걸 생각이나 할 수 있었니?”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적이었으니까. 그것도 반드시 쓰러뜨리고 짓밟아야 할 적. 하지만 지금 적호는 분명 흑귀보를 아군으로 여기고 있다.
“그거란다.”
장일소의 붉은 입술이 살짝 뒤틀렸다.
“사람은 필요에 의해 경계를 짓지. 하지만⋯⋯ 그 경계가 나뉘고 나면 선을 그은 자신도 그 경계에 휩쓸리는 법이란다.”
적호가 의아한 눈으로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호가명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부연했다.
“지금까지 천우맹과 구파가 서로에 대한 악감정이 있음에도 적당히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건, 중간 지대가 존재했기 때문이오. 중소문파라는, 그리고 양민이라는 이름의 중간 지대. 지금껏 그들은 정파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이들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져 왔다는 의미지.”
잠깐 말을 멈추었던 호가명이 물었다.
“하지만⋯⋯ 만약 그 어정쩡한 중간 지대에 완전한 선이 그어진다면 어찌 되겠소?”
적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지금 우린 늑대가 되어 주는 중이오. 달려들지는 않지만, 양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기에는 충분한 늑대.”
적호가 장일소와 호가명 두 사람을 황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다소 복잡하지만, 어쨌든 정리하자면 그들이 이곳에 자리함으로써 천우맹과 구파가 더 확실하게 갈라서게 될 거란 말이 아닌가?
그럼 천하는 완벽하게 세 등분될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껏 사패련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강북으로 밀고 올라가는 순간 저 천우맹과 구파가 반드시 손을 잡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내부에서 암투를 벌인다고 해도 외적이 쳐들어오면 손을 잡는 게 이치니까.
하지만 천우맹과 구파가 더 이상 서로를 정적쯤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면, 그들 사이에 경계가 생겨나고 서로를 외적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렇다면 사패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큰 이득을 얻게 될 것이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소. 하지만⋯⋯ 저들이 정말 생각처럼 움직일지는⋯⋯.”
“그리될 거란다.”
“⋯⋯예?”
호가명 대신 대답한 장일소의 입꼬리가 사이하게 뒤틀렸다.
“그게 저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고, 그게 저들이 사천에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란다.”
두 번의 저들.
하지만 앞과 뒤의 ‘저들’이 의미하는 이는 분명 달랐다.
“쯧. 중놈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건 영 거슬리지만⋯⋯ 그게 이득이 된다면야 해 주지 않을 이유도 없지. 지켜보려무나. 아마 이 순간에도 소림의 중늙은이가 게걸스레 움직이고 있을 테니.”
장일소가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시선은 자연히 섬서 쪽으로 향해 있었다. 지금쯤 힘없이 제집으로 향하고 있을 이를 떠올리며.
“가련한 건 화산검협이구나.”
“⋯⋯.”
“세상도 무심하지. 기껏 그리 노력했는데 말이다.”
말과는 달리 장일소의 두 눈은 큰 즐거움으로 일렁였다.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그건 꿈에 부푼 아이의 머리채를 잡고 눈앞에 현실을 들이미는 이가 느낄 법한 저열한 쾌감에 가까웠다.
“내가 말했잖니. 어리광을 부릴 나이는 지났다고. 세상이란 결국 더 탐욕스러운 자가 이기는 곳이란다.”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천을 잃고 섬서에 틀어박히게 된 천우맹의 운명은 이미 반쯤 결정 난 것과 다름없다. 당가로 향하며 명분을 잃어버린 그들을 앞으로 구파가 더 철저하게 물어뜯을 테니까.
그리고 설령 구파가 그러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본래 큰 위기에 맞닥뜨리면 조금 더 익숙한 곳을 찾기 마련이다. 구파에 비하면 신생에 불과한 천우맹에 제 목숨을 내걸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거면 충분하지. 서로 증오하면 된단다. 기회를 얻은 구파가 천우맹을 짓밟고, 천우맹은 그런 구파에게 버릴 수 없는 원한을 가지게 되어야지. 서로의 파멸을 보며 거리낌 없이 웃음을 터트릴 수 있게 말이지. 하하하하하핫!”
장일소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길었다. 너무도 길었다.
이 광경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얼마나 긴 시간을 인내했던가? 아무리 악을 쓰고 날뛰어도 결국은 저들의 연합 아래 무너질 미래를 바꾸고 틀어 놓기 위해 얼마나 오래도록 발톱을 갈았던가?
참고 또 참아 내어 마침내 원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 쾌감은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핏발이 선 장일소의 기름한 두 눈에 형용할 수 없는 숱한 감정이 휘몰아치는 바로 그때였다.
“려, 련주님!”
등 뒤에서 다급하게 들려온 목소리가 있었다. 장일소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깨어져서는 안 되는 흥이 깨어지니 살의마저 치솟았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억누른 장일소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호가명이 눈치 좋게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사, 사천 쪽으로부터의 보고입니다!”
“사천?”
호가명의 눈썹이 꿈틀했다.
“예! 지, 지금 성도 쪽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접근하고 있다고 합니다.”
호가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천우맹?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놈들의 지금 사천에 나타나는 건 불가능하다. 대규모의 병력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 기동력에 한계가 있으니까.
“수는?”
“그, 그게⋯⋯.”
순간 보고하던 이가 망설였다. 대답이 궁하다는 듯이.
그 반응에 이상함을 느낀 호가명이 조금 언성을 높이며 그를 채근했다.
“대답해라. 수는?”
“그, 그게 불과 십여 명이라고⋯⋯.”
“십여 명?”
호가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열 명이 성도로 접근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리 호들갑을 떨어 대었단 말인가?
가벼운 짜증을 느끼며 손을 내저었다.
“알았으니 물러가⋯⋯.”
“그, 그런데!”
“음?”
보고한 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그 십여 명 중 독왕 당군악의 모습이 보였다 합니다!”
“당군악?”
호가명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당군악이 왜 거기로 향한단 말인가.
“당가에 챙길 것이라도 남았나? 이제 와⋯⋯.”
“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두 배 될 만큼 거대한 덩치를 가진 이도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그, 그리고 매화검을 패용한 이도 있다고⋯⋯.”
호가명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당군악에, 덩치가 비정상적으로 큰 이, 그리고⋯⋯ 매화검?’
당군악. 야수궁주 맹소. 그리고 화산의 누군가⋯⋯. 그런데 고작 십여 명이라고?
잠깐 생각에 잠겼던 호가명이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눈이 순간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무, 문주들? 설마 각 문의 문주들이 제 수하들을 내버려 두고⋯⋯?”
그의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말도 안 되는 집단이 탄생할 것이다. 지금 천우맹 휘하 각 문파의 문주들은 그 문파의 최고수들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대체 어느 미친 문주들이 퇴각하는 수하들을 내버려 두고 저들끼리 적진에 돌입한다는 말인가? 어느 미친⋯⋯.
“⋯⋯매, 매화검귀⋯⋯.”
그 순간 호가명의 고개가 격하게 장일소를 향해 돌아갔다.
“이건⋯⋯.”
그리고 그는 보았다. 장일소의 얼굴을 덮고 있던 저열한 쾌감이 유리처럼 깨어지는 것을.
“려, 련주님.”
“하핫⋯⋯. 하하핫.”
장일소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황망하게까지 들리는 그 웃음 끝에 장일소가 중얼거렸다.
“이것만은 나도 예상 못 했는걸? 설마 세상에⋯⋯ 나보다 더 제정신 아닌 놈이 있을 줄은.”
웃고 있던 장일소의 얼굴은 점점 더 참혹히 일그러졌다. 이윽고 섬뜩한 살기가 두 눈에서 흘러나왔다.
“이 순간에 찔러 온다고? 이런 상황에서조차?”
호가명은 알았다. 장일소의 목소리에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감정이 실려 있음을.
차마 그의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