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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57화 (1,458/1,567)

1457화. 고작은 아닐 거예요. (2)

산봉우리들이 구름 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천혜의 절경이 굽이굽이 이어진 곳. 세상이 천자산(天子山)이라 부르는 산봉우리들을 한 남자가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구름을 뚫고 솟은 긴 봉우리로 향했다.

산이 구름 위까지 닿은 광경은 그렇게까지 드물지 않다. 그럼에도 새삼 저것이 남달라 보이는 건, 저 날카로운 산봉우리가 마치 하늘을 찔러 대는 창처럼 보이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혹자는 이 땅을 그리 부른다. 하늘에 억눌려 있던 땅이 칼을 들어 올린 곳. 역심(逆心)의 대지라고.

그림 같은 장가계를 배경으로 선 호가명을 부관들은 뒤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의 얼굴엔 불안이 어려 있었다.

“⋯⋯왜 여기에 진을 치신 거지?”

“그러니까.”

남경에서의 대치 후 줄곧 사천을 향해 이동하던 호가명이 장가계에 도달한 이후로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아니, 움직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물론 잠시 쉬어 가는 것이 문제 될 것은 없다. 쉬는 와중에도 진을 짜는 것은 의심받을 일이 아니라 찬사를 받아야 할 일이니까.

하지만 기이한 것은 그들이 이곳에 진을 친 지 벌써 하루가 지났다는 점이다. 결코 길다고는 할 시간은 아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천금에도 비견될 수 있다. 그런 시간이 바로 이 장가계에서 허무하게 낭비된 것이다.

“⋯⋯한시바삐 사천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당연히 그래야지. 련주께서 사천과 운남을 점령하고 계시는데⋯⋯.”

부관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최대한 빨리 사천으로 가는 게 우선인데, 또 그들이 아는 걸 군사인 호가명이 모를 리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호가명은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불안한 눈으로 호가명의 등을 바라보던 이 중 하나가 살짝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혹⋯⋯.”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입 처닫아라.”

흘러나오던 말이 급하게 틀어막혔다.

꿀꺽.

하지만 그 의미마저 지워 낼 순 없었던 모양으로,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감이 드리워졌다.

‘군사께서⋯⋯.’

모두가 알고 있다. 그들은 군사전을 보좌하는 부관들이니까.

지금의 호가명은 단순한 군사가 아니다. 그는 지금 무려 사패련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권을 손에 쥐고 있다.

물론 강호의 병권이라는 게, 군권처럼 절대적인 명령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간 사파에서 벌어졌던 숱한 일을 보아 온 부관들은 한 가지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눈치를 보던 부관 중 하나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네. 군사께서 어떤 분이신데.”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무슨 소린가?”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말인가?”

부관들이 다시 일제히 입을 닫았다.

물론 그들도 안다. 처음부터 다른 마음을 품는 이는 없다는 것을. 지금껏 그가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 오직 그 하나뿐이다.

“그리고⋯⋯ 너희도 알 텐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해남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호가명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 호가명의 분전에 장일소가 어떤 답을 내어 놓았는지.

그들이라면 어떨 것인가?

정말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이전과 같이 장일소를 철석같이 믿고 따를 수 있을 것인가? 호가명 역시 하나의 ‘수단’으로, 언제든 버리는 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한 뒤에도?

그들이라면⋯⋯.

“생각하지 마라.”

책사란 어떤 일을 알면 그 가능성부터 검토하는 이들이다. 자연스렵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시작하려 할 때, 누군가가 거칠게 그들을 다잡았다.

“우리끼리 논의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이해 가지 않는 일이 있다면 군사께 직접 여쭤보면 될 일.”

말을 한 이가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남은 이들도 반쯤은 등 떠밀리는 느낌으로 그를 따라 호가명에게로 다가갔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그들에게는 마치 천릿길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호가명의 지척까지 도착한 이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잠시 오간 눈짓 끝에 한 부관이 짜내듯 입을 열었다.

“저⋯⋯ 군사.”

“⋯⋯.”

“사천으로 가지 않으십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호가명은 그저 처음처럼 말없이 봉우리만 응시할 뿐이었다. 부관들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정말 호가명이⋯⋯.

“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순간, 호가명의 입에서 마치 폐부를 찌르는 듯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예?”

“가지 않는다면 어찌할 셈이지?”

호가명이 천천히 그들을 돌아보았다. 철갑이라도 씌운 듯 딱딱한 얼굴에, 부관들이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가운 시선이 그들을 훑었다. 인간의 마음이 없는 듯한 그 눈빛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압감과 긴장을 주었다.

“대답해라.”

부관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패련의 절반을 휘두를 권한을 손에 넣은 이가 련주와의 합류를 거부한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게 둘일 리 있겠는가?

차가운 호가명의 눈빛을 본 이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구, 군사. 어찌⋯⋯.”

“다시 말하지.”

“⋯⋯.”

“내가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천으로 갈 생각이 없다면 너희는 어찌할 것이냐?”

처음 던졌던 질문보다도 조금 더 명확했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 의미를 모를 수 없다. 한 군의 운명을 결정하는 책사들이라면 더더욱.

‘저, 정말로⋯⋯.’

몸 안의 피가 한꺼번에 식는 느낌이었다.

생각해 본 적 없다. 생각할 수 있을 리도 없다. 하지만 질문이 던져진 이상, 이 말을 들어 버린 이상 그들도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극심한 갈등 앞에 모두가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 격하게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저는 그저 군사를 따를 것입니다.”

호가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나를 따른다? 그게 무슨 의미지?”

“마, 말 그대로입니다! 군사께서 뜻을 정하신다면, 그게 무엇이든 그저 따를 뿐입니다.”

교묘한 말이었다.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호가명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호가명의 입가에 너무도 드물게 미소가 그려졌다.

“나쁘지 않은 대답이로군.”

부관들의 등골을 타고 한기가 흘렀다. 저 말이 호가명의 생각을 내보이는 것 같지 않은가?

‘정말 군사께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답을 찾을 때가 아니다. 대답이 늦으면 늦는 만큼 명줄이 줄어들 게 분명하지 않은가?

“저, 저는⋯⋯.”

부관 중 하나가 이어서 입을 열려던 바로 그때.

“군사!”

누군가의 커다란 외침이 그들의 사이로 떨어졌다.

“려, 련주! 련주께서 오십니다!”

“뭐?”

눈을 부릅뜬 부관들이 당혹하여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련주라면 장일소를 말함이다. 그런데 그 장일소가 왜 이곳에 온단 말인가?

호가명이 따로 보고한 적이 있던가?

아니, 그런 적은 없다. 그들은 남경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호가명과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련주께서 어떻게 알고 이곳으로 온다는 말인가?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이곳으로 련주께서 오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릴!”

“저, 저기입니다!”

부관들의 시선이 황급히 움직였다. 정말로 한 무리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점점 다가올수록 그 색(色)이 확연해졌다.

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려, 련주님⋯⋯.”

장일소가 아닐 리 없다.

물론 저런 복색을 할 이가 장일소뿐은 아니란 게 남경에서 이미 증명되었지만, 감히 사패련이 거한 곳에서 허락 없이 장일소를 흉내 낼 간 큰 이가 세상에 있겠는가?

부관들이 당혹한 얼굴로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군사⋯⋯. 련주께서⋯⋯.”

호가명으로부터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직후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이 상황을 환영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커다란 혼란이 그들을 휩쓸었다.

하지만 정작 호가명은 딱히 감정 변화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다가오는 장일소를 응시했다.

“때맞춰 오셨군.”

“⋯⋯.”

“묻겠는데, 너희는 누구의 명을 듣는가?”

“⋯⋯구, 군사?”

“대답해라.”

부관들이 빠르게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들이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군사의 명입니다.”

“그럼 됐군.”

호가명이 장일소를 맞이하기 위해 천천히 발을 옮겼다.

‘설마⋯⋯.’

부관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군세의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장일소가 이끄는 이들은 하나같이 정예 중의 정예지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반면 흑귀보와 남은 만인방, 그리고 남경으로 모여든 중소문파를 온전히 끌고 온 이곳의 군세는 장일소가 이끄는 이들을 수로 압도하고도 남을 만큼 거대했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호가명이 마음을 먹는다면?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저벅. 저벅.

호가명은 몇 걸음 나가지 않아 그곳에 섰다.

느릿하게 다가온 장일소 역시 호가명에게서 꽤 거리를 두고 섰다.

정적 속, 장일소의 두 눈이 호가명과 그의 뒤에 선 이들을 응시했다. 무척 묘하게도 이곳에 포진한 이들이 마치 그를 노리는 것처럼 진을 짜고 있었다.

명만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달려들 수 있을 것처럼.

장일소의 시선이 하늘을 찔러 대는 듯한 봉우리들에 잠시 가 닿았다가 이윽고 다시 호가명에게로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는 호가명에게로.

“⋯⋯묻자꾸나, 가명아”

장일소가 스산한 눈으로 호가명을 노려보았다.

“왜 사천으로 오지 않았니?”

호가명은 대답 없이 장일소를 마주 볼 뿐이었다. 그러자 장일소의 얼굴이 살짝 뒤틀렸다.

“내 말이 안 들리니?”

“⋯⋯어째서냐 물으셨습니까?”

마침내 호가명이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새삼스럽습니다, 련주님.”

“흐음?”

“제게 이유를 물으실 필요가 있습니까? 련주님께서는 이미 미루어 짐작하실 텐데요. 이전에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

“제가 어찌 행동하건 련주께서는 그에 맞춰 저를 쓰실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굳이 보고가 필요하겠습니까?”

호가명의 대답에 장일소의 입가가 선명하게 비틀린다.

“그게⋯⋯ 네 대답이니?”

“그럼 안 되는 것입니까?”

호가명이 감정 없는 눈으로 장일소를 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바로 뒤에서 호가명을 지켜보는 이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비명이 이 침묵을 깨뜨리고, 그들이 알던 모든 걸 무너뜨릴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끄응⋯⋯.”

장일소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보고는 해야 하지 않니. 뭐 그리 귀찮은 일이라고.”

장일소가 다소 과장되게 투덜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부관들은 순간 얼이 빠지고 말았다. 호가명의 입이 담담히 열렸다.

“어차피 오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쯧쯧. 융통성이 없는 건지, 융통성이 과한 건지. 하여튼 문제로구나.”

“잠시.”

“음?”

그때 짧게 양해를 구한 호가명이 가장 먼저 그를 따르겠다 한 부관을 돌아보았다. 호가명의 차디찬 시선 앞에 놓이자 부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역시 제 운명을 직감한 것이다.

“구, 군사!”

파아아앗!

호가명이 날린 장력이 부관의 목을 여지없이 잘라냈다. 단면에서 뿜어진 붉은 피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장일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쯧. 축포치고는 과한데.”

“죄송합니다. 그저⋯⋯.”

“됐다. 이유가 있겠지.”

장일소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원래라면 결코 허락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천하의 누구도 감히 장일소의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할 수 없다. 장일소 역시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행동을 한 이가 호가명이라면 말이 다르다.

이유조차 듣지 않는다. 이 무례를 저지른 이가 호가명이라면 말이다. 오직 호가명만이 장일소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

“군사 호가명, 련주님을 뵙습니다.”

호가명이 한쪽 무릎을 꿇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깨달았다.

그들의 앞에 선 이가 누구인지, 이 사패련의 진정한 지배자가 누구인지 말이다. 호가명의 뒤에 포진한 사패련 소속의 모두가 장일소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땅이 울릴 듯 어마어마한 목소리였다.

장일소는 그 광경을 보며 슬쩍 웃더니 호가명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지척에 이르자마자 호가명의 어깨를 꾹 잡았다.

“속에 불만이 꽤 찬 모양이구나. 안 하던 짓을 하는 걸 보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끄응. 됐다. 까딱했다간 사흘 밤낮은 들어야 할 텐데. 그냥 영원히 묻어 두거라.”

장일소의 눈길이 죽어 널브러진 이의 시신에 짧게 닿았다. 붉은 입술에 조소가 맺혔다.

“꿈은 분수에 맞게 꿔야 하는 법이지.”

낮은 그의 목소리가 열기로 가득 찬 세상을 차갑게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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