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5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5)
“흐음.”
희번덕대는 눈이 책자를 연신 훑었다. 각 문파가 제출한 장부를 몇 번이고 확인한 청명의 눈이 이내 실처럼 가늘어졌다.
“흐으으음.”
그가 장부에서 시선을 떼 각 문파의 문주들을 바라보자 모두의 얼굴이 묘하게 뒤틀리며 떨떠름해졌다.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누가 저 인간 총사로 올리자고 했습니까?’
‘저는 아닌데요?’
묘하다.
사실 청명에게 총사의 지위를 준 건 딱히 대단하다고도 할 수 없다. 이미 은연중에 청명이 그런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저 감투에 불과한 ‘총사’라는 직위를 하나 얹어 놓으니 저 눈빛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이게 다예요?”
“⋯⋯.”
“진짜?”
“크흠.”
당군악이 슬쩍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
“당가는 가진 걸 전부⋯⋯.”
“아아, 당가는 됐어요. 싹 불탄 거 나도 아니까.”
⋯⋯당군악이 은은하게 상처받은 얼굴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이, 녹림왕.”
“예?”
“이게 다야?”
“하하⋯⋯. 산적 새끼들이 돈이 많아 봐야 얼마나 많겠습니까? 산채에 있는 거 싹 다 긁어모아도⋯⋯.”
“매화도는?”
“아이고, 총사 나으리! 매화도에서 저희가 번 돈이야 철저하게 관리 다 하셨잖습니까? 저희가 귀신을 속이지, 화산으로 가는 장부를 속이⋯⋯.”
“그건 거기서 번 돈이고, 녹림 재산은 아니지.”
“예?”
임소병이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청명이 그를 향해 턱짓했다.
“너 매화도에서 애들 부리며 녹봉 줬지?”
“당연한 건 아닙니까? 부려먹고 품을 안 주면 관아에 끌려갑니다. 저희가 관아를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뻔히 아시면서.”
“그리고 그거 다시 상납금 조로 떼서 뒤로 챙겼지?”
“⋯⋯예?”
“그거 어디 갔어?”
임소병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흡사 귀신이라도 보는 듯 눈에 공포가 어렸다. 대체 그걸 어떻게⋯⋯.
“여하튼 이 사파 새끼들은 수작질이 일상이에요. 뱉을래, 뒈질래?”
“헤헤. 사실 그거 제가 먹으려던 게 아니라, 다 총사님께 바치려고 특별히⋯⋯.”
“개소리하지 말고 싹 적어 놔라.”
“⋯⋯눼.”
임소병이 구시렁대며 뒤로 빠졌다. 다시 한번 꼼꼼히 장부를 훑은 청명이 확인했다.
“여튼 이제는 빠진 게 없다는 거죠?”
“확실하게 다 적었습니다.”
“흐음.”
마침내 장부를 접어 손바닥에 탁탁 두드린 청명이 말했다.
“알차게 많이도 해 드셨네.”
문주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저 개 같은 도사 놈이⋯⋯.
“여튼 뭐, 이 정도면 적당히 해 볼 수는 있겠네요.”
그때 설소백이 슬쩍 손을 들었다.
“그런데⋯⋯.”
“왜?”
“도, 도장.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거기서 얼마 정도 가져갈 생각이신지⋯⋯.”
모두의 귀가 쫑긋했다. 눈치가 보여 말은 차마 못 했지만, 사실 가장 궁금해하던 것 중 하나였다.
‘삼 할인가?’
‘설마 사 할은 아니겠지? 저놈도 피가 흐르는 사람인데?’
‘마귀 새끼라도 오 할은 안 넘겠지! 그건 그냥 망하라는 거잖아.’
모두가 저마다의 기대를 품으며 청명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들의 기대와 조금, 아주 조금 거리가 있었다.
“모르지.”
“예?”
“몰라. 해 봐야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설소백의 눈이 북해의 빙정처럼 동그래졌다.
“그, 그게 무슨⋯⋯.”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를 모르는데 지금부터 돈이 얼마나 들어갈지를 어떻게 예상하냐? 그건 쳐들어가는 입장에서나 예상할 수 있는 거고, 막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들지 제갈공명도 몰라요.”
“공명은 알 것 같은데⋯⋯.”
“카악!”
청명이 하악질을 하자 설소백이 움찔해 목을 움츠렸다.
“크흠, 아무튼 뭐⋯⋯ 재산은 얼추 파악했으니까 이건 제가 상황 보며 잘 쓸게요.”
“⋯⋯예.”
“아, 그리고 당장 써먹기 어려운 것들은 적당히 돈이나 곡식으로 만들어 둬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에 모두가 한 사람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 속에 놓이자 남궁도위의 볼이 경련하듯 떨렸다.
“저, 저희요?”
“아니, 아니. 뭐 남궁을 콕 집어서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당장 돈으로 써먹기 어려운 주루나 땅, 뭐 전각 같은 것들 있잖아. 그 ‘움직이지 않는 재산’ 말이야.”
“지, 지금 여기서 그 ‘움직이지 않는 재산’이 있는 문파가 저희밖에 없잖습니까!”
“아? 그게 그렇게 되나?”
남궁도위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도, 도장. 그건 안 됩니다!”
“응? 왜?”
“아니, 제가 그 전각이나 주루를 파는 게 아까워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지금 중원의 상황을 모르십니까? 당장 어디가 불바다가 될지 모르는 상황인데, 누가 전각을 사고 주루를 삽니까? 제가 아무리 상계에는 무지하다지만 그 정도는 압니다.”
“호오. 그래서?”
“지금 이런 것들을 팔면 절대 제값을 못 받는단 말입니다! 반값이나 받으면 다행입니다!”
“아, 그래?”
청명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을 한 듯한 모습에 남궁도위가 반색하는 순간, 심드렁한 청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야 내 알 바 아니지. 내 돈도 아닌데.”
⋯⋯남궁도위의 어깨가 무릎까지 처졌다.
“거, 돈이라는 건 값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시기적절하게 쓰는 게 중요한 거지.”
“아, 아니,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근데 이 새끼가 가주 취급 해 주니까 목에 힘 들어가다 못해 배때기에 기름이 찼나. 지금이 돈타령할 때야? 니들이 아무리 돈에 미친 놈들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남궁도위의 눈앞이 습기로 부옇게 흐려졌다. 그래,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을 저 인간의 입을 통해 듣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그때 당군악이 남궁도위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힘내게⋯⋯.”
“⋯⋯가주님께서 저 양반을 총사 자리에 올리자고 하셨지요?”
“자, 자네도 찬성하지 않았는가?”
“남궁은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원독에 찬 남궁도위의 눈을 본 당군악의 등골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그거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지 말라고, 미친놈아.
“우리도 다 빼앗기지 않는가?”
“보니까 어차피 남은 것도 없으시더구만.”
“뭐, 인마?”
남궁도위와 당군악이 옥신각신하는 꼴을 멀리서 바라보던 오검의 눈엔 허탈함이 감돌았다.
“⋯⋯예상대로네.”
백천이 중얼거리며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윤종이 맞장구를 쳤다.
“문주님들도 뭐 별수 없네요.”
“그러게, 저놈한테 감투 씌워 주면 안 된다니까.”
“싹 털려. 속곳까지.”
“⋯⋯에이, 사고. 그래도 사형이 이제는 속곳 정도는 남겨 줘요. 얼마나 착해졌는데요. 요새는 제법 도인 같다니까요?”
“⋯⋯소소야. 무서운 말 하지 마라.”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무서운 말이라고.”
“아⋯⋯.”
조걸이 당소소와 농담을 하며 낄낄 웃어 댔다. 곁에 선 윤종이 슬쩍 조걸의 눈치를 살폈다. 그 얼굴에서 즐거움 말고는 아무것도 읽어 내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던 윤종은 순간 백천과 눈이 마주쳤다.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내젓자 윤종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탁!
그때, 청명이 장부를 수레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어쨌든 조사에 잘 협조해 주신 점 감사합니다.”
“끄응.”
“뭐⋯⋯.”
여기저기서 떨떠름하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청명은 수많은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우맹의 주축이 될 이들. 그리고 이제부터 그가 이끌어야 할 이들이었다.
“솔직히 쉽지는 않을 거예요.”
“⋯⋯.”
“우리 실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사패련 놈들이 이득을 너무 많이 봤어요. 그리고 이 기회를 틈타서 구파도 반드시 우릴 짓밟으려 들 거예요.”
당군악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파에게 명분을 준 건 다름 아닌 당가다. 그렇기에 그 역시 모든 것을 내어 놓고 백의종군할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 와중에 뭐⋯⋯ 잘해 봐야죠.”
청명은 영 심드렁한 태도였다. 이에 문주들의 얼굴에 슬슬 불안이 번졌다.
“화산검협.”
“네?”
“잘해 보자는 것도 좋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우린 겨우 그런 말을 들으려고 자네의 명에 따르겠다 한 게 아닐세.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가?”
청명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계획이야 있죠.”
“그게 뭔가?”
“뭐, 다양하게 준비야 하고 있지만⋯⋯ 우선은 집을 지키는 것부터겠죠.”
“집?”
“이미 이야기했잖아요. 쓸데없는 것들을 팔아치운 돈으로 단단하게 방비를 하는 거죠. 이 많은 이들은 물론이고, 저기 안휘에서 이주해 올 이들이나, 북해에서 올 이들까지 모두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해야 하잖아요.”
당군악의 눈가가 살짝 꿈틀댔다. 그가 듣고 싶었던 건 이런 답이 아니었다.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하지만⋯⋯ 조금 의외로군. 자네의 입에서 단단히 지키자는 말이 나올 줄이야.”
“지켜요? 제가요?”
당군악의 얼굴에 의문이 스쳤다. 이건 무슨 말인가?
“에이, 지키는 건 지겹게 했어요. 이제는 저놈들이 움직이는 대로 이리 뛰었다 저리 뛰었다 하는 것도 신물이 나요.”
“⋯⋯그런데 왜?”
“쯧쯧. 이래서 전쟁을 모르는 양반들은⋯⋯.”
청명의 말에 당군악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임소병이 입을 뗐다.
“공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보급입니다.”
“⋯⋯보급?”
“아무리 무인이라 해도 먹지 않고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공격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이고, 그 보급을 하기 위한 보급선, 그리고 무엇보다⋯⋯.”
임소병이 부채를 접어 제 손을 탁 내리쳤다.
“그 보급이 시작되는 거점을 제대로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말씀이시지요?”
“⋯⋯저 대가리로 왜 산적 두목이나 하고 있지?”
“태어나 보니 아비가 산적 두목이었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천우맹의 힘은 지금 사방으로 분산되어 있죠. 그걸 제대로 한곳에 모아야 해요.”
그 순간 임소병이 손을 번쩍 들었다.
“뭐?”
“궁금해서 말입니다. 하시고자 하는 일에는 저도 동의합니다만, 부족하지 않습니까? 전각이야 당가를 동원하거나, 여기 남는 이들을 활용하면 금세 지을 수 있겠지만⋯⋯ 보급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텐데요? 은하상단의 여력이 그 정도나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그 양반들이 천하 십대 상단이니 어쩌니 해도 결국은 섬서에서 장사나 하던 양반들인데.”
“그럼 그건 어쩔 계획이십니까?”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안 그래도 그게 우리가 첫 번째로 할 일이야.”
“예?”
청명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렸다. 그러더니 대뜸 딴소리를 시작했다.
“구파나 사패련은 지금쯤 굉장히 좋아하고 있을 거예요. 천하를 위한다는 천우맹의 대의가 제 식구 챙기기 때문에 흐려졌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거든요.”
“으음.”
당군악이 살짝 앓는 소리를 흘렸다. 청명은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천우맹이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대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더는 그들에게 대의가 없다. 그러니 이제 천우맹은 더 커지지 못할 것이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잖은가.”
“아뇨. 완전히 틀린 말이죠.”
“음?”
청명이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 식구 챙기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거잖아요. 그걸로 사람들이 욕할 거라고.”
“그렇지.”
“그럼 거꾸로 가면 되죠.”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청명은 낄낄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거꾸로 보여 주자고요. 우리가 제 식구를 얼마나 철저하게, 끔찍하게 챙기는지. 그래서 천우맹의 휘하에 있으면 얼마나 든든한지.”
“그⋯⋯.”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저 물으면 된다.
“어떻게?”
“그 전에 확인을 다시 한번 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청명이 고개를 돌려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에 오검이 서 있었다.
씨익 웃은 청명이 두 눈을 희번덕대며 문주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총사니까, 여러분은 내가 내린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거죠?”
“⋯⋯화⋯⋯산검협?”
“그게 어떤 명이든지, 그쵸?”
“⋯⋯.”
“아, 좋네요, 좋아. 으헤헤헷! 이거 진짜 편하네. 진즉에 이렇게 할걸! 으하하하핫!”
청명의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문주들이 모두 썩은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