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4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4)
카아아앙!
도와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격렬히 울려 퍼졌다.
“사파의 악적들이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점창이다!”
남색의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목이 터질 듯 고함을 질러 댔다. 그 건너편에 선 붉은 무복의 무인들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그들을 몰아쳐 갔다.
여기저기에 피어오른 화염과 바닥을 적시는 피.
그리고 이미 생이 끊어진 시체들.
그 끔찍한 광경을 바라보는 천면수사의 눈빛이 화염처럼 들끓었다.
“⋯⋯꽤 버티는군.”
당연하겠지.
낌새도 없이 습격을 당한 청성이나 아미와는 다르다. 점창이 바보가 아닌 이상, 청성과 아미 다음에는 자신들이 노려질 것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을 터. 그들이 지금껏 짓밟아 온 이들과는 그 대처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저들을 몰아치는 사패련의 전력 역시 이전과는 다르다. 이곳에는 패군과 만인방이 없으니까. 하지만⋯⋯.
“더 몰아쳐라.”
“무, 문주님. 하지만⋯⋯.”
천면수사가 서늘한 눈으로 제 수하를 노려보자, 움찔한 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가 다급히 앞으로 달려나가고, 천면수사의 입에서 짧은 혀 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음에 안 드는군.’
상황은 충분히 이해한다. 이놈들을 무너뜨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천면수사는 흑룡왕처럼 우둔한 이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지금껏 점창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그와 장일소가 가진 능력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것 같아 속이 끓는다.
만약 이곳에 장일소가 왔다면 어땠을까? 하오문 대신 만인방을 이끈 그가 혈교와 함께 점창을 공격했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지지부진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인자라⋯⋯.”
그 세 글자가 혀끝에서 떨어져 나가며 시큰한 고통을 선사한다.
하오문의 문주 자리에 오를 때, 더는 누군가에게 굴복할 일이 없을 거라 여겼건만⋯⋯.
괴이한 것은 그 상황을 그리 고통스레 받아들이지 않는 자신이었다.
“아아아악!”
앞에서 들려온 처절한 비명을 들은 천면수사가 낄낄대며 웃었다.
“나쁠 것 없지.”
이미 사패련은 사천은 물론이고, 운남까지 발아래 복속시키고 있었다. 그런 사패련의 이인자 자리? 하오문의 문주 자리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단한 위치다.
장일소에 거역하여 죽던가. 그에 복종하고 이인자가 되던가. 세 살 아이도 할 수 있는 선택이겠지.
우드득.
천면수사의 손이 뼈 소리를 낸다. 양손을 펼친 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우선 내가 가치 있다는 것을 제대로 입증해야겠지?”
그리고 그건 점창의 피가 증명해 줄 것이다.
❀ ❀ ❀
같은 시각.
다급한 보고를 들은 한 사람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는다.
“다시.”
“예. 바, 방장. 그⋯⋯. 사천으로 향한 천우맹이 저, 점창으로 향하지 않고 당가를 도우러 갔습니다. 거기다 당가를 구원한 이후에도 점창으로 향하지 않고 북상하고 있다 합니다!”
보고를 올린 이가 절로 몸을 움츠렸다.
그들이 이곳에서 천우맹을 돕는데 건 조건은 오직 하나. 점창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점창이 아닌 당가로 달려갔다는 것은 그들을 철저하게 배신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은가?
그러니 보나 마나 법정의 커다란 진노가 터져 나올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섬서로 향하고 있다던가?”
“그, 그렇습니다.”
“아미타불.”
가만히 불호를 외운 법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되었군.”
“⋯⋯.”
모두가 슬쩍 법정의 눈치를 본다. 하지만 법정은 그저 불호를 되뇌었을 뿐, 그들이 생각하는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 묘한 침묵 속에서 노기를 터뜨린 것은 법정이 아니라 다름 아닌 공동 장문인 종리형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천우맹은 분명 점창을 구하러 가겠다고 우리와 약조를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섬서로 간다는 말이더냐!”
보고한 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역시 개방으로부터 들어온 정보를 전할 뿐, 자세한 내막 같은 건 알 턱이 없었다. 그러니 대답할 말이 궁한 것이다.
“다시 확인해 보거라! 그들이 섬서로 갈 리가 있는가?”
“소용없습니다.”
종리형의 말에 대신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팽엽이었다.
“점창을 구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운남으로 향했어야 합니다. 그들이 당가를 먼저 구한 순간, 이미 점창의 운명은 결정이 된 겁니다.”
“그, 그런⋯⋯.”
종리형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방장. 그럼 우리라도 가야 하지 않습니까? 이미 청성과 아미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점창마저 잃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도리가 없소.”
“예?”
“아미타불.”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점창이 우리가 갈 때까지 버틸 리가 없소이다. 장일소가 그리 호락호락 자가 아니니, 버텨 봐야 이틀일 것이오.”
공동 장문인 종리형이 눈을 찌푸리다가 움찔한다. 그리고는 얼떨떨한 눈으로 법정을 바라보았다.
“이틀⋯⋯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그러니 도리가 없다는 것이오.”
“⋯⋯.”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던 종리형이 말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점창이 당한 변고는 너무도 안타깝지만⋯⋯. 이것으로 확실해 졌소.”
평소라면 당연히 물어 왔을 종리형이 입을 다물고 있자, 팽엽이 대신 추임새를 넣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저들. 천우맹이 그리 가열차게 외쳐 대는 협의가 그저 제 식구 챙기기에 불과했음이 말이오.”
팽엽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우리가 저들을 도우며 바란 것은 그저 사패련의 위협에 놓인 점창을 구하는 것뿐이었소이다. 그런데 저들은 우리와 한 약조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버렸소. 저들이 말한 협의가 정말 저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다면, 결코 점창을 그리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 말을 들은 모두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개중에는 입술을 꽉 깨물고 천우맹에 대한 적의를 내뿜는 이들도 있었다.
“이해하시겠소? 내가 그토록 천우맹의 존재를 우려하던 이유를?”
“⋯⋯방장.”
법정이 고개를 내젓는다.
“스스로 정의롭다 믿는 이들만큼 두려운 이들이 없소. 그 정의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 때문이지. 내 천우맹주께 묻고 싶구려. 서로 맺은 약조를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저버리고, 저들과 더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달려가는 것이 정말 저들이 말하는 협의인지.”
“으음.”
종리형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알리시오.”
“예?”
“각 문파에 서한을 보내 지금의 상황을 알리시오. 청성과 아미, 그리고 점창이 무너졌음을. 이제 사패련의 마수가 결코 그들을 피해 가지 않을 것임을.”
“⋯⋯.”
“그러니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전하시오. 내 이름으로 각 문파의 장문들을 소집하시오. 당장.”
“예. 방장.”
팽엽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법정은 몇 번이고 같은 일을 했다. 하나 그에 대한 호응은 딱히 대단치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를 것이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이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어 버렸으니까.
볕이 따뜻할 때야 어디든 몸을 누일 수 있지만, 폭우가 내릴 때는 짧은 처마라도 간절한 법이 아닌가?
“그리고 그에 더불어, 똑똑히 전하시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것이오. 소림도 더는 굳이 따르지 않겠다는 이들을 애써 끌고 가진 않겠소이다.”
“예. 방장. 그리하겠습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법정은 저들이 빠져나가게 두지 않을 것이다. 이 위기를 틈타 천하에 남은 세력들을 모조리 구파일방의 휘하에 집결시킬 것이 분명했다.
“또한.”
“예. 방장.”
법정의 눈빛에서 서늘한 한기가 쏟아져 나왔다.
“천하에 공표하시오. 오늘부로 소림을 비롯한 구파일방은, 천우맹의 휘하에 든 문파들을 결코 우호적으로 보지 않을 것이오. 그들은 점창의 멸문에 책임이 있는바, 그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을 것이오.”
“바, 방장 그건⋯⋯.”
“명대로 하라!”
“예, 예! 알겠습니다!”
퍼져 나갈 것이다. 수많은 문도들을 통해. 그리고 개방을 통해. 그리고 구파라는 이름에 자신들을 의탁한 수많은 속가를 통해.
저 천우맹과 구파가 완벽히 갈라섰음이.
그렇게 되면 이 거대한 불길에 겁을 먹은 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익숙하고 믿을 만한 곳에 제 몸을 맡기게 될 것이다.
바로 구파와 소림의 이름 아래 말이다.
팽엽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편다.
‘방장⋯⋯.’
구파는 분명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청성과 아미. 그리고 점창. 구파의 한 축을 이루는 세 문파를 모두 잃었다.
그렇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 세 문파는 애초부터 소림에 협조적인 곳이 아니었다. 단 한 번도 법정의 지시를 따른 적 없는 곳. 법정이 저지른 실태를 대놓고 비판해 온 곳들. 법정으로서는 계륵밖에는 되지 않는 이들이다.
법정은 그 세 문파를 잃은 대신 땅에 떨어져 가던 구파의 입지를 다시 세웠다. 이제 천하의 문파들이 소림의 이름 아래 집결한다면 법정의 한마디 한마디는 이제까지와는 격이 다른 무게로 울려 퍼질 것이다.
패악무도한 확고한 적과 명분을 잃어버린 처마.
그 둘을 바탕으로 구파는 다시금 빛을 낼 것이다.
공교롭게도 말이다.
‘과연 이것이 손해인가?’
글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 구파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크게 상실했음은 분명하니까.
하지만 법정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그는 정말 이 상황을 손해라 여기고 있을까?
팽엽의 날카로운 눈빛이 법정의 안색을 살폈으나, 법정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아미타불.”
불호를 외운 법정이 눈을 감는다.
“우리는 너무도 큰 희생을 치렀소. 믿음을 배신당했고, 동료를 잃었소이다.”
“⋯⋯.”
“하지만 슬퍼할 겨를은 없소. 사패련은 더 이상 위협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오. 이제는 저들과 중원의 운명을 두고 싸워야 할 것이오. 모두 각오를 다져 주시오.”
“명심하겠습니다.”
“후⋯⋯.”
짧게 숨을 내쉰 법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면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는 듯.
그런 법정을 주시하던 다른 이들도 삼삼오오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한데 오직 한 사람, 종리형만은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법정이 나간 문으로 향한다.
‘이틀.’
지금부터 이틀 내에 점창은 무너진다. 그건 다시 말하자면 천우맹이 남경에서부터 전력으로 점창으로 향했다 한들, 제시간에 그들을 구해 낼 수는 없었을 거란 의미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법정은 굳이 그들에게 그런 약조를 강요했다.
어떻게든 점창을 구해 낼 방도를 찾는 대신, 선택 불가능한 일을 선택하게 하여 천우맹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온 결과가 무엇인가?
‘알고 계셨지 않습니까? 방장?’
종리형은 문득 두려워졌다.
겉으로만 보면 이 모든 일을 최선을 다해 도운 구파를 천우맹이 철저히 배신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안은 어떤가? 정말 그가 본 일이 그러했던가?
“허허⋯⋯.”
종리형이 눈을 감았다.
‘너무 많은 것을 봐 버린 게야.’
그렇다 한들 어쩔 텐가?
세속의 때는 산을 내려온 순간부터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이미 그 역시 더러운 진흙탕 안에 있는 것이다.
“허허허⋯⋯.”
종리형의 허탈한 웃음소리가 빈방을 조그맣게 채워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