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3)
“보자⋯⋯. 창고에 그, 지금 재산이⋯⋯.”
“총관님! 우리가 지금 쌀이 몇 섬 있었죠?”
“제, 제가 장부를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북해에 사람을 보내서 장부를 가져오라고 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응? 왜요?”
“그럼 총관이라는 인간이 자기 문파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도 파악 못 한다고 저 인간들이 삿대질해 댈 거 아닙니까? 그 꼴은 죽어도 못 봅니다! 차라리 혀 깨물고 죽지!”
“⋯⋯.”
“끄응. 보자, 그러니까 야명주가⋯⋯.”
한이명이 다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설소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기에 비하면 뭐, 그나마 다행인가.’
진짜 전쟁터는 따로 있었다.
“주루가 서른일곱 개 아닙니까?”
“서른여덟 개였을 텐데요?”
“하나는 저번 달에 폐점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달에 두 개를 더 열었습니다.”
“⋯⋯돌겠네.”
남궁도위는 흡사 탈곡이라도 된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퀭하게 푹 꺼진 눈이 지금 그가 겪고 있는 극심한 고초를 짐작케 했다.
사실 그는 남궁세가의 소가주였고, 재산 따위에는 별 관심 없이 무학만 익혀 왔다. 갑작스레 가주대리가 되어 남궁세가를 수습하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 가문의 재산이 어찌 굴러가는지 세세하게 알 턱이 없었다.
“그⋯⋯ 이건 제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소가주께서는⋯⋯.”
“아닙니다, 숙부님. 이것도 소가주의 임무입니다. 빠질 수는 없지요.”
“그럼 도움이라도 되시든가.”
“예?”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궁도위가 멍하니 남궁명을 보고 있는데, 돌연 귓가에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하하하. 고매하신 남궁세가는 가문의 재산이 얼만지도 파악 못 하시는 모양이로군.”
남궁도위가 이를 갈며 옆을 획 돌아보았다. 임소병이 부채를 얄밉게 파닥이며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쯧쯧. 가주라는 양반이 이리 무능해서야? 아니, 그래서 소가주인가? 하하, 이래서야 평생 소가주나 하시겠군.”
“이⋯⋯.”
남궁도위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아, 녹림은 강도질해서 먹고사는 문파답게 이미 파악이 다 끝나신 모양입니다? 그러니 이리 남의 문파에 기웃대는 것이겠죠?”
“후후. 나를 뭘로 보는 거요? 녹채의 재산은 좁쌀 한 톨까지 모조리 파악하고 있지! 이미 장부 작성은 끝냈소.”
“⋯⋯대단하시네.”
비꼬고 싶은 마음은 충만했지만, 다 끝냈다는 말 앞에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녹채에는 천하에 퍼진 칠십이 채에서 벌어들인 곡식이 이 시간에도 모이고 있다. 그 많은 재산을 실시간으로 파악한다는 건 능력이 웬만큼 대단해서는 불가능하다.
“⋯⋯사기 치는 것 아닙니까?”
“하하하. 전형적인 우자(愚者)의 행태로군요. 타인의 비범함을 이해하지 못하니 비웃는 점이 딱 그렇습니다. 이리 신뢰가 없어서야.”
“으⋯⋯.”
“제가 보기에 아무래도 소가주께서는 좀 더 노력하셔야겠습니다. 쯧쯧.”
성질이 뻗친 남궁도위가 이를 갈아붙이는 그때, 옆을 지나가던 당군악이 툭 말을 던졌다.
“녹림은 그럴 수밖에 없지. 녹채를 지키는 놈들도 다 산적에 강도인데, 파악을 못 하면 쌀 한 톨도 남지 않고 모조리 사라질 테니.”
임소병이 입을 꾹 닫았다. 흡사 꿀 먹은 벙어리 같았다. 남궁도위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아아, 어쩐지. 이제 이해가 가는군. 거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남궁도위가 히죽 웃자 임소병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이번엔 화살이 애먼 당가에게로 돌아갔다.
“아, 그래요? 그럼 그리 서로 굳건하게 믿으시는 당가는 당연히 장부 작성을 끝내셨겠죠?”
“그렇네.”
“엥? 벌써?”
당군악이 빙긋 웃었다.
“사천에 있는 재산들은 싸그리 불타거나 약탈당하지 않았나. 적을 게 그리 많지 않네.”
“⋯⋯죄송합니다.”
“⋯⋯힘내십시오.”
임소병과 남궁도위가 동시에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당군악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도 다행이로군.’
청명은 대수롭지 않게 지시했지만, 사실 이는 생각보다 민감한 문제다. 한 문파가 가진 재산 내역을 고스란히 공개한다는 건, 어떤 문파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래서 아무리 이곳이 천우맹이고, 서로 굳건히 신뢰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눈치를 보며 숨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모두 적극적으로 문파의 재산을 까발리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믿음⋯⋯.
“하핫? 고작 그정도요, 남궁세가? 소문보다 대단치 않은데?”
“이건 우리 재산의 삼 할에 불과합니다!”
“우리도 아직 녹채를 제외한 산채들의 재산을 기입하지 않았는데?”
“하! 그래 봐야 산적 소굴인데, 있어 봐야 얼마나 있다고.”
“이 인간이 지금 산적 무시하나? 니들이 돈이 그렇게 많아? 내가 이건 공개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리가 안휘에 가지고 있는 사업장도 있거든? 안휘에서 제일 잘나가는 도박장이 우리 거라 이 말이지!”
“뭐? 그럼 그 도박장이 당신들 거였소? 무당 건 줄 알았는데! 이 미친 사파 놈들이 안휘 한복판에 도박장을 열어? 죽고 싶어?”
어⋯⋯.
⋯⋯어쨌든 솔직하면 된 거지.
한편 현영 역시 장부 작성 때문에 백상을 타박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던 청명이 피식 웃었다.
화산이야 화음에 도착하고 장부를 꺼내 와도 될 텐데, 현영 장로도 이런 면에서 참 철저했다. 하기야 그러니 청명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가해 보이시네요?”
“나 말인가? 자네도 알다시피 야수궁은 재산이랄 게 별로 없거든.”
“그래도 차 무역으로 돈 좀 만지셨잖아요.”
“자네는 내가 그걸 관리할 거라고 생각하나?”
맹소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언제 보아도 기괴하면서도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청명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닐 것 같네요.”
“그렇지. 아랫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흐음, 모르겠군. 과연 내가 재산이 있다고 해도 그걸 여기까지 가져올 수나 있을는지.”
“끙.”
청명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러다 맹소의 안색을 슬쩍 살피더니 그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괜찮으세요?”
“뭐가 말인가?”
“야수궁요. 놈들이 점창으로 갔는데.”
아무래도 청명으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사패련이 몰려간 운남의 끄트머리에는 야수궁도 있다. 상황이 상황이라 다들 입에 올리지 않을 뿐이지, 놈들이 야수궁마저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자네들도 보지 않았는가?”
“그렇긴 한데⋯⋯.”
그럼에도 청명이 적극적으로 남만야수궁을 돕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야수궁 뒤로는 드넓은 밀림이 펼쳐져 있네. 놈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 밀림 안에서 사람들을 추적하는 건 어렵네. 달아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달아날 수 있지.”
청명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마교 놈들이 쳐들어올 때, 걱정하지 않았겠죠.”
“상황이 다르네.”
맹소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교는 반드시 우리를 죽여 없앨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사패련 놈들은 다르지 않나. 전력도 안 되는 이들을 굳이 죽여 없애기 위해 그 험한 밀림을 돌파할 이유가 없지. 자네처럼 막무가내도 아니고.”
“⋯⋯지금 저 욕하신 건가요?”
“그렇게 들렸나? 껄껄.”
맹소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웃어 대더니 청명의 등을 팡 후려쳤다.
“아악!”
“어?”
고꾸라져 버린 청명을 보며 맹소가 혀를 찼다.
“쯧쯧. 자네 몸이 많이 약해진 모양이로군. 겨우 이 정도로 비틀거리고.”
“⋯⋯제발 자기 힘을 고려 좀 하시면 안 될까요.”
“살살 때렸는데.”
“⋯⋯세게 쳤으면 염라대왕 만났겠네?”
청명이 구시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맹소가 빙그레 웃었다.
“여하튼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우리 궁도들이 그리 멍청하지 않아. 점창이 공격당해 불타는 꼴을 보면서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죽어도 할 말 없는 거지.”
“너무 차가우시네.”
“그게 당연한 걸세. 자네가 과히 걱정이 많은 거지.”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시니 고맙네요.”
“자네 마음 편하게 하자고 하는 말이 아닐세. 내 직접 겪어 보니 저 패군이란 자가 보통이 아니더군.”
“⋯⋯.”
“저자를 지금 막지 못한다면 결국 야수궁도 놈들에게 짓밟힐 수밖에 없네. 당장의 위기를 피하자고 더 큰 위기를 자초할 수는 없지.”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소는 생각이 많은 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야수궁에 큰 피해는 없을거라 여겨도 좋다.
“여하튼 상황이 이리되어서 괜히 민망하군. 돈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건 우리와 해남밖에 없는 것 같은데⋯⋯.”
“네? 해남이요?”
“음? 아아⋯⋯. 그러고 보니 제대로 전달을 못 했군.”
“그럴 만도 하죠. 합류하자마자 당가주님이 일을 벌였으니까요. 해남이 여길 오기로 한 거예요?”
“그렇다네.”
“그럼 왜 바로 안 오고요?”
그 말에 맹소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장문인의 장례를 치르고 온다더군.”
“아⋯⋯.”
청명의 안색이 일순 어두워졌다. 결국 그리된 모양이었다.
“언제 돌아가셨어요?”
“대단한 사람이더군. 장강을 넘을 때까지 기어이 버텨 냈지.”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들의 안전이 확보된 순간 가까스로 쥐고 있던 실이 끊어진 모양이다.
“그랬군요.”
청명이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단한 인연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강남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그가 보여 준 모습은, 존중을 보내기에 모자람 없었다.
“아무래도 목적지가 불분명하다 보니, 장강 근처에 가묘를 만들고 사흘간 장례를 치른다 했네.”
“가묘요?”
“언젠가는 해남으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이겠지.”
돌아가겠다는 다짐. 청명은 그 말을 속으로 되뇌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럴 것이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청명을 슬쩍 내려다본 맹소가 물었다.
“부담을 느끼는가?”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만⋯⋯.”
청명이 눈을 뜨고 피식 웃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여전히 저는 사람들 말을 듣는 게 우선이라 생각해요. 저는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맹소가 가만히 청명을 응시했다.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하지만 또 이리되고 보니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든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답답했던 모양이군.”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응?”
“갚아 줘야 하거든요.”
순간 맹소가 입을 꾹 다물었다. 청명의 두 눈에 시린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차가운 눈빛은 남쪽으로 고정되었다.
사천. 패군 장일소가 있을 곳이다.
“누군가를 쓰러뜨려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어요.”
“으음.”
“하지만 지금처럼 누군가를 반드시, 기필코 죽여 없애야 한다고 여긴 건 이게 두 번째네요.”
“⋯⋯첫번째는 어찌 되었는가?”
“죽었죠. 아니, 죽였었어요.”
맹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다. 죽였었다니. 하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청명이 흘리는 한기 때문에 되물을 엄두도 나질 않았다.
청명의 눈앞엔 한 사내의 모습이 그려졌다. 조소가 걸린 새빨간 입술을 떠올린 순간, 청명의 입꼬리 역시 뒤틀리듯 올라갔다.
“그러니까 알게 해 줘야죠.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청명의 허리춤에서 암향매화검이 긴 검명을 토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