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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52화 (1,453/1,567)

1452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2)

청명이 히죽히죽 웃어 대는 이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내가⋯⋯. 아니, 그⋯⋯ 제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원래 이런 자리를 이렇게 노름꾼 야바위하듯이 얼렁뚱땅 넘기는 건가요? 원래 그래요?”

당군악이 슬쩍 다른 문주들을 보더니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라고 알겠는가? 우리도 해 본 적이 없는데.”

“그렇지.”

“사실 저는 다른 문파랑 이런 이야길 하는 게 처음이에요.”

“⋯⋯전 가주가 된 지 얼마 안 돼서.”

순간 아득해진 청명이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긴 글렀어.’

일이 늘어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아니, 그것도 중요하지. 중요하긴 한데⋯⋯.

“나보고 총사를 하라고?”

“자네 감투 좋아하지 않는가?”

감투야 당연히 좋아하지! 그런데 이건 선 넘었지!

“아니⋯⋯!”

“그만.”

“⋯⋯엥?”

청명이 다시 발작하려는데 맹소가 그의 말을 딱 끊어 버렸다.

“왜 이런 논쟁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거 아닌가? 명령권을 일통하게 되면 반드시 손해 보는 곳이 생겨난다.”

“그렇죠!”

“그럼 서로 간에 갈등이 생겨 반목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천우맹은 서로의 급을 나누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서 합의해 왔다. 책임조차 나누기 위해서!”

“예!”

“그러니 모두가 함께 의견을 모아 만든 결정을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 그렇지?”

“⋯⋯어?”

순간 당황한 청명이 덜커덕 굳었다. 이다음에 나올 말을 알아 버린 것이다.

“그 논리대로라면 자네가 총사에 올라야지. 우리 모두가 합의해 결정한 일이니까. 설마 사내가 제 입으로 한 말을 뒤집을 셈인가?”

“끄으⋯⋯.”

청명이 제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숨이 턱 막힌다는 듯이.

“모든 문주들이 협의해 정한 일을 일개 문파의 제자가 거부한다면, 이 연맹이라는 건 존속할 이유가 없지.”

모두가 감탄한 얼굴로 맹소를 바라보았다. 청명이 맹소더러 생긴 건 곰인데 속에는 여우가 들어앉아 있다고 평한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거 따져 보면 화산에서도 같은 결정을 내린 셈인데, 자네 혹시 장문인의 명을 거역하는 건가? 쯧쯧. 이 많은 이들 앞에서 장문인의 명을 대놓고 거역하다니, 장문인의 면이 말이 아니겠어.”

“예?”

갑자기 구석에 내몰린 청명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며 운암을 돌아보았다. 운암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니, 저는 그런 게 아니⋯⋯.”

“괜찮습니다. 야수궁주께서는 저를 너무 가엾게 여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엾게? 저기요, 장문인?

“아직 저는 장문인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사실 무력도 보잘것없으니 제자가 저를 신뢰하지 못하더라도 받아들여야겠지요.”

“저런⋯⋯.”

“어휴⋯⋯.”

“너무하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동정에도 운암은 여전히 그린 듯이 푸근한 미소만 흘렸다.

하지만 그의 뒤에서는 살벌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운암의 뒤에 선 운검과 현영, 현상이 지금 당장이라도 청명을 갈아 마실 듯이 살기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핏발이 선 운검의 눈을 보고 있으니 천하의 청명조차 몸이 쪼그라들 정도였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게⋯⋯.”

그 순간 임소병이 부채를 쫙 펼치며 낄낄 웃었다.

“하하. 원래 화산이 위아래가 없는 문파 아닙니까? 하하하핫!”

청명이 입을 쩍 벌리고 임소병을 돌아보았다.

“저, 저 사파 새끼가⋯⋯.”

“이크. 무서워라. 백천 도장, 살려 주십시오! 아⋯⋯. 장문인 말도 무시하시는데, 장문대리 정도로는 안 되려나?”

으드득.

백천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주위에 선 오검도 하나같이 청명을 갈아 마실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저 근본도 없는 새끼!”

“매화동에 처박아야 해.”

“정수리에 칼을 박아 버려야 돼요!”

“죽여, 그냥.”

청명이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남궁도위였다.

“도장. 도장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응?”

“도장께서는 항상 우리를 위하시지만, 거꾸로 우리를 얕잡아 보기도 하십니다.”

“그게 갑자기 뭔 소리야⋯⋯. 아니, 뭔 소립니까, 소가주?”

“왜 우리가 내린 결정이 먼 곳을 내다보지 못한 단견이라 여기십니까?”

순간 청명이 할 말을 잃었다. 남궁도위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도장께서 고민하시는 바는 우리도 이미 충분히 고민했습니다. 천우맹의 색을 유지하고, 그들 간에 위계를 나누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요. 하지만 닥쳐오는 위기에 대응해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더 살리는 것 역시 중요한 일입니다.”

그 둘을 모두 챙기기는 어렵다. 특히 이런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기에 우리는 그 역할을 도장께 맡기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아니요, 도장. 도장이 대단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

“꼭 누군가의 명을 따르다 죽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면.”

남궁도위가 청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남궁은 그 명을 내리는 이가 도장이길 원합니다.”

그 말에 모든 문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청명이 가장 옳은 결정만을 내릴 거라 여기진 않는다. 청명 역시 사람이다. 실수도 하고, 오판도 저지를 것이다.

하지만 그 오판에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명을 내린 게 청명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제가 믿는 것은 도장이 아닙니다. 지금껏 도장이 걸어온 길입니다.”

“⋯⋯.”

“부탁드립니다.”

다른 문주들의 시선 역시 흔들림 없이 청명에게로 올곧게 쏟아졌다.

“으⋯⋯.”

여기까지 와 버리면 정말 달아날 곳이 없다. 아니, 애초에 달아날 길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청명이 마지막으로 당군악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당군악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가문이 공격당하고 이곳까지 오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네. 그 깊은 고민 중에 내가 부여잡은 것은 오직 한 가지였네.”

“⋯⋯그게 뭔데요?”

“실수로부터 배우는 게 없는 이는 되지 말자.”

당군악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면 해남행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너무 많은 실수와 오판을 저질렀네. 그렇기에 상황이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 그런데 또 다음에는 잘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변화를 회피할 수는 없네. 나는 적어도 사천당가가, 그리고 천우맹이 내일은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원하네.”

“⋯⋯.”

“총사가 되게, 화산검협. 그리고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 보게. 더는 누구도 자네의 발목을 잡지 않을 걸세.”

당군악의 눈엔 뚜렷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청명은 화산의 검이 되길 원한다.

하지만 세상은 더 이상 그를 일개 검으로 내버려 둘 수 없다.

당군악 역시 보고 싶었다. 누군가의 손에 잡혀 휘둘리는 검이길 자처하던 청명이 스스로 그 검의 주인이 될 때, 과연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한참을 고민하던 청명이 골치가 아픈 모양으로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얼마나 세차게 긁어 대고 쥐어뜯었는지 높게 묶은 그의 머리가 봉두난발이 될 정도였다.

“하⋯⋯. 인생.”

뭐 하나 쉽게 가는 법이 없다.

청명의 눈이 하늘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하늘은 무심할 만큼 푸르렀다.

“알았어요. 하면 되지! 그거 뭐 별거라고!”

당군악의 만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오, 그래. 잘 생각했⋯⋯.”

“다들 그렇게까지 내 명령을 받고 싶으시다는데! 이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죠. 뭐 어쩌겠어요?”

“⋯⋯.”

“근데요.”

청명이 슬쩍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당군악은 보았다. 지금껏 오만상을 쓰고 있던 청명의 얼굴이 풀리며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이상하게도 불길한 웃음이었다.

“나는 분명 거절했어요. 그런데도 굳이 나를 이 자리에 앉힌 건 여러분들이에요. 이거 잊지 마세요.”

“⋯⋯으응?”

“그러니까,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들은 내 책임 아니에요. 나는 여러분 의견대로 하는 거니까. 그렇죠?”

잠깐 정적이 흘렀다. 살짝 떨어진 곳에서 그 말을 들은 오검이 저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뭐가 좀 잘못된 것 같지 않습니까, 사숙?”

“좀? 이걸 좀이라고 할 수 있느냐?”

“걸아⋯⋯. 사실 나는 중간부터 뭔가 이건 아니다 싶더라.”

“그죠, 사형? 솔직히 저 새끼한테 감투 씌워 주면 무슨 일 벌어질지 뻔하잖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

윤종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그걸 우리만 아네, 우리만⋯⋯.”

“⋯⋯이래서 정보가 중요한 거구나. 애도를 표합니다.”

오검이 쑥덕거리자 당군악의 얼굴에 드러난 불안이 조금 더 짙어졌다. 청명이 웃으며 말했다.

“구파고 사패련이고 나발이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다 뒤집어엎어 버리면 된다는 거죠?”

“아, 아니, 화산검협. 내 말은⋯⋯.”

“총사.”

“⋯⋯응?”

“총사라고 부르셔야죠, 총사!”

“초, 총⋯⋯사.”

“그렇지.”

청명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여러분들이 정 그걸 원하신다면 저도 최선을 다해 볼게요. 이렇게까지 밀어주시는데 제가 뭘 어쩌겠어요? 그 기대에 힘껏 부응해야지.”

문주들의 시선이 다급하게 서로를 찾았다.

이게 다 그들이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천하에서 가장 청명을 인정했던 청문이 어째서 끝끝내 그에게 감투 하나 넘기지 않았는지. 화산의 장로씩이나 되었던 이가 어째서 그 흔한 각주 자리 하나 얻지 못했는지. 마교가 쳐들어오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어째서 청명이 수하 하나 없이 단독으로 움직였는지.

“그, 뭐 일단⋯⋯.”

청명이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정식으로 임명식을 한 건 아니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은 아니고. 그래도 일단 총사 자리에 올랐으니 할 일은 해야죠.”

“⋯⋯여기서 말인가?”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간단한 거니까. 제가 뭐 이런 상황에 대단한 걸 바라겠어요?”

“그, 그렇지?”

불안함으로 칙칙해졌던 문주들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사천을 빠져나와 섬서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길 위다. 이곳에서 뭔가를 하기는 상황이 받쳐 주질 않았다.

“어이, 사형!”

“왜?”조걸이 고개를 쏙 뺐다.“

가서 빈 책자 좀 구해 와. 묵필이랑.”

“그걸 어디서 구해?”

“아, 알아서 구해!”

“⋯⋯에이, 씨⋯⋯.”

조걸이 구시렁대며 사라졌다. 당군악이 불안한 눈길로 청명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필묵은 왜?”

“아아. 뭐, 별거 아니에요. 화음으로 가면서도 장부 정도는 쓸 수 있으시잖아요.”

“⋯⋯장부?”

“예.”

청명이 흐뭇하게 웃었다.

“가는 길에 각 문파가 보유한 재산 내역을 간단하게 써서 주시면 돼요.”

“⋯⋯간단하게?”

“예, 간단하게.”

“그 ‘간단하게’라 함은 대체 어느 정도⋯⋯?”

“에이. 뭘 그런 뻔한 걸 묻고 그래요. 우리 사이에 뭐가 그리 철저하겠어요? 그냥 대충이지.”

“그렇지?”

“곡식 한 톨이라도 숨기면 손모가지 날아갑니다.”

⋯⋯갑작스레 쏟아진 한기에 문주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했으면 모르되,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청명이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작한 이상, 철저하게 끝장을 내 드릴 테니까.”

당군악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 끝장 나는 게 우리가 될 것 같은데.’

잘한 거겠지? 하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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