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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51화 (1,452/1,567)

1451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1)

한참 말없이 당군악을 바라보던 청명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러나 아직 할 말을 정리하지 못한 것인지, 그 입은 이내 도로 닫히고 말았다.

청명이 당군악의 진의를 살피려는 듯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봤지만, 당군악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으로 그런 청명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아니, 그⋯⋯.”

청명이 제 뒷머리를 세차게 긁었다.

“부맹주 자리를 없애고, 총사 자리를 신설하면⋯⋯.”

“지금 부맹주가 가진 권한을 모두 총사가 가지게 되겠지. 명목상으로는 천우맹의 이인자가 될 걸세. 그렇게 되면 나 역시 자네의 명을 따르는 입장이 될 테고.”

청명이 눈을 끔뻑였다.

“그걸 아시는 분이.”

“하지만 그건 명목상일 뿐이네.”

“아?”

청명이 솔깃한 얼굴을 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과한⋯⋯.

“총사 위에 맹주님이 계시긴 하지만, 판단은 총사가 내리게 될 걸세. 그러니 실질적으로는 총사가 천우맹의 실권자가 될 것이네.”

“⋯⋯.”

“바로 자네, 화산검협이 말일세.”

청명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

다시 한번 머리를 벅벅 긁어 댄 청명이 당군악을 달래듯 말한다.

“지금 심정은 알겠지만, 그리 급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우선은 조금 진정하시고⋯⋯.”

“내가 지금 흥분한 것으로 보이나?”

“⋯⋯아니요.”

흥분은커녕 과하게 냉정해 보인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결론이네. 그러니 누가 반대하든 이 일은 이뤄질 걸세.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까.”

청명이 격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평소라면 이럴 때 지원을 해 줬을 오검이나, 아직 청명에게는 그런 역할을 맡길 수 없다고 나서 줘야 할 현종은 이 자리에 없다.

‘이래서 끌고 왔구나.’

도망갈 길을 완전히 차단당한 청명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가주님의 의견은 이해했습니다만⋯⋯ 일단 다른 문파들과도 말을 나눠 봐야 하니까.”

“화산검협.”

당군악이 절대 이대로 청명을 보내 주지 않겠다는 듯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총사의 자리에 오르게.”

청명이 대답할 말을 필사적으로 찾는 사이, 당군악이 고개를 돌려 당가의 가솔들을 바라본다.

“어제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네. 다만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당가의 미래에 대한 건 아니었지. 그건 되레 쉽게 결론이 났다네. 나를 괴롭힌 건, 어째서 우리가 이런 상황에까지 몰렸는가였네.”

“⋯⋯.”

“적어도 내가 본 자네의 심계는 장일소에 뒤지지 않네. 아니, 나는 자네는 그 이상을 볼 수 있는 이라고 생각하네. 이 차이를 만든 것은 하나겠지. 장일소는 수족을 다루는 이, 수족이 되지 못하는 건 무엇이든 잘라 내는 이네. 하지만 자네는 다르지. 자네는 오히려 스스로의 역할을 수족으로 한정하는 이네.”

청명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 한계 안에서는 제대로 싸울 수 없네. 이번 해남의 일도 마찬가지일세. 자네가 다른 문파들의 사정을 일일이 고려하지 않고, 천우맹의 모든 힘을 동원할 수 있었다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겠지.”

“생각이 너무 과해요.”

“거꾸로 말하자면, 지금 당가의 모든 고난은 그 길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네를 적극적으로 그 자리에 올리지 못한 내가 자처한 결과일세.”

당군악의 눈이 가라앉는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꿔야겠지.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아니. 저는⋯⋯.”

“자네도 조금 전에 동의하지 않았는가? 천우맹에는 제대로 된 머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거야 당군악 그쪽이 할 줄 알았으니까⋯⋯.

청명이 결국 한숨을 푹 내쉰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는데⋯⋯. 고려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일단 천우맹의 수뇌를 화산이 독점하는 문제도 있고, 지금까지 평등했던 문파들이 수직적인 관계가 되며 생기는 문제도 있고, 천우맹의 색이 흐려지는⋯⋯.”

청명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자, 당군악의 눈이 가늘어진다.

“자네 지금 내 말을 오해하고 있군. 내가 지금 자네를 설득하는 것으로 들리는가?”

“예?”

“연맹에서 총사 같은 직위를 신설하는 방식은 단 하나뿐이네. 추대. 연맹에 가입한 문파들이 추대하는 것일세.”

“⋯⋯예?”

“그러니 자네의 의견 같은 건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건 연맹의 맹도들이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오르는 걸 인정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뿐.”

“⋯⋯예에?”

“그리고 마침 저기 오는군. 그 결정을 내려야 할 이들이.”

청명이 멍한 눈으로 당군악의 시선이 닿은 곳을 바라본다. 멀리서 일련의 무리가 그들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남경에서 헤어진 천우맹의 다른 문파들이.

“⋯⋯어?”

청명이 동그랗게 떴던 눈을 끔뻑거렸다.

“하여.”

당군악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저 당군악은 사천당가의 가주이자, 천우맹의 한 맹도로서 화산의 제자 화산검협 청명을 천우맹의 총사로 추대하는 바이오.”

사천을 벗어나 섬서에 접어든 들판.

저 먼 남경에서 이곳까지 달려오기 무섭게 천우맹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안건을 처리하게 된 문주들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서 있는 청명을 신중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흐음.”

“흐음.”

야수궁주 맹소가 그 큰 눈을 찌푸렸다. 갑작스레 이런 말이 나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섬서에 천우맹의 본단을 만들고, 모든 문파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그들에 대한 지휘를 새로이 신설한 총사 자리에 앉은 화산검협에게 일임한다?”

하나하나가 각 문파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결정들이었다. 맹소의 눈이 조금 더 뒤틀린다. 그 표정을 보며 청명이 내심 쾌재를 부르는 순간, 맹소가 입을 열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딱히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역시 그렇⋯⋯. 예?”

청명이 부릅뜬 눈을 끔뻑였지만, 맹소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따름이다.

“좋은 생각 같군.”

왜요? 왜 그게 좋은 생각이죠?

남만에 있으셔야 할 분이 중원 물을 오래 드시더니 맛이 가 버리셨나?

곧이어 남궁도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조했다.

“총사 자리를 신설하고 그 자리에 청명 도장이 오르는 거라면, 저희 남궁세가는 불만이 없습니다. 그리고 섬서로 가는 것도 찬성입니다. 안 그래도 안휘는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리 생각 안 하실 텐데?”

“이제 가주는 접니다.”

“와⋯⋯.”

저런 패륜아 새끼 저⋯⋯.

청명이 격하게 반발하려는 순간, 설소백이 손을 번쩍 들었다.

“빙궁도 찬성입니다.”

“⋯⋯.”

쟤는 어차피 말이 통할 거라 생각도 안 했다.

그러니 이제 남은 희망은 하나뿐이었다.

“흐음. 총사라⋯⋯.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청명의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받은 임소병이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부채를 쫙 펴 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지금껏 비슷한 논의가 몇 번 있었음에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이유가 뭔지 알고 계시지요, 당가주님?”

“물론이네.”

당군악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듯 부연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당가의 가주인 내가 화산의 일개 제자에 불과한 이의 명을 따라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겠지. 부탁이 아니라 명령 말일세. 그리고 나는 그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명이라도 반드시 이행해야 하고.”

“아시는군요.”

“그 정도 각오는 했네.”

“정말 각오하신 겁니까?”

당군악이 단호한 눈으로 임소병과 시선을 부딪쳤다.

“그렇네.”

그 눈빛에 임소병이 침음성을 흘렸다.

당군악은 사천당가의 가주다. 강호에서 가지는 위상도, 가문 내의 입지도, 심지어는 연배마저도 청명의 명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기엔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 당군악은 그 각오를 굳혔다고 말하고 있었다.

“설사 총사가 내게 가솔들을 이끌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라고 해도, 나는 그리할 것이네. 그게 옳을 거라 믿으니까.”

“끄응⋯⋯.”

임소병이 부채를 접어 부채 끝으로 제가 쓴 관 아래를 벅벅 문질러 댔다.

“쯧. 분위기가 이리되면 사파 놈들만 다른 말을 한단 소리를 들을 수는 없잖습니까. 안 그래도 따돌림받는 처지에.”

“따돌린 적 없네.”

“어쨌거나 녹림도 찬성입니다. 뭐, 어차피 저 양반이 마음먹으면 감투 없다고 산적 놈들 모가지 못 따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찜 쪄 드시든지, 구워 드시든지.”

임소병이 항복이라는 듯 양팔을 들어 올렸고, 그렇게 청명의 마지막 희망은 철저히 박살 나 버렸다.

이 자리에 없는 유령문의 문주를 제외한 모두가 동의했다. 그렇다면 이제 뜻을 정하지 않은 이는 오직 한 사람뿐. 당군악이 시선을 돌려 마지막 남은 이를 바라본다.

“으음. 가주님, 무슨 말씀이신지는⋯⋯.”

현종이 온 얼굴로 난색을 표한다. 그만은 이 의견이 그리 달갑지 않다는 듯이. 하지만 당군악은 슬쩍 그를 바라보고는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맹주님께서는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예?”

“지금 저희는 각 문파 문주들의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한데 맹주님께서는 현재 화산의 문주가 아니시잖습니까.”

현종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당군악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그가 미묘하게 빗겨나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현종의 눈에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장문인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음.”

모두의 시선을 받은 화산 장문인 운암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이내 확고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태상장문인이셨다면 분명 화산의 일개 제자가 그런 막중한 임무를 맡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저 역시 태상장문인의 가르침을 받은 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현종이 반색했고, 당군악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건⋯⋯.”

“그러나.”

당군악이 무어라 반박하려는 찰나, 운암이 재빨리 말을 보탰다.

“저는 태상장문인과는 조금 다릅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굳이 감투를 주시겠다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뭐, 뭐라?”

현종이 화들짝 놀라 운암을 바라보았지만, 운암이 슬쩍 현종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여하튼 그⋯⋯ 화산의 현 장.문.인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운암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난다.

“저는 찬성입니다.”

⋯⋯현종이 입을 쩍 벌리고 운암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 말에 딴지를 걸 수는 없다. 태상장문인은 배분으로는 장문인보다 높은 이지만, 직위로는 결코 장문인의 위가 아니다.

그 자리를 물려준 이상 장문인의 권한은 온전히 운암에게 있는 것이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

“거, 조용히 하십시오. 뒷방에 물러난 양반이!”

“장문인 체면이 있는데! 어디 장문인도 아닌 양반이!”

“⋯⋯.”

현영과 현상, 화산의 두 장로에게 무안을 당한 현종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그럼 모든 문파가 찬성했군요.”

당군악이 당연하다는 듯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사람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정쩡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을.

“알겠는가? 그러니 이제부터 자네가 천우맹의 총사일세.”

당군악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총사.”

⋯⋯청명의 눈 아래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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