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0화.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다. (5)
“뜻⋯⋯대로 하십시오.”
결국 현종이 쌍수를 들고 말았다. 사실 반대할 명분이 없다. 일단 설득해 보고 안 되면 말겠다는 이를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감사합니다, 맹주님.”
그렇게 현종의 허락을 강탈(?)해 낸 당군악이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청명이 물었다.
“그럼 당가는 이제 완전히 섬서로 터전을 옮기시는 거예요?”
당군악이 슬쩍 청명을 보고는 답했다.
“그런 건 아닐세. 돌아가야겠지, 언젠가는.”
“엥? 그럼 잠깐 머물 곳을 치장하는 데 그 많은 돈을 쓰시겠다는 거예요? 과하게 화통하신데?”
그 말에 당군악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나라고 돈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닐세. 그리고⋯⋯.”
당군악이 슬쩍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가솔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이 섬서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사천이라는 두 글자를 완전히 지워 내는 게 낫다는 것도 아네.”
“그런데 왜요?”
“우리가 사패련을 몰아내고 나면 사천은 완전히 무주공산이 될 걸세.”
“⋯⋯.”
“누군가가 수습은 해야겠지.”
당군악의 눈에 묘한 아픔이 스쳤다. 그 눈빛을 본 청명은 당군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듣지 않고도 알았다.
대를 이어 당가에 봉사해 온 이들, 장강에서 이주시킨 유민들, 너무 다급하여 미처 돌보지 못하고 온 이들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럴 생각이시면⋯⋯.”
“오해하지 말게. 뒷일을 미리 걱정하는 건 아니니까. 그저⋯⋯.”
당군악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저 사패련을 상대하는 데 더는 미적지근한 방법을 쓸 때가 아니라 생각했을 뿐이네. 무엇이든 확실한 것이 좋겠지.”
“으음.”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당군악이 아니라면 누구도 시작할 수 없다. 당군악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성미에도 맞지 않는 연극을 하며 현종을 몰아붙인 것이다.
“사실 저도 당가는 사천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고 봐요. 그게 언제든요.”
“어째서인가?”
“섬서당가는 영 어감이 이상하잖아요. 사천당가가 낫지!”
할 말을 잃은 당군악을 보며 청명이 낄낄 웃었다. 그리고 내심 생각했다. 당군악이 당보보다 무력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결단력에서는 확실 나은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이 많지.’
당보 그 새끼는 거지새끼였으니까. 당가의 장로라는 놈이 제대로 돈도 못 뜯어내서 맨날⋯⋯.
아, 이건 남 말할 처지가 아니네. 그러게, 용돈 좀 더 주지. 쫌생이 같은 장문사형 놈이⋯⋯.
- 뭐 인마?
“크흠.”
크게 헛기침을 한 청명이 슬쩍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계획은 뭐예요?”
“아까 말했던 그대로네.”
“그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을 거예요. 천우맹 개파 당시에 지어 둔 숙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그래 봐야⋯⋯.”
“지금 건축에 대한 말을 하는 건가? 당가주인 나에게?”
이번엔 청명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자네는 한 번씩 보면 잔소리가 과한 게 아니라, 자신감이 과해. 때로는 주제 파악을 할 필요가 있네.”
“⋯⋯으. 그거 내가 동룡이한테 하던 말인데.”
당군악이 쿡쿡 웃어 댔지만, 청명은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천하에서 가장 숙련된 장인들을 보유한 곳이 당가다. 많은 이들이 당가의 공방을 그저 암기를 만드는 곳이라 여기지만, 당가의 장인들은 기관진식에도 일가견이 있는 다용도 잡부⋯⋯. 아니, 일꾼들이었다.
천우맹 개파 때도 당가의 그 실력을 보고 모두 입을 떡 벌리지 않았던가. 그들을 동원한다면 전각을 짓고 사람들을 수용하는 건 일도 아니다. 무인들조차 웬만한 목수보다는 낫다는 평을 듣는 곳이 당가니까.
“그럼 증축하실 거예요?”
“그럴 계획이네. 방어를 고려한다면 화산 정상께에 본단을 만드는 게 좋겠지만⋯⋯.”
“꿈같은 이야기네요.”
“그렇지. 꿈같은 이야기지. 지금 화산만 해도 구름 위에 전각 짓고 사는 변태 같은 놈들 소리를 듣는데.”
“뭐요? 어떤 새끼가 그딴 말을 하고 다녀! 누구야?”
“그리 틀린 말은 아니잖은가?”
“왜 틀린 말이 아니에요! 완전히 틀린 말이지. 애초에 화산이⋯⋯.”
“냉정하게 말해서 화산이 그 험준한 산꼭대기가 아니라 화음에만 문파를 열었어도 전성기에는 소림도 내려다봤을 걸세.”
“⋯⋯.”
“저번에 보니 전각을 증축할 곳도 없던데, 그 산꼭대기까지 입문하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지금 우리 선조들이 멍청했다는 거예요?”
“자네가 당가 조상들 보고 뭐라고 했더라?”
“끄으⋯⋯.”
청명이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인간이 이렇게 복수를 하네?
“여하튼 화산파가 있는 곳에 본단을 만드는 건 어렵네. 그러니 화음을 중심으로 만들어야겠지. 그곳에 문파들을 모두 모아 하나의 성을 구축할 걸세.”
“⋯⋯화음이 시끌벅적해지겠네.”
“그럴 걸세.”
거기까지 말한 당군악이 청명에게 넌지시 말했다.
“자네.”
“네?”
“둘이서만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엥?”
청명이 눈을 끔뻑이며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오검은 슬슬 거리를 벌리는 당군악과 청명을 지켜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걸까요?”
“뻔하죠, 사형. 앞으로 당가에 대한 지원을 부탁하는 것 아니실까요?”
“걸아⋯⋯.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생각이 없지는 않단다. 그런 걸 부탁하실 생각이었다면 청명이 놈이 아니라 태상장문인께 부탁드렸겠지.”
“어, 그런가?”
조걸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어? 알았다!”
“응? 뭘?”
모두의 시선 속에, 조걸이 의기양양하게 어깨에 힘을 주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당가에 제일 필요한 게 뭡니까?”
“독?”
“암기?”
“돈?”
“쯧쯧. 그런 게 아니죠. 당가가 영화를 되찾기 위해 필요한 건 강력한 힘입니다.”
“⋯⋯그래서?”
“이쯤 되니 가주님도 아쉬우신 거죠! 그러니까 예전에 실패했던 걸 다시 추진하시는 거죠! 아마 저놈을 다시 당가 여식이랑 혼인시켜서 빠져나갈 수 없는 덫⋯⋯. 꽤액!”
당소소가 전력으로 조걸의 뒤통수를 걷어찼다.
“그, 그러다 죽는다, 소소야!”
“제발 좀 죽어!”
평화가 일다경을 채 가지 않는 이들을 보며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새끼들은 대체 언제 철이 들는지⋯⋯.
그의 시선이 멀어진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긴히?”
“화음에 도착하면⋯⋯. 아니, 다른 문파들이 합류하면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서둘렀네.”
“음. 뭐 서두를 게 한둘은 아니기는 하지만, 지금 가주님이 저나 화산에 신경을 쓸 상황은 아니시지 않나요?”
“그렇기에 오히려 지금이어야 하네.”
“예?”
“우리가 사패련에 패배하면 다 끝일 테니까.”
청명이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군악을 무척 신뢰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당군악을 신뢰하는 거지, 전우로서의 당군악을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그저 당군악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청명은 함께 싸울 이로서는 천우맹에 속한 다른 문파를 조금도 믿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위기감이 없으니까.’
평화의 시대를 살아온 이들은 언제고 내 목에 칼이 들어올 수 있단 사실에 대한 공포가 부족하다. 그러니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머뭇대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청명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당군악만은 그 부족하던 위기감을 채워 냈음을. 그렇기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당군악을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뭔데요?”
“우리는 사패련에 패할 만한 곳이 아니네.”
“⋯⋯예?”
“아무리 장일소가 계략에 능하다고는 하나, 천우맹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구파의 지원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겨우 사파 따위에게 이리 당하지는 않았을 걸세.”
“⋯⋯신나게 얻어맞은 분이 하실 말씀인가요?”
당군악이 살짝 눈을 찌푸리며 흘기자 청명이 겸연쩍게 고개를 돌렸다.
“때와 장소를⋯⋯.”
“아아, 잘못했다고요! 잘못했어!”
“흠.”
당군악이 헛기침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패한 이유는 하나일세. 서로 돕겠다는 마음만 있을 뿐 체계가 없다는 거지. 사패련은 장일소가 결정을 내리면 그게 옳든 그르든 목숨을 걸고 명을 따르네. 그게 사패련이 가진 힘의 비결이지.”
“⋯⋯.”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를 정하기 위해서도 모두가 의견을 나누고 그 의견을 바탕으로 옳고 그름을 가르고, 그 대화 속에서 따를 이들과 따르지 않을 이들을 구분해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네.”
청명이 굳은 얼굴로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이런 식의 연맹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리 없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조금 전에 대화를 통해서 새 길을 여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물론 이 방식에도 장점은 있지. 필요할 때도 있네. 하지만⋯⋯ 자네는 정말 전시에도 그 방식을 고수하는 게 옳다고 믿는가?”
청명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그는 봤으니까. 오합지졸인 수뇌부와 수십의 머리가 난립하는 연합체가 전장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딱히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청문이 참다못해 전면에 나서 모두를 조율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마교에 제대로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이번 일을 통해 확실하게 알았네. 천우맹은 바뀌어야 하네. 서로 신뢰는 올곧게 가져야 하겠지만⋯⋯ 머리가 여럿인 이 상황은 바꿔야지. 옳든, 그르든 일단 내려진 명이라면 철저하게 따라야 하네.”
“사패련처럼요?”
“인정하긴 싫지만⋯⋯ 그래야겠지.”
청명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해는 했어요. 맹주님이 그 역할을 하시는 게 어렵다는 거죠?”
“그렇네. 그분은 맹주에 부족한 분은 아니지만, 의견이 갈렸을 때 누군가를 몰아붙일 수 있는 분 역시 아니시네. 그리고 아군의 희생을 이 악물고 감수할 수 있는 분도 아니시지.”
“이제는 많이 바뀌셨어요.”
“⋯⋯무너질 걸세. 애초에 그리 강건한 분이 아니니까.”
“음.”
청명이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알겠어요. 그러니 결국 천우맹은 제대로 된 머리가 필요하고, 다른 머리들을 그 머리 아래에 복속시켜야 한다는 거죠?”
“그렇네.”
“⋯⋯어쩐지.”
반쯤 망한 당가가 남은 것도 모조리 내어놓겠다고 할 때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런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알겠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그 역할을 당가가 할 수 있다는 거죠?”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당군악이 말없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렇게만 된다면 무력이 약해지더라도 명성만은 과거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명성을 바탕으로 당가의 부흥을 노리는 건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그런데 뭐 그런 걸 저한테 부탁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에 적임자가 당가주님 말고 딱히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적극적으로 밀어드릴 테니까, 잘해 주세요.”
당군악의 부맹주 자리를 아예 공식화하고 권력을 몰아 준다면 확실히 천우맹도 체계가 잡힐 것이다. 물론 지금과는 조금 결이 달라지겠지만, 이런 상황이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애초에 모두가 서로를 돕기 위해 만든 곳이다. 최선을 찾아 변하는 것이 당연하겠지.
하지만 당군악의 반응은 청명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내 말을 이해 못 했군, 화산검협.”
“예?”
“나는 적임자가 아니네. 천우맹에 소속된 이들은 내게 아무런 빚이 없네. 그들이 내 말을 들을 이유가 없어. 나는 오히려 부맹주의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네.”
“예? 아니, 그게 무슨⋯⋯.”
“자네, 이제는 뒤에서 궂은일 하는 걸 그만둘 때가 됐네.”
당군악이 단호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천우맹에 총사 자리를 정식으로 신설하고 그에 오르게. 당가가 전력을 다해 자네를 지원하겠네.”
뭐에라도 맞은 듯, 청명의 얼굴이 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