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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49화 (1,450/1,567)

1449화.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다. (4)

“그럼 혹시, 한 달에 얼마쯤이나 주실 거예요?”

“⋯⋯제발 좀 닥쳐.”

“그만 좀 해, 이 새끼야!”

오검이 탈진한 얼굴로 청명을 부여잡았다. 해남에서부터 사선을 뚫고 오는 것보다 이놈을 말리는 게 더 힘들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아니⋯⋯. 자네들이 죄송할 건 없겠지.”

백천의 면목없는 사과에 당군악이 쓰게 웃었다. 그리고 청명을 보며 말했다.

“분명 당가에 돈이 있는 건 사실이네. 그리고 그게 자네들의 생각보다 꽤 많은 것도 사실일세.”

“크으. 얼굴에 부티 나는 거 봐라. 사람이 달라 보이네.”

⋯⋯크흠, 하고 헛기침한 당군악이 재차 입을 열었다.

“하지만 사천당가가 그 돈을 화산에 주는 일은 없을 걸세.”

청명의 눈이 획 돌아갔다.

“뭐요?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읍! 읍읍!”

끝내 다시 끌려가는 청명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쉰 백천이 당군악을 돌아보았다.

“괘념치 마십시오. 상황이 어려워진 사천당가에 금전을 요구할 만큼 화산은 막돼먹은 문파가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그런 말이 아닐세.”

“예?”

“돈을 써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다만⋯⋯ 그런 방식은 아니라는 것일세.”

당군악이 고개를 돌려 눈으로 현종을 찾았다.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이제 우리도 이런 주먹구구식 처리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네.”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당군악의 정중한 말에, 현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아니⋯⋯. 하지만 가주님. 그건 조금⋯⋯.”

“해야 할 일입니다, 맹주님.”

당군악은 단호했다.

“물론 맹주님께서 저어하시는 연유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천우맹은 그저 각 문파의 우애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연맹, 다른 것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지금 상황은 천우맹이 처음 결성될 때와는 너무도 다릅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이제는 조금 더 명확하고 확실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지금과 같이 느슨한 체제로는 다가올 변란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현종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물론 당군악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라는 게⋯⋯.

그때, 혹시 몰라 오검이 몸으로 쌓은 벽 사이로 청명이 별안간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어, 그러니까⋯⋯!”

“들어가!”

백천이 그 얼굴을 움켜잡아 다시금 밀어 넣으려 했지만 청명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기어이 입을 열었다.

“이왕 당가가 섬서로 옮기는 김에, 화음 주변에 천우맹의 본단을 만들자는 거예요?”

“그렇네.”

“그리고 지금 사방에 퍼져 있는 맹도들을 거기로 모조리 끌어모으자?”

“정확하네.”

여기까지라면 딱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은 아니다. 적어도 청명에게는 그랬다.

사실 섬서에 천우맹의 본단이 위치한다면 화산 입장에서는 든든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거꾸로 말하면 천우맹을 노리는 이들이 오직 섬서만을 공격하면 그만인 상황을 조성하는 것과도 같으니까.

하지만 청명은 당군악이 던진 이 미끼에서 차마 헤어날 수 없었다. 이유는⋯⋯.

“그리고 그 대가로 상납을 받자?”

“⋯⋯회비를 받자고 해야지. 상납이 아니라.”

“아, 그렇지! 회비, 회비! 헤헤. 말이 헛나왔어요.”

청명이 겸연쩍다는 듯 능청스레 웃었지만, 그 모습을 보는 이들이 모두 가증스럽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새끼 눈이 엽전 모양이 됐는데?’

‘분명히 알고 말한 거다, 저거.’

오검을 밀치고 본격적으로 다가선 청명이 크게 헛기침하더니 말을 이었다.

“흐음⋯⋯. 딱히 돈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중요하겠지.”

“아마 세상 모두보다 중요할걸?”

“저 새끼는 돈이면 화산도 팔아먹을 거야.”

“아, 거기 좀 닥치시고.”

오검에게 냅다 주먹 감자를 먹인 청명이 당군악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앞뒤 다 빼고 단도직입적으로 들어오는 그 말에 당군악이 쿡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있네.”

“그게⋯⋯.”

“이번 일을 통해 나는 뼈저리게 느꼈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사패련에 비해, 천우맹이 가진 결정적인 약점은 지켜야 할 곳이 너무도 많다는 것일세.”

“⋯⋯흐음.”

청명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당가가 당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걸세. 하지만 당해 보니 알겠더군.”

“남들은 당가 같은 꼴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

“생각해 보게. 만약 이번에 당가가 당하지 않았다면? 운 좋게 우리가 제때 당가에 도착해 만인방을 밀어 내었다면?”

“⋯⋯.”

“그 뒤에도 내가 과연 자네들을 지원하러 움직일 때, 이전과 같은 수의 정예들을 대동할 수 있겠는가?”

절대 무리일 것이다. 제 본진이 공격당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당연히 그곳을 지키는 것도 염두에 둘 테니까.

“사패련이 어떤 공격을 해 오더라도 며칠은 버틸 만큼 병력을 남기려면 적어도 반수 이상이 가문에 상주해야 할 걸세.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는가?”

“알기야 알죠.”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해야 하는 건, 지킬 곳을 줄이는 것일세. 아직 제대로 일이 터지기 전에 천하에 흩어져 있는 천우맹 소속 문파들을 모조리 섬서로 끌어모으는 거지.”

“⋯⋯무인들만이 아니라?”

“그렇네.”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남겨 두게 된다면 장일소는 당연히 그곳을 노릴 걸세. 그럼 우린 또다시 장일소에게 휘둘리게 되겠지. 아마⋯⋯ 당사자들이 격렬하게 말린다고 해도 그렇게 될 걸세.”

그건 당군악 자신에 대한 말이 아니라 청명에 대한 지적이었다.

만약 빙궁이 공격당해 빙궁도의 가족들이 장일소의 손에 죽어 나간다면, 빙궁이 만류하는 한이 있더라도 청명은 반드시 그곳으로 향할 거란 말.

청명은 차마 반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이, 각 문파의 핵심들이 모두 화음을 중심으로 하여 섬서에 모여 있게 된다면 우리는 섬서만 지켜 내면 되네. 장일소가 노릴 수 있는 곳도 극단적으로 줄어들고, 그가 쓸 수 있는 계략도 한정되겠지.”

“흐음.”

청명이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사실 그라고 해서 이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장일소는 그 손안에 수많은 패를 들고 있다. 거기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청명이라 해도 버겁다.

잃을 게 없는 자와 모든 것을 지켜야 하는 자의 싸움은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지 않겠는가. 결과가 정해져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중요한 건, 장일소가 든 패의 가짓수를 줄이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 전략은 분명히 유의미하다.

하지만 청명이 그걸 알면서도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한 이유는 딱 하나다.

돈.

사람을 끌어모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를 상황에서 대책 없이 일을 벌인다면 보급 때문에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

그 많은 이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고, 그들의 입에 적당한 음식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은하상단이 총동원되어야 한다. 다른 일은 다 제쳐 놓고 말이다.

화산 혼자는 절대로 그 막대한 지출을 감당할 수 없다.

“뭘 걱정하는지는 아네. 하지만 그건 자네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일세.”

“호언장담은 좋은데, 그게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에요. 당가나 남궁은 몰라도, 화산이나 빙궁, 야수궁은 살림살이가 좋은 편이 아닌 거 아시잖아요.”

“화산이?”

“⋯⋯.”

전 중원의 금자를 싹 쓸어 모으고 있는 화산이 은근슬쩍 그 척박한 변방에 있는 문파 사이에 왜 끼어드냐는 당군악의 노골적인 눈빛에 청명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 뭐⋯⋯ 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중이다 보니.”

“⋯⋯그렇다고 치세.”

“크흠. 여하튼!”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네. 나도 상납금⋯⋯. 아니, 각 문파가 내는 회비로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그건 그저 요식에 불과하겠지. 거기에 드는 모든 돈은 당가와 남궁이 감당할 걸세.”

“⋯⋯.”

“천우맹의 본단을 짓고 그곳에 올 이들을 먹여 살리는 것뿐만이 아닐세. 앞으로 있을 사패련과의 전쟁에 들 비용 역시 우리가 감당해야겠지.”

“괘, 괜찮으시겠어요?”

전쟁은 돈 잡아먹는 귀신과도 같다. 물론 무인의 전쟁은 군인을 대동한 전쟁에 비해 드는 돈이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쟁은 전쟁이다.

그런데 지금 가문이 가진 재력의 칠 할을 상실한 당가가 남은 돈을 모조리 그 전쟁 준비에 내어놓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쌓아 놓은 돈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건 이미 증명된 게 아닌가?”

“⋯⋯그렇긴 한데.”

예전 화산에도 돈은 많았지. 그게 싹 불타서 그렇지. 그게 다⋯⋯.

“이 실수로부터 배우는 게 없다면 같은 과오를 반복하게 될 뿐일세. 지금은 어설프게 가진 것을 지킬 때가 아니네. 오히려 적극적으로 내가 있을 곳을 만들어야 할 때지.”

“⋯⋯이야.”

청명이 감탄한 듯 바라보자 당군악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시선을 현종에게로 옮겼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맹주님.”

“하지만 가주님. 가주님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그 설득이란 게⋯⋯.”

현종의 얼굴이 난처해졌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조걸이 슬쩍 윤종에게 물었다.

“저, 사형.”

“응?”

“⋯⋯저거 그⋯⋯ 말은 좋은데, 협박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협박? 그게 무슨 소리냐?”

“아니, 그렇잖습니까. 사실 가진 재력의 삼 할을 내어놓는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어차피 그 대부분을 당가가 먹고살 것을 마련하는 데 써야 할 판 아닙니까?”

“⋯⋯어?”

윤종이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듣고 보니 그게⋯⋯. 어⋯⋯.

“그런데 지금 그걸 천우맹이라는 이름으로 대신 처리해 버리고, 그 대가로 다른 문파들 돈을 있는 대로 다 끌어오겠다는 거 아닙니까? ‘이런 상황인 우리도 냈는데 니들이 안 내?’ 하면서?”

“⋯⋯에이, 설마⋯⋯.”

“아니, 생각해 보시라니까요. 지금 천우맹에서 돈 있는 문파가 어딥니까?”

“남궁이랑⋯⋯.”

윤종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획 돌려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녹⋯림⋯⋯.”

“그죠?”

녹림은 돈을 많이 벌었다. 원래도 돈이 없는 문파는 아니었는데, 매화도의 중개무역을 처리하며 무척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명분이 없어서 그 새끼들이 번 돈을 갈취 못 하고 있던 판인데, 지금 가주님이 그 명분 깔아 주는 거 아닙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네가 상인 집안 놈이라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거 같은데⋯⋯.”

“정말요? 저거 보시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으응?”

윤종이 조걸이 턱짓한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죠, 태상장문인.”

“으응?”

“당가주님께서 이렇게 단호하게 제안하시는데, 그걸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아요?”

“⋯⋯아, 아니, 그게⋯⋯.”

“하시죠.”

“그⋯⋯.”

“해요.”

돌아가는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한 청명이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원을 위해서잖아요. 예? 중원을 위해서. 이게 내 욕심을 채우는 게 아니라, 중원을 위해서는 남궁이랑 녹림을 상대로 갈취⋯⋯. 아니, 협조를 얻어야죠. 다 양민들을 위한 거 아닙니까!”

“옳은 말입니다, 맹주님.”

“⋯⋯.”

“이제 숨통 좀 트이겠네. 으헤헤헷!”

가만 지켜보던 윤종이 힘없는 눈으로 조걸을 돌아보았다.

“⋯⋯근데 혹시 말이다.”

“예?”

“사람은 원래 집이 한번 불타면 이상해지는 거냐?”

“⋯⋯그건 저도 잘⋯⋯.”

현종을 양쪽에서 빈틈없이 압박하는 당군악과 청명을 보며 윤종은 끝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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