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8화.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다. (3)
현종과 마주 선 당군악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참고 기다려 주신 점, 사천당가를 대표하여 감사드립니다.”
그 예를 받은 현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당연히.”
불안한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이제 더 이상 사천은 그들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땅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현종은 묵묵히 기다렸다.
다른 이는 이해 못 할지 몰라도, 현종만큼은 알았다. 지금 당가에서 벌어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같은 일을 몇 번이고 겪었던 화산의 장문인이기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가주님. 그래서 정리는 조금 되셨습니까?”
그 물음에, 당군악이 호수처럼 깊은 눈으로 현종을 마주 보았다. 순간 현종은 저도 모르게 제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무인이 실력 면에서 성장하는 건 확인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이 성장하는 것은 웬만해서는 알아채기 힘들다.
하지만 지금 현종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가 그 극히 드문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 있음을. 고작 한나절에 불과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사천당가의 가주, 독왕 당군악은 분명 무언가를 이루어 냈다.
당군악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싶었지만⋯⋯.”
굳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가솔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한 발짝 뗀 것에 불과하지요. 쌓이고 쌓였던 것을 모두 덜어 내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요. 그럴 것입니다.”
현종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은 가진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지켜야 할 것도 없었다. 그건 분명 서글픈 일이지만, 거꾸로 화산이 이제까지의 모습을 털어 내고 새로이 나아가는 데는 분명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당가는 아니다. 독고와 공방을 잃었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사천당가. 견고한 성처럼 그들을 둘러싼 가문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시 쌓기가 말처럼 쉬울 리 없다.
그럼에도 당군악은 확신에 찬 얼굴로 현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작했으니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현종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때 툭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럼 이제 가도 되나요?”
당군악과 현종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청명이 뾰로통한 얼굴로 하늘을 향해 턱짓했다.
“다시 밤이 되어 가는 것 같은데⋯⋯. 다시 야영이라도?”
“그럴 수는 없지.”
당군악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폐를 끼치는 건 당가의 방식이 아니니까.”
“이미 충분히 끼치신 것 같은데.”
“입 좀 다물어라!”
“여하튼 이놈의 조동아리!”
“뭐, 씨! 내가 틀린 말 했어?”
뒤에서 얼른 잡아챈 오검의 손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청명은 계속 소리를 질렀다. 앓는 소리를 흘린 현종이 당군악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틀린 말도 아니지요.”
당군악이 쿡쿡 웃고는 남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두 눈에 일순 아련함이 스쳤지만, 당군악은 그 미련을 남쪽의 땅에 그대로 남겨 둔 채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출발하시지요.”
“예.”
당군악이 가솔들을 이끌고 발을 내디뎠다.
과거를 뒤로하고, 이제부터 그들이 살아가야 할 곳으로.
“⋯⋯섬서에 자리를 완전히 잡으시겠다고 하셨습니까?”
백천의 얼굴에 당황이 가득 묻어났다. 경악하는 그를 보며 당군악이 물었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말 그대로 경악이었다.
“이미 협의했던 것이 아닌가?”
“그, 그렇긴 하지만⋯⋯.”
“알고 있네. 의미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
“⋯⋯예.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백천은 혹여 제가 말실수라도 했을까 봐 움찔움찔했다. 그런 그를 보고 당군악이 피식 웃었다.
“그저 해야 할 결정을 했을 뿐이네.”
당군악은 뒤를 따라오는 이들을 돌아보며 살폈다.
물경 오백이 넘는 인원이 따라오고 있다. 상황을 보아 합류할 당가 관련 인물들까지 합친다면 무릇 천에 달하는 인원이 될 것이다.
“물론 나도 당연히 사천으로 돌아가고 싶네. 내가 나고 자란 사천 땅이 저 패군의 발아래 짓밟힌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네.”
“⋯⋯이해합니다.”
섬서가, 그리고 화음현이 사패련의 손에 떨어진다면? 저 성질 나쁜 사질 놈을 끌어들일 것도 없이, 당장 백천부터 눈이 뒤집힐 게 분명했다.
터전을 잃는다는 건 단순히 땅을 잃는 게 아니다. 그 땅에서 살아온 추억을 모두 잃는 것과도 다름없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게 나을 수도 있네. 가문의 토대를 다시 쌓겠다고 하면서 고작 땅덩어리에 집착할 수는 없네. 지금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땅을 일굴 각오가 필요하네. 가문을 위해서도, 그리고⋯⋯ 저들을 위해서도.”
가솔들을 살피는 당군악의 시선에 온기 어린 염려가 묻어났다.
무학을 익히지 못한 이들이라 그의 기준으로는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이동하고 있지만, 모두 군말 없이 발을 내디디고 있다.
이제부터 당군악이 해야 할 일은 아직 저들의 눈에서 완전히 가시지 않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이다.
“⋯⋯미안하게 됐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주님!”
당군악이 착잡하게 꺼낸 사과에, 백천이 격하게 손을 내저었다.
“물론 이 일에서 제 의견이 그리 중요하겠냐마는, 어쨌든 당가가 섬서로 와 주신다면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그보다 더 든든한 일이 어딨겠습니까?”
“그리 말해 주니⋯⋯.”
“헤헹!”
훈훈한 분위기의 허리가 뚝 끊겼다. 떨떠름해진 당군악과 백천이 동시에 한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 가득 ‘나는 반대요.’라고 써 놓은 듯한 청명이 보였다.
“어디요?”
“섬서⋯⋯.”
“어디?”
“화⋯⋯음.”
“화아아아아으으음?”
청명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갑작스럽게 악귀가 튀어나오는 저 광경을 백천이야 자주 봤으니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 꼴을 자주 겪지 못한 당군악은 순간 저도 모르게 흠칫하여 뒤로 물러났다.
“거 알 만큼 아실 분이, 뭐요? 화음에 자릴 잡아?”
“⋯⋯그게⋯⋯.”
“아니, 이 양반 그렇게 안 봤는데 상도의도 없나! 그 좁아터진 땅에 뭘 주워 먹을 게 있다고 당가가 자리를 잡아요, 당가가! 우리 먹을 것도 모자란데.”
“크흠. 그게, 천년 만년 있겠다는 게 아니라⋯⋯.”
“야, 인마! 그게 뭔 소리냐? 이런 때에 당가가 와 주시면 우리는 오히려 감사한 거지.”
윤종이 듣다 못해 끼어들자 청명이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감사? 지금 설마 감사라고 했어? 아니, 빌어먹을 섬서에 종남 새끼들 하나 같이 있는 것만 해도 속이 터져서 언제고 종남산에 불 싸질러 싹 태워 버려야지 하고 있는데!”
“지금 이 말은 화산의 공식 입장과 무관함을 알려 드립니다.”
“⋯⋯진짜 누가 들을까 무섭다. 저 새끼가 도인입니다, 여러분.”
오검이 저마다 얼굴을 감싸며 중얼댔지만, 청명은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거기에 당가까지 기어들어 오면, 어? 우린 뭘 먹고 살아, 우린!”
“아니, 그⋯⋯.”
“그리고 사람이 어디 한둘이야? 오백이 훌쩍 넘는 사람들을 먹이고 재워야 하는데! 돈은 뭐 땅 파면 쑥쑥 나오냐?”
그 말에는 조걸이 발끈했다.
“야, 이 새끼야! 어디 건방지게 당가 앞에서 돈 소리야! 당가가 얼마나 부잔데!”
“뭐?”
“당가의 재력에 대면 우리 집은 다리 밑에 얼기설기 지어 놓은 거지굴이야! 당가가 쌓아 놓은 희귀한 금속이며, 독물 하나만 내다 팔아도 그게 돈이 얼만 줄 알아?”
“어, 그래. 말 잘했다. 비싸고 희귀한 독물, 성 한 채는 살 수 있는 보석과 금속들, 그리고 창고 그득그득 쌓아 놓은 재화들.”
“그래, 인마!”
“그거 지금 다 어디 있는데?”
“어?”
그야⋯⋯. 사천에서 어⋯⋯.
“싸그리 불탔지.”
“불은 공평한 거야.”
“응, 공평하지. 화산한테도 공평했지.”
“그 이야기는 왜 꺼내!”
당가가 수백 년에 걸쳐 쌓아 온 재물은 미처 피난길에 챙겨 오지 못했다. 대부분이 불탔거나, 장일소가 낄낄대며 먹어 치웠을 것이다.
“어, 그러니까 그 말은⋯⋯.”
“그래. 그러니까 그건⋯⋯.”
오검이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일제히 한쪽을 돌아보았다.
순간 쏟아지는 시선 앞에, 당군악의 얼굴에선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저들의 눈빛이 명백히 말하고 있었다. ‘뭐야? 거지잖아?’ 하고⋯⋯.
응? 소소야? 왜 너까지 그런⋯⋯.
“부자인 게 아니라 부자였던 거지!”
“크흐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당군악이 점점 시무룩해졌다. 백천이 얼른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물론 지금이야 상황이 어렵지만⋯⋯ 당가는 당가 아니냐? 우리가 조금만 도와드리면 곧 다시 융성하게⋯⋯.”
“어, 융성해져서 화산에 입문할 애들을 뺏어 가겠지. 사업장도 적당히 나눠 먹고, 그치? 꼭 종남 새끼들처럼.”
“⋯⋯하남으로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사, 사숙!”
“실수다⋯⋯. 말이 헛나왔어.”
백천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고, 오검의 냉정한 눈초리가 쏟아졌다.
“인성이 나빠진 건지, 원래 나빴던 건지.”
“저는 후자라고 봅니다. 피가 나빠요. 종남 출신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일리 있군.”
“⋯⋯개자식들.”
옥신각신하는 오검을 보며 당군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제자를 뺏을 일은 없을 걸세. 오히려 우리가 뺏기게 된 판이니까.”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가의 여식들이 화산에 입문하고 싶다더군.”
“⋯⋯사실 모른 척하고 싶기는 하지만, 가주님의 목소리가 워낙 크셔서 듣게 된 건데⋯⋯ 그 대신 당가의 무학을 가르치기로 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원하는 이들에겐 그렇게 할 걸세. 하지만 자네들도 알다시피, 당가의 무학은 범용적이지 않네.”
“⋯⋯그것도 그렇죠.”
독과 암기는 평생에 걸쳐 익히고도 절정에 오르기 난해한 무학이다. 그 무학으로 일가를 이뤘기에 당가가 대단하다고 불리는 것이고.
“늦게 시작하는 무학인데 굳이 가시밭길을 강요할 필요는 없지. 화산에 입문하기를 원한다면 그것 역시 허락할 생각이네.”
“아니, 듣다 보니 웃기네? 우리가 제자를 받는 건데 그걸 왜 댁이 허락하십니까? 이 양반이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시⋯⋯. 읍! 으으읍!”
청명의 입을 손으로 대번에 틀어막은 백천이 나머지 한 손으로 영웅건을 풀었다. 그리고 청명의 입에 재갈 물리듯 쑤셔 넣어 버렸다.
“⋯⋯저거 생각보다 용도가 다양하네.”
“그러게.”
“이 새끼 좀 저리 치워 버려라!”
“예.”
청명이 끌려가자 당군악이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식들만이 아니네. 아직 당가의 무학을 제대로 접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에게도 화산에 입문하는 길을 열어 줄 셈이네.”
“사실 저희 입장에서야 더없이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백천이 뭔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한곳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곳엔 사지가 결박된 채, ‘어디 당가 새끼들 기어들어 오기만 해 봐라. 내가 손수 지옥 구경 시켜 준다.’라는 말을 눈빛만으로 쏟아 내는 청명이 있었다.
“⋯⋯본인들이 이겨 내겠지.”
당군악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괜찮지는 않지만⋯⋯.
“그러니 잘 부탁⋯⋯.”
부우우욱!
그 순간 제 몸을 묶은 끈을 단숨에 끊어 낸 청명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입에 박혀 있던 백천의 영웅건을 포탄처럼 뱉어 냈다.
“아니, 제자고 나발이고! 그래서 돈은 어쩔 건데요! 남의 땅에 들어와 자리 잡으려면 자릿세를 내셔야지!”
“⋯⋯그냥 네가 사파 해라.”
“생각해 보면 이 새끼가 강남에서 태어나 사파 새끼 됐으면 장일소가 저리 날뛰지도 못했을 텐데.”
대신에 다른 지옥도가 펼쳐졌겠지만.
“돈도 없는 인간들을 오백이나 먹여 살려? 우리가 뭐 자선사업 해?”
“어.”
“응?”
청명이 윤종을 돌아보았다. 윤종이 담담히 말했다.
“맞아. 우린 도관이잖아. 자선사업 하지.”
“어? 진짜? 도관이 원래 그런 걸 하는 데야?”
⋯⋯윤종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원신천존이시여.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것입니까. 대체 어디부터⋯⋯.
“크흠! 여하튼 나는 절대 인정 못 해! 화음에서 개방 새끼들이 빌어먹는 것도 거슬려 죽겠는데, 무슨 거지를 추가로⋯⋯.”
“돈은 있네.”
“⋯⋯예?”
청명이 당군악을 획 돌아보았다.
“챙겨 오셨어요?”
“보다시피 못 챙겨 왔지.”
“그럼 뭐, 평소에 좀 넉넉히 들고 다니세요?”
“누가 전장에 돈을 들고 나가나?”
잠깐 누그러지려던 청명의 눈이 도로 확 사나워졌다.
“그럼 돈이 어디서 나요!”
“당가도 과거에 마교 때문에 사천을 잠시 떠난 적이 있지 않은가?”
“네? 그랬⋯⋯죠?”
“그때부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재산의 삼 할 정도는 다른 지역과 전장에 분배하여 보관하고 있네.”
“얼마요?”
“삼 할.”
“어⋯⋯. 그게 그러니까⋯⋯.”
사천에서 수백 년 동안 사천 사람들의 고혈을 쪽쪽 빨아먹던 당가 재력의 삼 할이면⋯⋯. 어⋯⋯.
슬쩍 하늘을 올려다본 청명이 고개를 내렸다. 당군악을 보는 얼굴에 어느새 더없이 따뜻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섬서에 오신 걸 환영해요. 헤헤. 친구 좋다는 게 뭔가요?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쉬었다 가세요! 지금부터는 저희가 지켜 드릴게요!”
⋯⋯그냥 하남으로 가서 소림에 의탁할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당군악이었다.